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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낙천 교수 |
최만리는 고려 시대 해동공자라 칭송받았던 최충의 12대손이고 『보한집』의 저자인 최자의 6대손으로 명문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1419년(세종 1)에 증광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후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서연관을 맡았고, 1439년(세종 21)에는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기도 하였지만 관직 생활 25년 대부분을 집현전에서 보냈을 정도로 집현전 학사로 평생 학문을 연구하다가 1445년(세종 27)에 세상을 떠났다. 최만리가 1444년 2월에 한글 창제를 반대하는 「갑자상소문」을 올릴 때에 직책은 집현전의 실무 책임을 맡은 부제학이었고, 성품이 대쪽 같이 강직하고 청렴하여 세종이 아낀 신하였으며 세종이 최만리에게 저택을 하사하기도 했는데 최만리의 이름자인 '리(理)'가 와전되어 남아 있는 지명이 현재 서울의 만리동(萬里洞)이고, 중구 만리동에서 마포구 공덕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만리재[萬里峴]이다.
최만리는 관직에 있을 때 세종의 불사(佛事)를 반대하고 세종이 건강상의 이유로 세자의 섭정을 시행하려 하자 이를 문제 삼는 등 총 14차례의 상소를 올렸는데, 그중에서 최만리의 마지막 상소가 한글 창제를 반대하는 '갑자상소문'이었다. 부제학 최만리는 1444년 2월 20일에 신석조, 김문, 정창손, 하위지, 송처검, 조근 등 7명이 연명한 한글 창제 반대 상소를 한글이 창제된 지 2개월이 지나서야 올렸다. 최만리 등은 한글 창제가 비밀리에 이루어져 공개적으로 반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때마침 세종이 집현전 교리 최항, 신숙주 등에게 『고금운회거요』를 한글로 번역하라고 명하자 이를 계기로 한글 창제 반대 상소를 올린 것이다. 즉, 최만리 등은 집현전에서 이미 만들어 놓은 『고금운회거요』를 한글로 번역하고 유포할 뿐만 아니라 이를 포상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이 일은 집현전 내에서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그 논쟁의 핵심은 최만리의 사대주의 이념에 집중되는 듯했지만 사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중국에 대한 사대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는 점을 가볍게 볼 일은 아니었다.
구체적으로 최만리가 한글 창제를 반대한 이유를 정리하면 첫째는 한글 창제는 중화(中華)의 제도를 준행하는 데에 역행하는 일이고, 둘째는 중국과 다른 글자를 쓰는 것은 몽골, 서하, 여진, 일본 등 오랑캐와 같은 무리들이나 쓰는 일이며, 셋째는 한글 창제는 설총의 이두와 같이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으며, 넷째는 학문(성리학)에 정진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다섯째는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것은 관리들이 공정하지 못한 탓이지 문자를 알고 쓰는 것과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한글 창제에 대한 이러한 반대 상소문에 대해 일일이 논리적으로 반박하였으며, 최만리에게 "그대가 운서를 아는가?", "만일 내가 이 운서를 바로 잡지 않으면 그 누가 장차 이를 바로 잡겠느냐?" 하는 부분에서는 세종의 성운학에 대한 학문적 자부심과 자신감을 보여 주었다. 한마디로 세종은 최만리에게 공부를 더하고 오라고 면박을 준 셈이다. 또한 세종은 최만리에게 답변할 때도 설총이 사용한 이두의 표기법에 대해서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갑자상소문'에 연명한 사람들은 의금부에 가두었다가 다음 날 석방하였지만 정창손은 파직하였으며 최만리는 사직하고 낙향하였다가 이듬해인 1445년(세종 27) 10월 23일에 작고하였다.
최만리를 중심으로 한 사대부 양반들이 한글 창제를 반대한 근본적인 이유 중에는 한자를 통해 지식과 권력을 독점한 양반의 특권이 붕괴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작용한 기득권의 저항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최만리의 한글 창제 반대 상소는 훗날 한글 창제 배경과 한글 연구에 귀한 역사적 자료를 남겨 주었으니 예상 밖의 결과가 빚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백낙천 배재대 국어국문·한국어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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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익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