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가 필요한 곳에 병원을'…박영하 을지재단 설립자 10주기 추모

  • 사회/교육
  • 건강/의료

'환자가 필요한 곳에 병원을'…박영하 을지재단 설립자 10주기 추모

6·25때 의용군 의사로서 참전 부상병 지킨 6년
강남 대신 대전 선택해 종합병원·의과대 설립
1967년 병원을 공익법인 전환해 의료공익화
사재 출연해 둔산에 의과대부속병원 건립도
타계 10주 맞아 7일 대전현충원서 추모식 거행

  • 승인 2023-05-07 18:04
  • 수정 2023-05-07 21:17
  • 신문게재 2023-05-08 10면
  • 임병안 기자임병안 기자
박영하 설립자 동상_edited
을지재단 박준영 회장을 포함한 관계자들이 5월 2일 대전을지대병원에 마련된 소천 박영하 박사의 참의인상 앞에서 그의 뜻을 추모하고 있다.  (사진=을지재단 제공)
을지재단을 설립한 범석 박영하(1927~2013) 박사 타계한 지 10주기를 맞았다. 그는 한국전쟁을 맞아 '피란' 대신 육군병원에 스스로 찾아가 최전방 부상병을 돌본 의사, 자원입대해 1956년 7월 중령으로 예편할 때까지 6년간 야전병원을 지킨 군의관이었다. 이때부터 환자가 필요한 곳에서 의술(醫術)을 실현했다. 1981년 대전 목동에 대형종합병원을 건립하고 같은 자리에 의과대학을 출범시켰으며, 2001년 금산을지병원 그리고 2004년 대전 둔산 을지대학교병원 개원까지 대전 의료지방화 시대를 예견한 박영하의 뚝심이 아니었다면 이룰 수 없는 성과였다. 국립대전현충원 사회공헌자묘역에 영면한 박영하 박사의 생애를 돌아본다. <편집자주>

군의관 박영햐-간호장교 전증희
6.25전쟁 때 대전 제2육군병원에서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은 군의관 박영하 설립자와 간호장교 전증희 을지재단 명예회장.
▲야전병원 지킨 민간인 의사

서울대병원 산부인과학 교실의 의사로서 정식 근무를 시작한 을지재단 설립자 박영하 박사는 그해 한국전쟁을 맞아 남쪽으로 피란 대신 의료장비와 약품을 챙겨 부상병과 피란민 치료를 시작했다. 전쟁 발발 다음날인 1950년 6월 26일 서울대 의과대학생들의 의용군이 조직됐다. 박영하 박사는 의용군 일원으로서 이병윤과 함께 수원에 주둔하던 수도육군병원을 찾아가 부상병들을 돌봤고, 총에 맞았거나 폭탄의 파편으로 부상 입은 우리 국군에게 응급수술을 하고 어느 정도 상태가 안정되면 더 큰 병원으로 후송했다. 남침에 밀려 야전병원이 급히 후퇴할 때도 박영하는 대전까지 내려와 제2육군병원에서 부상병을 계속 살폈다. 그는 현역 군인도 아니었고 서울대 의과대학을 갓 졸업한 신참 의사이었다. 의용군을 조직해 전선에 뛰어든 것이며 전쟁터에서 부상병 치료를 도와 대전까지 내려온 것은 박영하를 비롯한 이들이 유일했다. 참전하지 않았던 동료 의사들은 민간병원에서 공부를 계속할 때 군인도 아닌 신분에서 또다시 남하하는 전선을 따라 부산 기장의 야전병원을 지켰다. 그는 자발적으로 군에 들어와 봉사하는 민간인 의사를 군의관으로 임관하는 제도에 응시해 중위 계급장을 부여받고 군의관으로 임관해 본격적으로 복무를 시작해 1956년 7월 중령으로 예편할 때까지 대전 63육군병원 외과부장, 속초 제1외병원에서 근무했다. 평양을 수복하는 작전 중에 부상병을 치료하기 위한 평양 제27육군병원 창설 요원으로 위험을 감수하고 합류했고, 중공군의 개입으로 이른바 1·4후퇴 때 기간병과 간호 장교들을 인솔해 성공적으로 남하했다. 박영하 박사와 부부의 연을 맺은 을지재단 전증희 명예회장도 서구식 간호교육을 받아 1950년 한국전쟁에 참전한 간호장교로서 선구자이며, 초임지 대전 제2육군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해 강릉 59육군병원 간호부장 때 휴전을 맞아 대위로 예편했다.

박준영(산부인과 전문의) 을지재단 회장은 "박영하 설립자께서는 해방과 함께 맨몸으로 월남하여 서울대학교에서 고학하던 중, 나라의 위기를 외면치 않고 자원입대로 참전하고, 휴전 후에도 바로 제대하여 개원하지 않고 3년간을 더 군의관으로 복무하셨다"라고 회상했다.

