[중도시평] 의료개혁의 틈바구니

  • 오피니언
  • 중도시평

[중도시평] 의료개혁의 틈바구니

이근찬 우송대 보건의료경영학과 교수

  • 승인 2024-10-01 10:21
  • 신문게재 2024-10-02 18면
  • 김흥수 기자김흥수 기자
이근찬
이근찬 우송대 보건의료경영학과 교수
박완서의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은 작가가 남편을 간호하며 쓴 간병기 형식의 소설로, 30년 전에 출간된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남편은 빠르게 진행되는 소세포폐암 진단을 받고 항암 치료를 받는다. 항암제로 인해 머리카락이 빠지면서 암이 죽어간다고 이해한 남편은 자식들이 사준 모자를 쓰고 생활한다. 암은 뇌까지 전이되었고, 결국 남편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소설 중간에는 이렇게 말한다. "(죽음을 앞둔) 인간다운 최선은 가장 아까운 시간을 보통처럼 구는 거였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에게 순간순간 열중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우리 부부에게 일생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 열 달이나 계속됐다."

2022년 통계청 사망원인 통계에 따르면, 한국에서 병원에서 사망하는 비율은 74.8%로, 가정에서 사망하는 비율은 16.1%에 불과하다. 병원이 사망 장소로 이용되는 비율은 OECD 평균 49%에 비해 매우 높은 수준이며, 한국은 36개 국가 중 가장 높다. 미국은 36%, 영국은 40%, 네덜란드는 23%, 일본은 한국과 비슷한 비율을 보인다.

1991년, 박완서의 소설이 출간될 당시 우리나라 국민의 사망 장소는 가정이 74.8%, 병원이 15.3%였다. 이는 현재와 정반대의 상황이다. 우리의 일상은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의료화됐다. 의학 지식이 증가하면서 일상생활이 질병으로 규정되고 의학적 관리의 대상으로 확장되는 현상을 '일상생활의 의료화'라고 한다. 출산에서부터 노화, 죽음까지 의학적 관리가 이뤄지고 있으며, 대머리, 비만, 저신장, 과잉행동, 갱년기 등도 모두 의료적 치료 범주에 포함된다. 이 경향은 생명공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태아의 유전자 검사까지 확장됐다. 시험관 아기 시술을 받는 여성들은 착상 전 배아 단계에서 유전 질환이나 염색체 이상 여부를 진단한 후 정상 배아만을 이식하는 착상 전 유전진단(PGT)을 의사의 권유로 활용하고 있다.

일상생활의 의료화가 진행되면서 우리는 의사의 조언을 거부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의료 문제에서 사람들은 의료 전문직의 지배와 통제에 놓이게 되고, 의료 정책 수립 과정에서도 전문직의 요구와 의견에 크게 의존하게 된다. 이로 인해 의료 시스템은 의사 중심, 치료 중심으로 구조화된다. 이러한 '규제 포획' 현상은 정부가 의료 전문직을 통제하고 제한하기보다는,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의료 대란은 정부와 의사 간의 틈이 벌어지면서 비롯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의대 정원 확대가 포함된 필수의료 패키지 발표를 시작으로, 공공정책 수가 신설, 상급종합병원 구조전환, 의료 인력 수급 추계기구 설치 등의 후속 조치가 연이어 발표되고 있다.



정부가 강조하는 자유시장과 법치주의를 중시하는 고전적 자유주의는 지역마다 고유한 의료 요구가 있으며, 정부는 외부인으로서 이러한 요구에 대응할 능력이 제한적일 수 있다는 인식을 기반으로 한다. 다원적인 선택을 존중하는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분권화와 다원화가 이루어져야 하지만, 현재 의정 갈등을 해소해야 할 정책 당국에게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으며, 시민 의견을 수렴할 여건도 부족하다.

올해 초 의대 정원 확대에 대해 대다수 국민이 찬성했지만, 최근 여론조사에서는 의대 정원 확대 여부를 재논의하자는 의견이 거의 과반을 차지하고 있다. 즉,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라는 상황이다.

