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속으로]나는 '할머니'다

  • 오피니언
  • 세상속으로

[세상속으로]나는 '할머니'다

김명주 충남대 교수

  • 승인 2019-05-20 14:03
  • 신문게재 2019-05-21 22면
  • 이상문 기자이상문 기자
김명주-충남대-교수
김명주 충남대 교수
해마다 얼굴은 축 처지고 어깨는 구부정, 허리는 두둑해진다. 날마다 조금씩 '할머니'가 되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문득 '할머니'로 호명된다면 누구라도 필시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왜 그럴까? 오랫동안 여성은 신체적 젊음과 매력으로만 평가받아왔다. 그래서 할머니로 호명됨은 단순히 특정 연령대 여성에 대한 호칭이 아니라, 매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역겹고 무능한 존재로 낙인찍히는 것이나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의 활발한 확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성은 지혜, 실력, 경륜보다, 외모로 평가받는다. 주요 TV 앵커들을 가만히 둘러보자. 어딜 봐도 메인 앵커는 나이 지긋한 중년 남성이고, 그 옆에 앉은 여성 앵커들은 어딜 봐도 앳된 젊은이들이다. 남자는 늙어서도 앵커로 남아있는데, 늙은 여자 앵커는 왜 없는 것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남성은 실력으로 평가받고, 여성은 여전히 외모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남자는 실력이 출중하면 늙었어도 앵커가 될 수 있지만, 여자는 제아무리 실력이 탁월해도 늙으면 끝장이다. 마치 여성의 늙음은 그 자체가 용서받을 수 없는 무능인 것처럼.



비행기 승무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외국 비행기에서는 늙수레한 여승무원의 서비스를 받은 경우는 흔하다. 반면, 한국 비행기의 경우, 승무원은 언제나 아리따운 젊은 여성들이다. 승무원의 임무는 승객의 안전과 편의서비스인데 굳이 아리따워야할 이유가 없다. 서비스로 친다면 늙은 승무원이 더욱 노련할 수도 있을 텐데, 늙은 여승무원은 없다. 마치 젊음과 미모 자체가 편의이고 서비스인양.

사회의 주도적 권력을 남성이 쥐고 있으니, 남성권력이 선호하는 싱싱하고 매력적인 외모를 지닌 젊은 여성들만이 앵커, 승무원으로 채용되는 것이다. 가부장제는 늙은 여성을 혐오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늙은 여성이 이렇게 푸대접 받고 무시당했던 것은 아니다. 우리네 오랜 설화 전통에서 '할머니' 혹은 '할미'는 본래 '여신'을 의미했다. 우주를 창조한 마고할미, 설문대 할망도 있고, 아기를 낳게 도와주는 삼신할미도 있다. 물론 '할미'라는 말은 물론 신체적으로 늙은 여자라는 뜻은 아니다. '할머니'의 진짜 의미인즉, '위대한 어머니'('크다'란 뜻의 '한'과 '어머니'가 합친 '대모')란 뜻이다. 그래서 젊은 여신도 '할미'라 부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할미여신들을 젊은 여성으로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오래전 공동체의 권위는 인류 생존을 위한 지혜를 구두로 전수하는 노인에게 주어졌을 것이다. 특히 노인 중에서도 생명의 신비를 체현하는 노인여성에게 공동체 최고의 권위가 주어졌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신성성이 부여되었다면, 그것은 분명 할머니였으리라.

하지만 세월이 변했다. 공동체의 권위는 지혜와 경륜을 지닌 자가 아니라, 물리적 힘을 지닌 자가 독점하게 되었다. 물리적 힘이 상대적으로 약한 할머니들의 권위는 시나브로 실추되었을 것이다. 가뜩이나 지식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새로운 신기술이 일상을 지배하는 요즘 같은 시대엔, 기계에 서툰 할머니는 영락없이 무능의 표본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삶은 기술적응력만이 전부는 아니다. 젊음만이 아름다운 것도 아니다. 얼마 전 여고동창회가 열렸다. 3초만 지나면 여고시절 풋풋한 옛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84명의 환한 얼굴들은 모두 "눈부시게" 아름다운 꽃들이었다.

