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여행] 56- 대전의 노포 한밭식당 설렁탕과 깍두기의 참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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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여행] 56- 대전의 노포 한밭식당 설렁탕과 깍두기의 참맛

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가

  • 승인 2024-12-30 16:12
  • 신문게재 2024-12-31 8면
  • 김지윤 기자김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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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밭식당. (사진= 김영복 연구가)
조선시대 회덕현과 진잠현 2개의 현(縣)이 공주목(公州牧) 일부로 구성된 지역이 1914년 대전군(大田郡)이 되었다.

이 때의 대전군은 넓은 들의 채소 밭 등이 있었고, 이 일대를 '한밭' 또는 큰밭 즉 대전(大田) 된 것이다.

이 대전에 1905년 경부선 1914년 호남선이 개통되면서 교통의 중심지가 되어 역을 중심으로 한 작은 시가지가 형성되었다.

그러면서 공주에 있던 충남도청이 일제강점기인 1932년 대전으로 이전하면서 급성장하게 되었다.



그렇다 보니 대전의 음식이라고 내세울 만한 독특한 음식문화가 있을리 만무했다. 교통의 중심지고 도청소재지라고 해 봐야 해방 후 1949년만 해도 대전시의 인구라야 고작 12만7000명 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과 함께 충청 출신 외에 영호남과 수도권, 북한 실향민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1955년 17만3천명으로 늘었고, 1960년에는 22만명으로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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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밭식당 설렁탕. (사진= 김영복 연구가)
한국전쟁 휴전 이후 대전의 인구가 늘어나며 1955년 설렁탕을 주메뉴로 하는 한밭식당이 설립된다.

이지방 저지방을 떠 돌아다니며 행상을 하던 박태원(朴泰元)씨가 충남도청소재지며 교통의 요지인 대전에 서울에서 한참 인기를 얻고 있는 설렁탕집을 한밭식당이라는 상호로 시작한 것이었다.

국밥을 한문으로 표기하면 탕반(湯飯)이다.

구한말 현방에서 사 온 소의 모든 부위를 가마솥에 넣고 끓여 낸 육수에 간장으로 간을 한 이 장국밥을 양반들이나 부자들은 좀더 고상하게 탕반(湯飯)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태생된 음식이 바로 서민들이 즐겨 먹던 설렁탕이다. 설렁탕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897년 1월 21일 일본 요코하마(橫濱)에서 발간된 게일(Gale, J S )의『한영자뎐(韓英字典, A Korean-English Dictionary)』에 나오는 '셜넝탕 A stew of

beef intestines'(소의 내장으로 끓인 국)이다. 1920년대의 신문과 잡지들은 한결같이 설렁탕을 서울의 명물로 기록하고 있다. 설넝탕 하면 경성(서울)이 따라 붙을 정도로 설넝탕은 서울의 명물이다. 설넝탕 팔지 않는 음식점은 껄넝껄넝한 음식점이다.' -1926년 8월 11일자 '동아일보'-라고 할 정도였다.

20세기 이전에 경성의 대표적인 설렁탕집하면 남대문 밖 잠바위골(현재 중림동)이었다. 1929년 9월 27일자 『별건곤(別乾坤)』제23호에 실린 '경성명물집'이란 기사에 의하면 '남문(南門) 밖 잠배(紫巖)(잠바위골) 설넝탕을 제일로 쳐서 동지 섣달 추운 밤에도 10여 리 밖에 있는 사람들이 마치 여름날에 정릉 물맞이나 악바위골 약수 먹으러 가듯이 쟁투를 하고 갔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남대문 밖의 잠배가 유명해진 것은 남대문 밖에 형성된 칠패시장 때문이었다. 한강에서 올라오는 어물과 삼남의 물산들은 한강을 거쳐 칠패시장을 통해 유통되었다. 남대문 안쪽에 있던 선혜청(宣惠廳) 창내장(倉內場)과 바깥의 칠패시장을 오가는 사람들은 잠배에서 설렁탕 한 그릇을 먹고 하루를 시작했다. 잠배에는 대창옥 등 설렁탕을 파는 집들이 있는 음식점거리가 있었다.

서울 장안에는 한때 이름난 설렁탕집이 몇 군데 있어서 대성관(大成館)· 대창옥(大昌屋)·사동옥(寺洞屋)· 이남옥(梨南屋)· 이문옥(里門屋) 등을 들 수 있는데, 지난날 전통적인 설렁탕집에서는 문간이나 부글부글 끓는 가마솥 옆에 피 묻은 소머리를 놓아두는 것으로 간판을 대신했다고 한다.