박완서의 소설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맺는다. "오직 틈바구니만이 예외다. 내가 생전 틈바구니에 끼여보지 않았다는 게 무슨 뜻일까? 서로 목청을 높여 싸우는 걸 봐도 전처럼 선뜻 어느 쪽이 옳거니 양자택일이 안되고, 또 그놈의 틈바구니에 사로잡히게 된다. 여봐란듯이 틈바구니에 끼기 위해선 거친 두 목청 사이에 낀 틈바구니의 숨결을 찾아내야만 할 것 같다. 그가 남긴 모자가 나에겐 모자라는 물질 이상이듯이 틈바구니란 말 또한 말뜻 이상의 것, 한없이 추구해야 할 화두임을 면할 수가 없다." 틈바구니에 서 있는 우리는 무엇이 진정으로 필요할까? /이근찬 우송대 보건의료경영학과 교수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천안 A대기업서 질소가스 누출로 3명 부상
  2. 천안김안과 천안역본점, 운동선수 등을 위한 '새빛' 선사
  3. 신탁계약 남발한 부동산신탁사 전 임직원들 뒷돈 수수 '적발'
  4. 성추행 유죄받은 송활섭 대전시의원 제명 촉구에 의회 "판단 후 결정"
  5. "시설 아동에 안전하고 쾌적한 체육시설 제공"
  1. 김민숙, 뇌병변장애인 맞춤 지원정책 모색… "정책 실현 적극 뒷받침"
  2. ‘몸짱을 위해’
  3. 회덕농협-NH누리봉사단, 포도농가 일손 돕기 나서
  4. 내년 최저임금 1만320원 지역 노사 엇갈린 반응… 노동계 "실망·우려" vs 경영계 "절충·수용"
  5. 대전상의-대전조달청, 공공조달제도 설명회 성료

헤드라인 뉴스


이재명 정부 해수부 이전 강행…국론분열 자초하나

이재명 정부 해수부 이전 강행…국론분열 자초하나

이재명 정부가 해양수산부 부산 이전을 추진하면서 국론분열을 자초하지 않을까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집권 초 미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위협 등 매크로 경제 불확실성 속 민생과 경제 회생을 위해 국민 통합이 중차대한 시기임에도 되려 갈등만 키우고 있다는 지적이다. 공론화 절차 없이 해수부 탈(脫) 세종만 서두를 뿐 특별법 또는 개헌 등 행정수도 완성 구체적 로드맵 발표는 없어 충청 지역민의 박탈감을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해수부는 10일 이전 청사로 부산시 동구 소재 IM빌딩과 협성타워 두 곳을 임차해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두 건물 모두..

31년 만에 폐원한 세종 `금강수목원`...국가자산 전환이 답
31년 만에 폐원한 세종 '금강수목원'...국가자산 전환이 답

2012년 세종시 출범 전·후 '행정구역은 세종시, 소유권은 충남도'에 있는 애매한 상황을 해결하지 못해 7월 폐원한 금강수목원. 그동안 중앙정부와 세종시, 충남도 모두 해법을 찾지 못한 채 사실상 어정쩡한 상태를 유지한 탓이다. 국·시비 매칭 방식으로 중부권 최대 산림자원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열 수 있었으나 그 기회를 모두 놓쳤다. 세종시 행정중심복합도시와 인접한 입지의 금남면인 만큼, 금강수목원 주변을 신도시로 편입해 '행복도시 특별회계'로 새로운 미래를 열자는 제안이 나왔다. 무소속 김종민 국회의원(산자중기위, 세종 갑)은 7..

신탁계약 남발한 부동산신탁사 전 임직원들 뒷돈 수수 `적발`
신탁계약 남발한 부동산신탁사 전 임직원들 뒷돈 수수 '적발'

전국 부동산신탁사 부실 문제가 시한폭탄으로 여겨지는 가운데 토지신탁 계약 체결을 조건으로 뒷돈을 받은 부동산신탁회사 법인의 임직원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대전지검 형사4부는 모 부동산신탁 대전지점 차장 A(38)씨와 대전지점장 B(44)씨 그리고 대전지점 과장 C(34)씨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수재등) 등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고 11일 밝혔다. 또 시행사 대표 D(60)씨를 특경법위반(증재등) 혐의로 함께 불구속 기소했다. A씨 등 부동산 신탁사 대전지점 차장으로 지내던 2020년 11월부터 2022년 4월까지 시행..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몸짱을 위해’ ‘몸짱을 위해’

  • ‘꿈돌이와 전통주가 만났다’…꿈돌이 막걸리 출시 ‘꿈돌이와 전통주가 만났다’…꿈돌이 막걸리 출시

  • 대전 쪽방촌 찾은 김민석 국무총리 대전 쪽방촌 찾은 김민석 국무총리

  • ‘시원하게 장 보세요’ ‘시원하게 장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