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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대 대전성모병원이 11월 21일 개원 56주년 기념식을 갖고 장기근속과 모범 교직원에게 표창하고 있다. (사진=대전성모병원 제공) |
가톨릭대 대전성모병원(병원장 강전용 신부)이 21일 오후 5시 병원 9층 대강당 상지홀에서 '개원 56주년 기념식'을 진행했다. 이날 개원 기념식은 장기근속 교직원, 모범 교직원 및 부서, 협력업체 공로 표창, 기념사 순으로 진행됐다.
교직원 표창은 35·30·25·20·10년 장기근속 교직원 95명을 비롯 모범 교직원 4명, 협력업체 직원 등 총 100명에 대한 공로 표창과 포상이 이뤄졌다. 탁월한 봉사정신과 모범적인 자세로 귀감이 된 모범부서는 ▲정형외과 ▲간호부 ▲원목팀이 선정됐다.
강전용 병원장은 기념사를 통해 "1969년 대전지역 최초의 종합병원으로 개원한 이후 56년간의 모든 시간은 치유와 사랑의 역사를 써 내려온 소중한 기록"이라며 "앞으로도 우리 병원이 첨단 의료와 인간적인 사랑이 조화를 이루는 진정한 치유의 공간이 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 달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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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흥동본당백년사 |
한편, 천주교 대전교구 주교좌 대흥동 본당이 발간한 '대흥동 본당 백년사'에서는 대전성모병원의 시작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미군정이 끝나가던 시기 대전은 충남 지역 가톨릭공동체 전체는 중대한 변화를 맞았다. 1948년 5월 8일을 기해 충남이 서울대목구에서 분리되어 독립포교지(Mission)가 되고, 노기남 주교의 전임자로 서울대목구를 책임지던 라리보 주교가 그 책임자로 임명된 것이다. 1948년 8월 23일 대전지목구장서리 라리보 주교가 대전으로 내려와 대흥동성당에 착좌함으로써 대흥동성당이 주교좌성당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대전지목구는 성직자 총 19명(주교 1명, 프랑스 신부 15명, 한국인 신부 3명), 본당 13개, 신자 1만8000여 명으로 시작되었다. 중략…오기선(1907~1990) 신부는 대흥동과 선화동과 목동 일대의 부지를 물색하다, 일본 신사(神社)가 있던 지금의 대전성모여고 자리를 임차하기 위해 미군정과 교섭에 나섰다. 소위 적산토지였던 그곳은 총면적 4만3000㎡의 대지로 일본이 떠난 뒤 미군 장교들의 나이트클럽이 들어와 있었다. 이때 오 신부가 미군정 장관인 존 하지(John R, Hodge) 중장과의 면담을 통해 신사 부지의 임대차 계약을 정부와 체결한 것은 매우 절묘한 타이밍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채 2년이 되지 못해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타 종교·사회단체의 반대와 국가의 개입으로 토지 중 90%를 정부에 환원해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오기선 신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산 피난 기간 중에도 계속 소송을 진행해 결국 1951년 8월 모든 대전신사 대지와 건물 전체를 이전에 합법적으로 임대차 계약한 천주교 서울교구에 넘긴다는 판결을 받아냈다. 그리고 1954년 비로소 해당 부지의 등기이전이 모두 완료되었다. 이 자리에는 대전성모병원과 대전성모여자고등학교, 대전성모초등학교 등이 들어서 대전 지역 천주교 공동체의 의료와 교육 사업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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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성모병원의 모태가 된 1956년 개원 희망의원 김홍선 초대원장(가장 오른쪽)과 수녀의 모습. (사진=킴벨피부과병원 김윤성 원장 제공) |
대전성모병원은 1969년 11월 가톨릭중앙의료원과 자매결연을 맺고 병원으로 인가 받은 때를 공식 개원 시점으로 삼고 있으나, 대전성모병원은 이보다 앞서 대전교구와 지역사회가 한국전쟁 직후부터 스스로 가톨릭 의료사업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역사와 의미가 지금의 공식 기록보다 더 깊다. 한국전쟁 직후의 천주교 대전교구 직영 희망의원이 무료진료를 시작했고, 성모의원으로 이름을 바꾼 뒤 1969년 11월 대전성모병원을 거쳐, 1975년 9월 가톨릭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인가됐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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