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하추동] 일상의 쉼표, '자기 발소리 듣기'

  • 오피니언
  • 춘하추동

[춘하추동] 일상의 쉼표, '자기 발소리 듣기'

김충일 북-칼럼니스트

  • 승인 2026-06-23 18:03
  • 수정 2026-06-23 18:12
  • 신문게재 2026-06-24 18면
  • 임병안 기자임병안 기자
김충일 북칼럼니스트
김충일 북-칼럼니스트
창문에 반사되면서 옅어지는 먼동의 잔잔한 빛이 새벽을 깨운다. 늘 그랬듯이 춘추자(春秋者)는 일찍 깨어나 일터로 나서는 아파트의 굳고 단단한 기계소리와 어깨를 툭 치며 격려하는 상큼한 바람 냄새를 맡는다. 그리고 나선 보행하는 발의 굳은살을 유화시켜 주는 중촌 근린공원의 인공 황톳길을 밟아가며 강변 계단을 내려선다. 멀리서 다가오는 도시의 빌딩과 수침교 교각 밑을 지나며 맞는 아침은 맑고 투명하면서도 짙고 어두운 그림자를 품은 채 자신만의 빛을 찾으려 꿈틀대기 시작한다.

초여름의 버드내(柳等川)는 달밤 블루 색 구름을 뚫고 쏟아내던 별빛 소리, 쉼 없이 흐르는 맑은 물소리, 부지런히 몸을 맡기며 낮은 비행을 하는 하얀 새 소리, 지난밤의 열을 식히며 물 위를 스치는 바람 소리, 잠들지 않는 삶의 흔적을 품고 도시의 얼굴이 되어 계룡육교를 오르는 자동차 소리. 갖가지 몸놀림으로 닫힌 몸을 여는 보행자들의 숨소리와 발소리가 서로 간의 경계를 포옹하며 흐른다.

새벽 산책길. 일상의 세계가 빚어내는 갖가지 풍경 소리에 뒤섞여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좋은 소리'는 어떤 것일지 궁금해진다. 천변을 걸으며 만나는 입체적 빛깔의 자연의 시청각 소리일까, 열어 놓은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옆 라인 학생의 쾌청한 책 읽는 소리일까. 분주한 일상사의 조급함을 부추기는 핸드폰의 컬러링(coloring)일까. 이항복(李恒福) 대감의 유머처럼 '아름다운 여인네의 치마 벗는 소리'일까. 아님 기다리던 소식을 가져오는 사람의 기척이나 낯선 길에서 길을 잃었을 때 들려오는 사람의 발소리일까.

삼천교 쪽 대리석 징검다리를 건너 흙 잔디밭을 밟는데 문득, "아! 이렇듯 반복되는 소리 속에서 정작 내 발소리는 듣지 못했구나. 오늘이 '내 발소리를 찾은 날'이구나."라는 생각에 미친다. 보행의 숨소리를 죽이면서 다리 아래 운동 기구 의자에 앉아 흐르는 물소리에 귀 기울인다. "길을 걸으며 내 발소리를 가만가만 따르다 보니 다른 소리들은 사라지고 내 발소리가 점점 내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와 내 안의 소리가 된다"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구나, 축하해!

내 발소리를 들은 일은 '내가 여기 있었고, 다시 여기 있고, 조금 달라진 내가 여기 있을 것'이라는 중첩. 그 관계가 이루는 어떤 서늘하고도 소소한 긴장을 일으킨다. 그렇게 바쁘게 흘러가는 일상에서 '나(Self)'와 만나게 만드는, 즉 외부 세계를 향해 있던 시선과 청각이 온전히 나의 내부로 향하는 순간이다. 늘 내 몸이 내던 소리임에도 '우연히' 들렸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익숙했던 일상이 깨어지는 너무 당연해서 인식하지 못했던 나의 일부를 문득 낯설게 바라봄이다, 그리하여 매일 반복되는 평범한 삶을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새롭게 깨우친 힘으로 나타나 보이게 되는 것이다.

시끄러운 세상 속에서 타인의 소리에 묻혀 살아가다가 자신의 발소리에 집중하는 것은, '내가 지금 어디에 발을 딛고 서 있는지'를 자각하는 행위이다. 역설적으로 타자의 발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나에게 다가오는 다른 사람의 고통이나 존재를 받아들이고, 그와 관계를 맺으며 공감하며 타자의 존재를 인지한다는 포용이자 연대이기도 하다. '나'의 목소리를 객관적으로 듣는다는 것. 그것은 내가 타인의 위치에서 '나'를 관찰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실체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내면의 주관성을 넘어 사회적 관계 속의 객관적인 자아를 성찰하는 과정을 온전히 수용하는 적극적 삶의 자세이기도 하다.

