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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예산제일교회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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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대한감리회 예산제일교회가 일제강점기 충남 예산지역 독립·민족운동의 산실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원문사료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80년 만에 찾아낸 것을 한국공영방송(KBS, 2022년 2월 28일 방영)에 의해 세상에 드러나면서 예산지역 독립운동사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움직여지고 있다.
예산지역 독립운동의 발원지가 예산제일교회에서 시작됐다는 점에서 지난 28일 협성대학교 서영석 교수와 감리교 신학대학 소요한 교수가 '예산지역 민족운동과 예산제일교회'라는 대 주제로 연구한 연구발표회를 이 교회 예루살렘성전에서 가졌다.
이날 연구발표회에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충청연회 김성선 감독과 박구연 원로목사, 현 장준태 담임목사, 최재구 예산군수를 비롯한 지역 기관단체장, 군민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주제 발표에 나선 소요한 교수는 "예산제일교회는 예산지역 민족운동의 산실로서 그 역할이 두드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연구가 되지 않거나 가려져 있었던 것이 한국교회사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매우 안타깝다"며"이번 연구를 통해 '예산제일교회가 왜, 예산지역 민족운동의 구심점이 됐으며, 어떻게 민족운동을 진행했는가'에 초점을 맞춰 예산제일교회 제1대 이용주 목사부터 제10대 안성호 목사까지 연구했다"고 밝혔다.
소 교수는 "예산제일교회가 자체적으로 조사한 독립운동의 흔적은 있었어도 명확하게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일제 강점기 이전까지 교회를 담임했던 예산제일교회 15명의 목회자들 중 상당수가 민족의 독립운동을 주도했다"고 보고 있다.
특히 이들 중 한태유(3대), 김병제(4대), 최성모(5대), 안성호(7,10대) 이명제(8대), 조종범(9대) 담임목사는 3.1 독립운동 시기에 대부분 선봉에 서서 예산지역 독립운동의 중심축을 이뤘다는 것.
또 "3.1 독립운동의 예산지역 최초 봉기는 3월 3일 예산 읍내에서 전개됐는데, 이 때 예산제일교회 제8대 이명제 담임목사가 이 운동에 참여한 흔적이 발견됐다. 이 목사는 상해 임시정부 경성 조선독립운동 지부와 연결돼 예산지역의 독립운동 전달책을 맡아 선전책임자로 활약했다"고 말했다.
그는 연구 과정에서 당시 조선총독부에 의해 1919년 3월 22일 작성된 '3.1운동 계보도'에 주목했다. 2개월여의 추적 끝에 일본 고서점에서 발견된 자료다. 이 계보도에 예산제일교회 제4대 김병제 담임목사가 들어 있었다. 1926년~1929년까지 그의 행적에는 평범한 목회자 이외에는 독립운동과 연관된 연구가 없을뿐더러 자료도 없었지만, KBS 보도에 의해 충남 홍성, 해미, 예산지역의 3.1 독립운동 책임자로 지목된 사실을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예산제일교회 제4대 김병제 목사와 제8대 이명제 목사의 행적에서 충남 독립운동의 한 중심축에 기독교예배당을 중심으로 그 운동이 확산됐음을 찾아냈다. 그중에서도 7대(1933~1934)와 10대(1937~1939) 담임목사를 역임한 안성호 목사는 누구보다 독립운동의 사상을 확실하게 전파했다는 것이다.
그는 "'기미독립선언서'의 의미가 대중과 어린 학생들에게 전달됐을까 의심하는 학자도 있고, 혹자는 서울의 발원에 의미를 두고 있지만, '묵묵히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면서 희생하는 이들이 있었기에 고린도전서 13장 12절의 '거울로 보는 것 같은 희미함'이 아닌, 얼굴과 얼굴을 대해 보는 자주 독립운동의 연원(淵源)이 서울 수도가 아닌 충남 지역의 이곳에서 자주적으로 펼쳐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소 교수는 예산제일교회 제3대 한태유 목사(1920~1926) 때 예산제일교회 청년과 예산농업학교 청년회와 깊은 인연을 맺어간 것으로 보고 있다. 1921년 10월 21일자 동아일보 기록에 의하면 '예산청년회'가 조직돼 1922년에 한태유 목사가 회장을 맡으면서 민족운동의 상징인 '민립대학' 예산지역 발기인으로 의장을 맡아 민립대학 추진에 매진했다는 것이다.
당시 민립대학은 3.1독립운동 이후 가장 큰 민족운동이라는 점에서 일제의 훼방으로 결실을 맺지 못하고 좌절됐지만, 이후 제4대 김병제 담임목사(1926~1929)와 제5대 최성모 담임목사(1929~1930) 재직 시기에 성진호라는 청년이 예산제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문예광'이라는 잡지를 발행한다.
좌우 이념을 표방하지 않았던 '문예광'이 일제의 주목을 받으면서 결국 그를 죽음으로까지 몰아넣었던 것은 최성모 목사가 주장했던 '자유, 평등, 사랑'의 독립운동 정신을 시(詩)로써 민족이 나아갈 방향을 표현했던 것이다.
성진호 청년의 문예광은 결국 전국적으로 학생결사 운동으로 번져 예산지역에서도 1939년 6월 예산제일교회 제12대 김희운 담임목사(당시 전도사)를 중심으로 윤영원, 최경용, 이민구 등과 함께 9명의 비밀결사조직인 예농(예산)속회'가 결성된다.
이들은 ▲조선민족정신을 잊지 말 것 ▲조선어를 연구, 사용할 것 ▲조선민족의 단결을 굳게 할 것 ▲비밀을 엄수하고 동지를 많이 모을 것 ▲조선민족의 행복을 도모하기 위해 민족의식을 앙양할 것 등의 5개 강령을 구두로 약속했다.
예농속회는 결성 3년 후인 1942년, 조직원 운영원이 예산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수원군농회(지금이 농협)에 근무할 때 일본 경찰의 불신검문에서 검거돼, 일본 총독부의 내선일체(內鮮一 體, 1937년 일제가 전쟁협력 강요를 위해 취한 조선통치정책) 방침에 반대한 것을 비롯해 불온한 청년가와 국가를 작곡한 사실 등이 드러나는 등 9명의 비밀결사대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검거되기 시작하면서 결국 와해되기 시작했다.
소요한 교수는 "일제 강점기 때는 교회들이 존재하기조차 힘들었을 텐데 예산제일교회는 목회자들의 민족을 위한 몸부림이 우리에게 많은 감동을 선사해주고 있다"며 "이들에게 독립유공자로 추서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은 현재 예산제일교회의 과제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공동연구자인 협성대학교 서영석 교수는 1927년 2월 사회주의, 민족주의 세력들이 결집해 창립한 항일단체인 '신간회(新幹會)에 주목했다. 전국은 물론 해외지부까지 두고 있는 3~4만명에 달하는 거대 조직인 신간회는 민족공동전선을 추구하는 사회주의계열 연합 단체다.
예산에도 1927년 11월 '자유와 평화, 인권'의 기독교 이념을 앞세워 항일운동에 불을 지피면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는 기폭제가 됐다고 설명했다.
예산제일교회 제25대 담임목사인 장준태 목사는 "우리 교회의 선배들 가운데서 민족운동을 했다는 분들이 늦게나마 기록을 통해 세상에 밝혀졌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데, 우리 교회가 독립운동의 산실이 됐다는 것은 예산군민들의 자긍심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예산=신언기 기자 sek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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