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내일] 최만리와 '갑자상소문'

  • 오피니언
  • 오늘과내일

[오늘과내일] 최만리와 '갑자상소문'

백낙천 배재대 국어국문·한국어교육학과 교수

  • 승인 2025-12-28 15:54
  • 신문게재 2025-12-29 19면
  • 송익준 기자송익준 기자
백낙천천
백낙천 교수
세종의 한글 창제에 대척점에 있었던 인물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 최만리이다. 최만리는 1443년(세종 25) 음력 12월 한글이 창제되고 2개월이 지난 후인 1444년(세종 26) 음력 2월에 한글 창제를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 일은 한글 창제와 관련한 집현전 내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 줌과 동시에 사대부들의 한글에 대한 인식의 한계를 드러내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글 창제를 반대하는 상소는 최만리 등의 '갑자상소문' 단 한 차례뿐이었으며 세종은 성운학에 대한 학문적 자신감으로 이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1446년(세종 28) 음력 9월에 『훈민정음』(해례본)의 간행을 완성하고 이를 반포하였다.

최만리는 고려 시대 해동공자라 칭송받았던 최충의 12대손이고 『보한집』의 저자인 최자의 6대손으로 명문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1419년(세종 1)에 증광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후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서연관을 맡았고, 1439년(세종 21)에는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기도 하였지만 관직 생활 25년 대부분을 집현전에서 보냈을 정도로 집현전 학사로 평생 학문을 연구하다가 1445년(세종 27)에 세상을 떠났다. 최만리가 1444년 2월에 한글 창제를 반대하는 「갑자상소문」을 올릴 때에 직책은 집현전의 실무 책임을 맡은 부제학이었고, 성품이 대쪽 같이 강직하고 청렴하여 세종이 아낀 신하였으며 세종이 최만리에게 저택을 하사하기도 했는데 최만리의 이름자인 '리(理)'가 와전되어 남아 있는 지명이 현재 서울의 만리동(萬里洞)이고, 중구 만리동에서 마포구 공덕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만리재[萬里峴]이다.



최만리는 관직에 있을 때 세종의 불사(佛事)를 반대하고 세종이 건강상의 이유로 세자의 섭정을 시행하려 하자 이를 문제 삼는 등 총 14차례의 상소를 올렸는데, 그중에서 최만리의 마지막 상소가 한글 창제를 반대하는 '갑자상소문'이었다. 부제학 최만리는 1444년 2월 20일에 신석조, 김문, 정창손, 하위지, 송처검, 조근 등 7명이 연명한 한글 창제 반대 상소를 한글이 창제된 지 2개월이 지나서야 올렸다. 최만리 등은 한글 창제가 비밀리에 이루어져 공개적으로 반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때마침 세종이 집현전 교리 최항, 신숙주 등에게 『고금운회거요』를 한글로 번역하라고 명하자 이를 계기로 한글 창제 반대 상소를 올린 것이다. 즉, 최만리 등은 집현전에서 이미 만들어 놓은 『고금운회거요』를 한글로 번역하고 유포할 뿐만 아니라 이를 포상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이 일은 집현전 내에서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그 논쟁의 핵심은 최만리의 사대주의 이념에 집중되는 듯했지만 사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중국에 대한 사대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는 점을 가볍게 볼 일은 아니었다.

구체적으로 최만리가 한글 창제를 반대한 이유를 정리하면 첫째는 한글 창제는 중화(中華)의 제도를 준행하는 데에 역행하는 일이고, 둘째는 중국과 다른 글자를 쓰는 것은 몽골, 서하, 여진, 일본 등 오랑캐와 같은 무리들이나 쓰는 일이며, 셋째는 한글 창제는 설총의 이두와 같이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으며, 넷째는 학문(성리학)에 정진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다섯째는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것은 관리들이 공정하지 못한 탓이지 문자를 알고 쓰는 것과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한글 창제에 대한 이러한 반대 상소문에 대해 일일이 논리적으로 반박하였으며, 최만리에게 "그대가 운서를 아는가?", "만일 내가 이 운서를 바로 잡지 않으면 그 누가 장차 이를 바로 잡겠느냐?" 하는 부분에서는 세종의 성운학에 대한 학문적 자부심과 자신감을 보여 주었다. 한마디로 세종은 최만리에게 공부를 더하고 오라고 면박을 준 셈이다. 또한 세종은 최만리에게 답변할 때도 설총이 사용한 이두의 표기법에 대해서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갑자상소문'에 연명한 사람들은 의금부에 가두었다가 다음 날 석방하였지만 정창손은 파직하였으며 최만리는 사직하고 낙향하였다가 이듬해인 1445년(세종 27) 10월 23일에 작고하였다.