토방에 차린 설렁탕집을 들어서면 군데군데 소금· 고춧가루· 후춧가루· 파를 담은 종지가 놓여 있는데, 국은 손님이 보는 앞에서 직접 만다. 뚝배기에 밥을 퍼서 끓고 있는 국물로 토렴하여 식은 밥을 데운 다음 국물은 다시 솥에 따라 버리고 그 위에 국수를 한 사리 얹는다. 그리고는 건더기를 얹는데, 건더기는 채반에 가려 담아놓은 혓밑· 우랑· 우신·혹살 등을 손으로 집어 얹고 큼직한 나무국자로 펄펄 끓는 국물을 퍼 담는다. 전통적인 설렁탕집에서는 소를 한 마리 잡으면 소가죽과 오물을 뺀 거의 모든 부위, 즉 소뼈다귀· 내장· 소머리까지 큰 가마솥에 함께 넣고 새벽부터 다음날 밤 한 시까지 끓였다. 따라서 자정 무렵부터 밤 한 시까지는 국물이 바짝 졸은 진국이므로 이때쯤이면 단골손님들이 모여든다는 것이다. 요즘 음식점에서 급하게 끓여내는 설렁탕과는 음식 때깔이며 맛이 사뭇 달랐다고 한다.

1920년 경성 내외에 25군데-1920년 10월 8일자 '매일신보')-정도였던 설렁탕집은 1924년에 100군데-1924년 6월 28일자 '동아일보', 경성부재무당국조사-로 급격하게 늘어난다. 1920년대 중반이 되자 '민중의 요구가 답지하고 조선사람의 식성에 적합한 설렁탕은 실로 조선음식계의 패왕'-1924년 10월 2일자 '매일신보'-으로 불렸다. 설렁탕에 관한 설명을 손정규(孫貞圭 1896~1955)는 1940년 일본에서 출판한 일본어판 『조선요리(朝鮮料理)』에서 "설렁탕은 소고기의 잡육. 내장 등 소의 거의 모든 부분을 뼈가 붙어있는 그대로 넣고 하루쯤 곤 것인데, 서울 지방의 일품 요리로서 값싸고 자양분이 많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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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밭식당 설렁탕. (사진= 김영복 연구가)
"설넝탕은 물론 사시(四時)에 다 먹지만 겨울에 겨울에도 밤 자정이 지난 뒤에 부르르 떨리는 어깨를 웅숭크리고 설넝탕 집을 찾아가면 우선 김이 물씬물씬 나오는 따스한 기운과 구수한 냄새가 먼저 회를 동하게 한다. 그것이 다른 음식집이라면 제 소위 점잔하다는 사람은 앞뒤를 좀 살펴보느라고 머뭇거리기도 하겠지만, 설넝탕집에 들어가는 사람은 절대로 해방적(解放的)이다. 그대로 척 들어서서 '밥 한 그릇 줘' 하고는 목로 걸상에 걸터 앉으면 일분이 다 못되어 기름기가 둥둥 뜬 뚝배기 하나와 깍두기 접시가 앞에 놓여진다. 파·양념과 고춧가루를 듭신 많이 쳐서 소금으로 간을 맞추어가지고 훌훌 국물을 마셔가며 먹는 맛이란 도무지 무엇이라고 형언할 수가 없으며 무엇에다 비할 수가 없다." 이 글은 1929년 12월1일 『별건곤(別乾坤)』이란 잡지에 '우이생(牛耳生)'이란 필명을 가진 사람이 '괄세 못할 경성(京城) 설넝탕'이란 제목으로 쓴 기사의 일부분이다.

이 당시 까지만해도 설렁탕집에서는 배달부를 두고 설렁탕을 배달했던 것 같다. 1925년 3월17일 조선일보를 보면 "시내 종로(鐘路) 일정목 20번지 설렁탕 배달부 홍정인(洪淨仁 23세)이 15일 오후에 자전거를 타고 광화문통(光化門通) 95번지 부근을 지나다가 낙원동樂園洞) 국사문(鞠士文)의 둘째아들 국인용(鞠仁用 7세)과 충돌되어 인용의 두부(머리)에 약 십일가량의 치료를 요하는 중상을 당케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 장교 근처 설렁탕집에서는 음식도 잘하고 손님에게도 친절히 하고 자기 영업도 잘되어 가더니 근일에는 전과 같지 못한 중 추위를 견디지 못하여 더운 국물을 마시러 들어간 손님에게 차디찬 국물을 갖다주니 어찌하여 그런지 아무리 바쁘더래도 그와 같이 하여서는 누가 다시 또 갈까 영 없이 되는 사람은 좀 주의하는 것이 어떠할는지 -1920년 12월15일 '조선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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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종전 후 폐허가 된 서울 설렁탕집. (사진= 김영복 연구가)
이렇게 전성기를 구가하던 서울의 설렁탕은 6·25전쟁 이후 된서리를 맞는다. 이 당시 까지 만 해도 설렁탕은 셜렁탕, 셜넝탕, 설넝탕, 설녕탕, 설농탕(雪濃湯) 등 1950년대까지 표기가 통일되지 않고 사용된다. 전에는 이것을 한자로 '雪濃湯'이라고 표기한 곳도 더러 있었다.