혹시 오늘 걸었던 산책길에서 들린 발소리는 어떤 리듬이나 무게감을 가지고 있었나요? 그 발소리를 들었을 때 마음에 떠오른 구체적인 생각이나 감정이 무엇인지 들려주시면서, 자신과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일상의 쉼표, '자기 발소리 듣기'. 오롯이 자신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산책을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요? /김충일 북-칼럼니스트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세종시, '영화·드라마' 촬영 명소로 간다
  2. 아산시 어의정로 교차점 광장 준공
  3. [대전 전통산업 특화거리의 새로운 미래를 그리다] ①대전 전통산업과 특화거리의 탄생과 번영…그리고 존폐의 기로
  4. 두 자녀 태우고 만취운전 30대 사고까지…여름철 엄격 단속 필요
  5. K리그 휴식기, 대전 서포터즈는 '청소' 중?… "승리의 기운을 줍습니다"
  1. 창업기업 74곳에 최대 4억원 '대전 창업기업 들썩'
  2. 폐현수막의 변신은 ‘무죄’
  3. 우송대 응급구조학과 학생들, ‘실무능력 UP’
  4. 천문연구원, 희귀 왜소신성 발견…공전주기 짧아 중요 연구대상
  5. 대전 보건소 인력부족에 '허덕'…전국 광역시 중 가장 적어 보건의료 '빨간불'

헤드라인 뉴스


삼전닉스 호남 투자 가시화…충청은 생색내기용 전락

삼전닉스 호남 투자 가시화…충청은 생색내기용 전락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광주·전남에 수백조원에 달하는 반도체 생산기지 구축에 나설 것이 유력해지면서 충청권은 곁다리 투자에 그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충청권의 경우 두 기업이 막대한 고용창출 등이 기대되는 대규모 생산 라인이 아닌 AI데이터센터 건립으로 기우는 모양새인데 이럴 경우 지역 경제 파급 효과가 미미하기 때문이다. 코스피 시총 투톱으로 글로벌 메모리 업체인 두 기업이 이재명 정부의 강력한 지역균형 발전 정책에 부응하려면 충청권에도 생색내기 용이 아닌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23일 정치권과..

"대전 도시철도 2호선 트램 개통 2030년 하반기로 늦어진다"
"대전 도시철도 2호선 트램 개통 2030년 하반기로 늦어진다"

대전도시철도 2호선 트램 개통이 2030년 하반기로 지연된다고 대전시가 공식 인정했다. 당초 2028년 개통보다 2년여가 더 늦어지는 것으로, 주요 공정 리스크와 차량 시운전 계획 반영 등을 이유로 꼽았다. 유득원 대전시 행정부시장은 23일 대전시청 기자회견장에서 도시철도 2호선 트램 관련 브리핑을 갖고 "향후 통합공정 계획 수립을 통해 개통 일정 등을 최종 확정할 것"이라면서 개통 지연을 공식화 했다. 도시철도 2호선 트램은 총연장 38.8㎞, 정거장 45곳, 차량기지 1곳 규모로, 2024년 12월 착공해 현재 본선 14개 전..

[대전 전통산업 특화거리의 새로운 미래를 그리다] ② ‘생산성을 넘어 브랜딩을 창출하라’
[대전 전통산업 특화거리의 새로운 미래를 그리다] ② ‘생산성을 넘어 브랜딩을 창출하라’

대전 중구 중촌동 맞춤패션거리와 정동 인쇄거리, 원동 한복거리 등 과거 대전을 상징하던 유서 깊은 산업 자산들이 중대한 변곡점을 맞이하고 있다. 자구책 마련을 위해 붙여진 특화거리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급격한 산업 구조 변화와 유통 시스템 현대화 속에서 경쟁력을 잃어간 채 존폐의 기로에 서면서다. '생산의 효율화'란 거대한 산업 발전 흐름이 오늘날 현대 사회의 모든 가치를 장악하고 있지만, 지역의 고유한 숨결과 정체성이 담긴 전통산업의 흔적이 미래세대에 적절히 계승돼야 마땅하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낡은 산업의 미래를 새..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문창동 화재피해 복구 돕는 손길 문창동 화재피해 복구 돕는 손길

  • ‘대한민국을 응원합니다’…월드컵 응원 고조 ‘대한민국을 응원합니다’…월드컵 응원 고조

  • 폐현수막의 변신은 ‘무죄’ 폐현수막의 변신은 ‘무죄’

  • 우송대 응급구조학과 학생들, ‘실무능력 UP’ 우송대 응급구조학과 학생들, ‘실무능력 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