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내일] 최세진과 언문 자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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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내일] 최세진과 언문 자모

백낙천 배재대 국어국문한국어교육학과 교수

  • 승인 2026-05-10 16:53
  • 신문게재 2026-05-11 19면
  • 송익준 기자송익준 기자
백낙천천
백낙천 교수
조선 시대 세종 이후 가장 뛰어난 어문학자를 거론하자면 단연 최세진이다. 최세진은 신분은 비록 한미(寒微)하여 중인 계급의 역관 출신이었지만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쓰고 중국과의 외교에서 주고받던 공문서인 이문(吏文)에 조예가 깊고 한어(漢語) 곧 중국어에 능통하여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통역을 담당하였다. 그래서 왕의 신임을 얻고 명나라 외교에 관한 문서를 전담할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아 역관 출신임에도 문신(文臣)의 벼슬에 올랐으며, 남경과 요동의 지도를 구해와 중종에게 진상할 만큼 정무적 능력도 갖춘 인물이었다. 최세진은 1468년(세조 14)에 사역원의 한어(漢語) 역관 최발의 아들로 태어나 1503년(연산군 9)에 별시에 훗날 유교 교화서 간행을 주도하였으며 일생의 후견인이기도 한 김안국과 함께 급제한 뒤 첨지중추부사, 승문원제조 등을 거쳐 종2품 벼슬에 올랐고, 중국어 학습서, 번역서, 운서, 자전 관련한 저술을 편찬하였으며 1542년(중종 37) 75세에 생을 마감하였다. 최세진이 역관 출신으로는 통상 정3품 당하관까지만 승진할 수 있는 규정을 깨고 이례적으로 문과 별시에 응시하여 2등으로 합격하고 종2품의 동지중추부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탁월한 이문 실력과 출중한 중국어 회화 능력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일로 사대들은 그의 출신을 약점으로 삼아 음해하였으며, 최세진은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어 여러 차례 파직의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나 결국 이를 극복한 것도 그의 뛰어난 이문 실력과 명나라 외교에 빠질 수 없을 정도로 독보적인 중국어 실력 덕분이었다.

최세진의 학문은 중국어 회화와 한자음 및 한글 교육에서 두드러진 업적을 쌓았다. 우선, 최세진은 중국어 학습서인 『번역노걸대』, 『번역박통사』를 저술하고 이 두 책에서 어려운 어휘를 가려 뽑아 설명한 어휘집인 『노박집람』을 편찬함으로써 중국어 교육에 혁신을 이루었고, 한자를 자모순으로 배열하여 한글로 음을 달고 훈을 새긴 중국어 발음 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 운서 『사성통해』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최세진의 학문적 업적을 대표하는 것은 1527년(중종 22)에 어린이들을 위한 한자 학습서인 『훈몽자회』의 편찬이다. 『훈몽자회』는 기존의 『천자문』은 일상생활 한자와는 거리가 멀고 『유합』은 허자(虛字)가 많다는 결함을 보완하여 현실 사물과 관련 있는 실용 한자 3,360자를 천문, 지리, 수목, 신체 등 32부문으로 분류하고 개별 한자의 음과 훈을 한글로 달아놓음으로써 한자 학습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하였다. 즉, 최세진은 한글을 먼저 배우고 한자를 익히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하면서 한글 교육의 저변을 꾀하고자 하였으며, 특히 <범례> 부분에서 이전부터 내려온 한글 학습 내용을 정리하여 <언문자모>를 붙여 한글 자모의 용법과 목록을 적어 놓음으로써 한글의 보급에 큰 공헌을 하였다.

즉, 한글 자모의 초성, 중성, 종성에 쓰이는 글자를 구별하여 그 쓰임을 설명하였으며, 자모의 순서를 초성과 종성에 두루 쓰는 글자를 'ㄱ,ㄴ,ㄷ,ㄹ,ㅁ,ㅂ,ㅅ,ㆁ' 순으로 배열하고 초성에만 쓰는 글자를 'ㅋ,ㅌ,ㅍ,ㅈ,ㅊ,ㅿ,ㅇ,ㅎ' 순으로 배열하였으며 중성에만 쓰는 글자를 'ㅏ,ㅑ,ㅓ,ㅕ,ㅗ,ㅛ,ㅜ,ㅠ,ㅡ,ㅣ,·' 순으로 배열함으로써 오늘날과 거의 비슷한 한글 자모의 순서가 정해질 수 있었다. 또한 한글 자모의 양 옆에는 해당 자모의 음가를 설명해 주는 한자를 음을 취하여 'ㄱ其役, ㄴ尼隱, ㄷ池末, ㄹ梨乙, ㅁ眉音, ㅂ非邑, ㅅ時衣, ㆁ異凝, ㅋ箕, ㅌ治, ㅍ皮, ㅈ之, ㅊ齒, ㅿ而, ㅇ伊, ㅎ屎' 등으로 달아 놓았다. 이후 이러한 방식을 통한 한글 학습에서 최세진이 지은 자모의 음가 표시가 자모의 이름으로 굳어지게 됨으로써 오늘날 한글 자모의 순서와 명칭의 기원이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아는 한글 자모의 명칭인 '기역, 니은, 디귿, 리을, 미음, 비읍, 시옷, 이응, 지읒, 치읓, 키읔, 티읕, 피읖, 히읗'은 『훈몽자회』에 나타난 자모의 명칭을 한글로 적은 것에서 연유한다.

무엇보다 최세진은 『훈몽자회』 편찬으로 한글의 보급과 현대 맞춤법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으며, 한글을 쉽게 배울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여 실용화에 크게 기여한 인물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최세진은 중인 계급이었지만 뛰어난 실력으로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고, 어려운 여건에서도 자신의 뜻을 꿋꿋하게 펼친 당대 최고의 어문학자였으며, 출신의 편견을 극복한 시대의 승자였다.

/백낙천 배재대 국어국문한국어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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