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찾은 것은 국토였고, 언어였고, 제도였다. 그러나 진짜 자유는 어디까지 이뤄졌는가? 국가는 해방됐지만, 감정은 지금도 허락받아야 한다. '너와 나'로 갈라진 이념 때문이다. 우리는 참는 것이 성숙이라 여겼으며, 분노는 위험하다고 들었다. 감정은 자주 불편함의 원인으로 취급되고,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은 예민하거나 유난스럽다는 시선을 받는다. 감정을 드러내면 분위기를 해친다고 하고,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면 미성숙하다고 낙인찍는다.
사회는 감정을 말할 자유를 말하면서도, 어떤 감정은 사적인 것으로, 어떤 감정은 적절치 않은 것으로 분류한다. 표현해도 되는 감정과 표현해서는 안 되는 감정 사이의 경계가 존재하며, 그 경계를 넘는 순간 감정은 곧 비난의 대상이 된다. 문제는, 감정을 통제하는 주체가 더 이상 국가나 제도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서로를 감시하고 있다. 친구가, 가족이, 연인이, 동료가 "그 정도면 됐어", "여기서는 그런 말 하지 마"라고 말할 때, 감정은 타인의 '이념 잣대'기준 안에 눈치를 보게 된다.
조용히 웃고, 무던히 감정을 삼키는 이가 성숙으로 간주되는 사회, 감정을 통제하는 것이 사회성의 척도로 작동하는 구조, 바로 그곳에 감정의 검열이 있다. 감정의 검열은 비가시적 식민 상태다. 과거 식민 지배 시절, '조용히 하라', '질서를 지켜라'는 말은 국가에 의해 주어졌지만, 지금 우리는 스스로 그 말을 반복하고 있다. 감정을 숨기는 것은 더 이상 강요가 아니라 예의로 여겨지고, 감정을 흘리는 사람은 위험하거나 불편한 존재로 분류된다.
여성은 '울지 말라'는 훈육으로, 청소년은 '선생님에게 대들지 마'라는 복종 명령으로, 감정노동자는 '감정은 집에 두고 오라'는 지침으로 훈련되었다. 감정의 자유조차 계급화된 현실이다. 감정은 역사적으로 계급화된 언어였다. 그것이 '문명'이었다고, 버지니아 울프는 말했다. 그러나 감정 억압은 정치 국면에서도 반복된다. 권위주의 시절의 집회, 민주화 이후의 거리 시위, 그리고 최근 몇 년간의 항의 현장까지. 거리에는 언제나 분노한 사람들, 울부짖는 사람들, 침묵으로 저항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감정들조차 곧 정치적 판단의 도구로 쓰였다. 누군가는 감정이 과하다고 지적받았고, 누군가는 애도조차 공격받았다. 울면 과하고, 참으면 방관이며, 분노하면 위험했다. 감정을 말한 이들이 그 감정의 방식 때문에 다시 해명해야 했다. 찬반 이전에, 말할 수 있는 감정조차 제한된 것이다.
광복 80년이 된 지금도, 우리는 서로 다른 이념 때문에 감정 앞에서 여전히 허락을 구하며 살아간다. 해방된 국토에서 살고 있지만, 감정은 여전히 감시당하고 있다. 표현된 감정은 옳고 그름으로 평가되고, 감정조차 증명해야 할 무언가로 취급된다. 그러나 감정은 사회를 움직이는 본질이지, 제도 그 자체는 아니다. 그래서 감정 없는 사회적 선택은 지속될 수 없다. 우리는 감정을 감추지 말고, 감정에서 출발한 생각을 이어가야 한다. 감정은 단지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사회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 비추는 가장 빠른 징후이기 때문이다.
또한, 감정은 인간의 본질이다. 해방이 국경의 회복에 그쳤다면, 그것은 반쪽짜리다. 진짜 해방은 '느끼고, 말하고, 흐를 수 있는 감정'이 공공 영역에 복귀하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는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감정을 삼키고 있다. 광복은 끝났지만, 감정의 해방은 아직 오지 않았다. 따라서 진짜 광복은, 말할 수 있는 감정이 바탕을 이룰 때 가능한 것이다.
최정민/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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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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