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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수승 시인·대전문인총연합회 회장 |
손도 마찬가지다. 전 세계 인구의 열에 아홉은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고, 밥을 먹고, 악수를 청한다고 한다. 이것이 그저 우연인지, 아니면 오랜 시간 문명이 선택하고 강제해온 결과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사는 세계가 오른손을 기준으로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가위의 날이 그렇다. 컴퓨터 마우스도 그렇다. 글자가 흘러가는 방향도 그렇다. 왼손잡이는 현실적으로 다소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 불편함을 대부분 말하지 않는다. 말해도 세상은 잘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왼쪽을 뜻하는 라틴어 'sinister'는 지금도 '불길하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방향이 의미가 된 예다. 영어의 'right'가 '오른쪽'의 의미와 '옳다'는 의미가 있다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한국어도 예외가 아니다. '오른손'이 '옳은 손'이 어원이었다는 것이 오랫동안 변함없이 전해진다. 몸의 방향이 도덕의 방향이 된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오른쪽은 표준이 되었다. 표준은 규범이 되었다. 규범은 어느새 상식적이고 보편성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몸의 쓰임새가 어느 때부터인지 세상의 당연한 규범처럼 되어버렸다는 것이 몹시 걸린다. 그 논리가 생각보다 자주 우리 곁에 나타난다. 중심이 있으니 주변이 있어야 한다는 것과 주도하는 자가 있으니 따르는 자가 있어야 한다는 논리 말이다. 또한 그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겨지는 풍조 말이다. 그러나 신체의 편측성은 우열을 선언한 것이 아니다. 몸은 처음부터 그렇게 합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른손이 펜을 쥐고 글씨를 쓸 때, 왼손은 종이를 누른다. 오른손이 망치를 들면, 왼손은 못이 흔들리지 않도록 잡아준다. 생각해보면 왼손이 하는 일은 늘 오른손이 하는 일을 돕는 일이다. 왼손은 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왼손은 오른 손이 일할 수 있도록 잡고 있는 것이다. 그 역할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덜 중요한 것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왼손이 없다면 오른손이 쥔 것들은 이내 의미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 이름 없이 도와 온 손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주시도 다시 생각해보면, 그것이 항상 더 예리한 눈은 아니다. 상황에 따라 보조안이 더 섬세하게 반응하기도 한다. 주도한다는 것이 더 잘 본다는 뜻이 아닌, 단지 오른눈잡이라는 것이다. 먼저 주도하는 눈일 뿐이다. 문제는 주시안 만으로 세상을 볼 때 생긴다. 한쪽 눈을 감고 사물을 바라보라. 깊이가 사라진다. 입체가 평면이 된다. 거리가 무너진다. 가까운 것과 먼 것의 간격을 우리는 두 눈이 만드는 미세한 시차(視差)로 감지한다고 한다. 주시안 혼자서는 그 입체를 복원할 수 없다. 한쪽 눈을 감고 손을 뻗어보면 알 수 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가까운 것을 멀다 하고, 먼 것을 가깝다 착각할 수 있다.
한쪽으로 기울어야 비로소 전신의 중심이 잡힌다. 한쪽이 나서야 다른 쪽이 받칠 수 있다. 그 둘의 관계를 지배와 복종으로 읽을 것인가, 아니면 역할과 협력으로 읽을 것인가. 우리 몸은 명쾌하게 그 답을 준다. 양 손은 각기 역할을 알고 자신의 일을 충실히 이행한다. 말보다 먼저 늘 그래왔다.
오늘도 나는 오른손으로 글을 쓴다. 그리고 왼손이 백지를 조용히 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노수승 시인·대전문인총연합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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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화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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