어느 날 문득, 할머니가 될 때까지 살아있는 모든 여성이 위대해보이기 시작했다. 제2의 성으로서 받아온 구박과 고통 속에서도 죽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남은 할머니들은 누구나 위대해보였다. 보봐르의 말대로 할머니는 '제 3의 성'이다. 여성의 노년은 생리적 임무를 다하고, 비로소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시기다. 당당하게 말하자. "나는 할머니다!"
김명주 충남대 교수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의정부시, 시민 김지민 씨 저소득층에 성금 100만 원 전달
  2. 김해시, 2026년 노인일자리 7275명 확대 모집
  3. 대전을지대병원, 바른성장지원사업 연말 보고회 개최
  4. 대전상의, 청양지회-홍성세무서장 소통 간담회 진행
  5. 한국영상대 학생 주도 영화 '우리의 이름' 26일 전국 개봉
  1. 세종시 장애인체육회 '보치아·펜싱' 선수단...국내외 무대 호령
  2.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행복한 시간
  3. 공공사업 낙찰 규모 계룡건설산업 연말에 1위 탈환할까
  4. 이장우 시장 맞은 충남대병원, "암환자 지역완결형 현대화병원 필요" 건의
  5. 노사발전재단 충청중장년내일센터, '대전 기업 밋업데이' 개최

헤드라인 뉴스


`K-스틸법` 국회 본회의 통과… 대한민국 철강산업 재도약 발판

'K-스틸법' 국회 본회의 통과… 대한민국 철강산업 재도약 발판

침체를 겪는 대한민국 철강산업의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이른바, ‘K-스틸법’이 27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국가 경제의 탄탄한 동력을 확보하게 됐다. 충청 의원들이 대표 발의한 여러 민생법안들도 국회 문턱을 넘었으며, 여야 갈등의 정점인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 체포동의안도 국회 가결됐다. 국회는 이날 오후 본회의장에서 여야 합의로 상정된 ‘철강산업 경쟁력 강화 및 탄소중립 전환을 위한 특별법안’(K-스틸법)에 대한 표결을 진행한 결과, 재석 의원 255명 중 찬성 245명, 반대 5명, 기권 5명으로 가결했다고 밝혔다. K-스틸..

대전의 자연·휴양 인프라 확장, 일상의 지도를 바꾼다
대전의 자연·휴양 인프라 확장, 일상의 지도를 바꾼다

대전 곳곳에서 진행 중인 환경·휴양 인프라 사업은 단순히 시설 하나가 늘어나는 변화가 아니라, 시민이 도시를 사용하는 방식 전체를 바꿔놓기 시작했다. 조성이 완료된 곳은 이미 동선과 생활 패턴을 바꿔놓고 있고, 앞으로 조성이 진행될 곳은 어떻게 달라질지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을 변화시키는 단계에 있다. 도시 전체가 여러 지점에서 동시에 재편되고 있는 셈이다. 갑천호수공원 개장은 그 변화를 가장 먼저 체감할 수 있는 사례다. 기존에는 갑천을 따라 걷는 단순한 산책이 대부분이었다면, 공원 개장 이후에는 시민들이 한 번쯤 들어가 보고 머무..

‘줄어드는 적십자회비’… 시도지사협의회 모금 동참 호소
‘줄어드는 적십자회비’… 시도지사협의회 모금 동참 호소

연말연시 어려운 이웃에게 온정을 나누기 위한 적십자회비가 매년 감소하자, 대한민국시도지사협의회(회장 유정복 인천시장)가 27일 2026년 대국민 모금 동참 공동담화문을 발표했다. 국내외 재난 구호와 취약계층 지원, 긴급 지원 등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 대한 인도주의적 활동에 사용하는 적십자회비는 최근 2022년 427억원에서 2023년 418억원, 2024년 406억원으로 줄었다. 올해도 현재까지 406억원 모금에 그쳤다. 협의회는 공동담화문을 통해 “최근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적십자회비 모금 참여가 감소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구세군 자선냄비 모금 채비 ‘완료’ 구세군 자선냄비 모금 채비 ‘완료’

  • 가을비와 바람에 떨어진 낙엽 가을비와 바람에 떨어진 낙엽

  •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행복한 시간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행복한 시간

  • 대전시의회 방문한 호치민시 인민회의 대표단 대전시의회 방문한 호치민시 인민회의 대표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