그런데, 서울에서 설렁탕 장사가 시들해 질 즈음 1955년에 설렁탕집을 대전의 한밭식당은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대전에 가면 으례히 한밭식당의 설렁탕을 먹고 와야 된다고 할 정도로 유명했다. 그래서 전국에서 대전을 찾는 사람들은 한밭식당을 들러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방골이라 불리는 엉덩이살과 물거리5관, 살코기3관, 1관반 가량의 소무릎뼈를1드럼반정도의 물에 36시간 끓여 뼈속의 칼슘과살코기의 단백질을 홈뻑우려내어 극비(極秘)의 어떤 곡류를 혼하여 은근한 불에 끓여 육식(肉食)에 먹기좋은 밥을 말아주는 것이 한밭식당의 설렁탕 맛이다.

한밭식당의 설렁탕이 유명해지자 1960년대 초 급기야 설렁탕의 본 고장인 서울 다동과 서린동으로 진출하게 된다.

서울에 구한말부터 유명한 잠배설렁탕, 이문설렁탕 등 유명한 설렁탕집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한밭식당이라는 상호는 마치 설렁탕집의 대명사가 된 듯 전국으로 번져 나갔고, 급기야는 미국 등 외국 교민사회로도 번져 나갔다.

미국 뉴욕, 로스엔젤스, 시카고 등에도 한밭식당의 간판이 걸리게 된다. 물론 한밭식당이라는 간판을 걸어 놓고 설렁탕이 아닌 한식을 파는 식당도 더러 있다. 이처럼 대전의 한밭식당은 이미 그 유명세로 글로벌화 되었다. 특히 한밭식당의 설렁탕 못지 않게 유명한 것은 굵직굵직하고 넓적한 석박지 모양의 새빨간 깍두기가 유명했는데, 이 깍두기는 다른 집에서 흉내 낼 수 없는 충청도 지방의 고유한 공주깍두기로 이 깍두기만 담는 요리사가 별도로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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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조선만화 설렁탕. (사진= 김영복 연구가)
대전은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백제의 왕도라 할 수 있는 공주의 음식문화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일제 강점기 조선식찬연구소(朝鮮食饌硏究所)를 운영하던 지식인 홍선표(洪善杓)가 1937년 11월 10일자'동아일보'-에 깍두기의 유례를 "정종조(正宗朝 : 정조를 정종으로 발못 기재 됨)의 사위되는 영명위(永明慰) 홍현주(洪顯周)의 부인이 임금에게 여러가지 음식을 새로히 만들어 들일때 처음으로 무를 쓰러 깍두그를 만들어 드렸드니 대단히 칭찬하시고 잡수인일로부터 여염가 가지 전파하였다는 것인데, 그때 일흠을 '刻毒氣(각독기)'라 하였고 민간에 전파하기는 그 때 대신중에 일흠은 기록된것이 없음니다만는 공주에 낙향하야 각두기를맨들어 먹엇는 까닭으로 각두기가 공주에서 부터 민간으로는 시작된 고나게로 오늘가지 공주까두기라고 유명한 것입니다." 라는 내용의 기사를 썼다. 홍선표(洪善杓)가 동아일보에 기고한 3년 후인 1940년 6월에 국한문 혼용으로 『조선요리학(朝鮮料理學)』이라는 요리서에 "200년 전 정조의 사위인 영명위(永明慰) 홍현주(洪顯周1793-1865)의 부인(숙선옹주(淑善翁主 1793년 3월 1일 ~ 1836년 6월 7일)이 임금에게 처음으로 깍두기를 담가 올려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각독기(刻毒氣)라 불렀으며, 그 후여염집에도 퍼졌다. 고춧가루 대신 붉은 날고추를 갈아서 쓰면 빛깔이 곱고 맛도 더욱 좋다." 라고 기록 했다.

따끈한 설렁탕 국물에 걸쭉한 공주깍두기 국물을 넣어 먹으면 칼칼하고 시원 맛이 환상적이었다.

오죽하면 서울의 설렁탕집들이 한밭식당의 깍두기를 흉내 내어 설렁탕에 당연히 깍두기가나오게 될 정도였다.

오죽하면 1974년 대전시내 1천여개 음식점이 있었으나 대전을 찾는 여행객들 70% 이상이 한밭식당의 설렁탕과 깍두기를 찾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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