최만리를 중심으로 한 사대부 양반들이 한글 창제를 반대한 근본적인 이유 중에는 한자를 통해 지식과 권력을 독점한 양반의 특권이 붕괴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작용한 기득권의 저항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최만리의 한글 창제 반대 상소는 훗날 한글 창제 배경과 한글 연구에 귀한 역사적 자료를 남겨 주었으니 예상 밖의 결과가 빚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백낙천 배재대 국어국문·한국어교육학과 교수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건강]설명절 허리·다리 통증의 숨은 원인은?
  2. 줄지은 대전·충남 행정통합 반대 근조화환
  3. 대전 공유재산 임대료 경감, 올해도 이뤄지나... 60% 한도 2000만원서 3000만원 상향 검토
  4. 대전·충남통합 주민투표 놓고 여야 갈등 심화
  5. 이주 작업 한창 장대B구역 '빛이 머무는 순간' 헤리티지 북 발간
  1. 대전·충남 통합 변수...충청광역연합 미래는
  2. 충청권 상장기업, 시총 211조 원 돌파 쾌거
  3. 규모만 25조 원…대전·충남 통합 지자체 금고 경쟁구도 주목
  4. '왼손엔 준설 오른손에 보전' 갑천·미호강, 정비와 환경 균형은?
  5. 전남 나주서 ASF 발생, 방역 당국 긴급 대응

헤드라인 뉴스


대전시, 행정통합 주민투표 행안부에 요청

대전시, 행정통합 주민투표 행안부에 요청

대전시가 11일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에 대한 '주민투표'를 정부에 요구하고 나섰다.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이 만든 행정통합 특별법안에서 기존 대전시와 충남도가 논의해 국민의힘이 발의한 법안에 담긴 정부 권한·재정 이양이 대폭 사라지면서 행정통합의 실효성에 의구심이 든다며 시민의 의견을 묻겠다는 입장이다. 이장우 대전시장은 이날 오전 기자회견을 통해 "지방분권의 본질이 사라지고 정치 도구와 선거 전략으로 변질해 행정통합이 충분한 숙의 과정 없이 추진되고 있다"며 "번갯불에 콩 볶듯 진행하는 입법을 즉각 중단하고, (행정안전부는) 주민..

대전 재건축 바람 부나…  곳곳에서 사업 추진 본격화
대전 재건축 바람 부나… 곳곳에서 사업 추진 본격화

대전 노후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재건축 바람이 불고 있다. 사업시행계획 인가를 받으며 본격적인 추진 단계에 들어선 단지가 있는가 하면, 조합설립을 준비하는 대단지 아파트도 잇따르면서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있다. 11일 정비업계에 따르면 법동2구역 재건축정비사업조합은 6일 재건축사업 사업시행계획 인가를 받았다. 해당 사업은 대전 대덕구 법동 281번지 일원, 면적 2만 7325.5㎡ 규모에 공동주택과 부대복리시설을 조성한다. 이 사업은 기존 삼정하이츠타운 아파트 총 13동 468세대를 허물고, 총 6개 동 615세대를 짓는다. 사업장..

걷고 뛰는 명품 `동서 트레일`, 2026년 512km 완성
걷고 뛰는 명품 '동서 트레일', 2026년 512km 완성

걷고 뛸 수 있는 트레일(자연 탐방로)이 2026년 동서 구간으로 512km까지 확대·제공된다. 산림청(청장 김인호)과 한국등산·트레킹지원센터(이사장 서경덕)는 동서 트레일의 성공적인 안착과 체계적인 운영 관리를 위한 2026년 시범사업을 본격적으로 가동한다. 올해 사업 대상은 지난해 17개 구간(244km)에서 약 2배 이상 확대된 32개 구간에 걸친 총 512km. 신규 코스에는 충남 태안(2구간)과 서산(5구간), 홍성(10구간), 경북 봉화(47구간) 및 분천(51구간) 등이 포함됐다. 각 구간에 거점 안내소도 설치한다. 단..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대전·충남 행정통합에 대한 주민투표 시행 촉구 결의안 전달 대전·충남 행정통합에 대한 주민투표 시행 촉구 결의안 전달

  • ‘어려운 이웃을 위한 떡국 떡 나눠요’ ‘어려운 이웃을 위한 떡국 떡 나눠요’

  • 줄지은 대전·충남 행정통합 반대 근조화환 줄지은 대전·충남 행정통합 반대 근조화환

  • 대전·충남통합 주민투표 놓고 여야 갈등 심화 대전·충남통합 주민투표 놓고 여야 갈등 심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