IMG_1438
7일 오전 8시 국립대전현충원 사회공헌자 묘역에서 박영하 설립자 소천 10주기 추모식이 개최돼 을지재단 임직원들이 참배했다.   (사진=임병안 기자)
▲개인병원을 공익재단에 헌사

군의관 임관 6년 만에 사회로 돌아온 박영하 박사는 서울대 의과대학 산부인과교실로 복귀했고, 1959년 11월 서울 중구 을지로에 '박영하 산부인과'를 개원했다. 일본식과 한옥을 겸한 주택을 개조한 병원이었는데 2층에는 온돌방으로 된 5개의 입원실을 두고 1층은 외래와 진료실 그리고 몇 걸음 떨어진 곳에 가족들의 거주공간을 함께 두었다. 박영하 박사는 이곳에서 24시간 환자를 돌봤는데, 병원비를 낼 형편이 안 되는 환자가 고마운 마음으로 대신 갖다 준 꿩이나 닭이 병원 옥상에서 이른 아침을 깨우곤 했다. 개원 8년 만에 종합병원으로 승격하고 병원의 이름도 '을지병원'으로 개칭했다. 박영하는 1967년 3월 '재단법인 을지병원 유지재단'이라는 공익재단을 출범하고, 을지병원이 사유재산이 아니라 사회에 환원된 공익법인체임을 공식화했다. 의료법인 제도가 1973년 처음 도입되었다는 사실을 볼 때 이보다 앞서 개인 소유의 종합병원을 재단의 사회 공익화한 것으로써, 의료를 사회적 복지사업으로 여겼던 박영하의 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 1983년 대전을지병원을 교육기관인 학교법인 을지학원으로 무상 출연해 의료인 후학양성의 기반을 마련했고, 1997년에는 학교법인 을지학원과 의료법인 을지병원 등에 개인 재산 100억 원을 출연했다. 의료공익화를 평생의 원칙으로 삼았던 박영하의 뜻을 기리기 위해 차남 박준영을 비롯한 유가족들은 172억여 원의 재산 모두를 을지학원과 병원에 기부함으로써 그 정신을 이어나갔다. 이때 개인 재산의 출연으로 대전 둔산 을지대병원 건립을 추진할 수 있었다. 박영하 박사는 1998년 5월 한국상록회로부터 '인간 상록수'에 선정됐고, 1999년 4월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2008년 4월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각각 수훈했다.

황인택 대전 을지대의료원장은 "세월이 빠른지라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던 순간도 벌써 10년이 지났으나 박영하 설립자의 가르침은 뚜렷이 우리의 마음속에 남아있다"라며 "대전 을지대학교병원이 벌써 개원 43주년째를 맞이하고 가까운 곳에서 우리를 지켜주신다고 생각하면 항상 든든한 마음"이라고 전했다.

을지대병원 전경
대전을지대학교 병원 전경. 대전 목동 을지병원에서 시작해 의과대학 인가를 획득하고 둔산 을지대학병원 건립까지 대전은 박영하 설립자의 뚝심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가 됐다.
▲환자가 필요한 곳에 병원을

1981년 4월 23일 대전 중구 목동에 17개 진료과에 218병상을 갖춘 대전을지병원이 개원했다. 대형 종합병원들이 서울 강남 개발을 쫓아 강남 진출에 혈안이 되었던 때이자, 1970년대 후반까지 인구 100만 명이 채 안 되던 대전에서 파격적인 도전을 단행한 것이다. 당시 대전에서는 충남대병원이 개원한 지 9년째 되던 해였고, 대전성모병원이 종합병원 인가를 받은 지 1년째 되던 척박한 환경이었다. 이미 1967년 공익법인의 출범으로 의료복지 구현에 대한 의지를 표명한 박영하 박사는 지방의 열악한 의료 환경 개선을 위해 강남보다는 의료 취약지구를 선택했다. 박준영 을지재단 회장은 "병원이 잘되는 곳이 아니라 환자가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박영하 설립자의 신념이었다"면서 "그것이 을지를 강남 진출이 아닌 대전으로 이끌었다"고 말했다.

박영하 박사는 판단은 신중하되 결정 후에는 무섭게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었다. 배재학원의 부지를 인수한 후에 곧바로 설계에 착수하고 착공 1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대전을지병원은 진료 측면에서 착실하게 입지를 다져나갔다. 1983년 암치료센터를 개원한 데 이어 1985년 2월에는 대전지역 최초로 13세 어린이를 대상으로 심장병 개심술에 성공해 중부권 유일하게 대동맥 수술을 시행하는 병원으로 발전했다. 또 2001년 8월에는 충남 금산에 종합병원을 개원해 의료 소외지구 국민 보건향상에 이바지 했다. 1996년 의과대학 설립을 승인 받은 4대 대학 중 을지대의과대학만이 '의료취약지구 내 종합병원 건립'이라는 약속을 유일하게 이행함으로써 그 의미가 더욱 빛났다.

▲도전했을 때 성장하는 을지

을지재단은 앞서 1972년 의과대학 설립 신청을 제기할 정도로 학교설립에 열망이 컸다. 박영하 박사의 선친 박봉조(1900~1952) 선생은 '의사로서 성공 후엔 반드시 작은 고등학교라도 설립해 육영사업을 해달라'는 유훈을 아들에게 남겼다. 1983년 서울보건전문대학을 전격 인수한 을지재단은 1996년 12월 대전을지병원에 의과대학 설립인가를 정식으로 획득했다. 이에따라 대전을지병원은 1996년 학교법인의 자산으로 무상 기부되고, 1997년 1월에는 을지대학 부속병원으로 전환됐다. 2004년 대전을지대병원은 또 한 번 도전했고 큰 변화를 꾀했다. 대전의 행정과 경제·문화·교통 중심지인 둔산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지하 3층~지상 16층 연면적 9만9000여 ㎡(3만여 평)에 총 1053개 병상을 갖추고 문을 열었다. 당시 서울시 노원구 하계동의 의료법인 을지병원(현 노원을지대병원)은 을지의대 설립과 둔산병원 건립 자금의 70% 이상에 해당하는 총 662억 원을 무상으로 기부했다. 대전과 경기도 성남에 캠퍼스를 둔 을지대와 대전·노원을지대병원 등의 산하기관을 가진 을지재단은 경기도 의정부에 또 하나의 을지대병원을 개원하고 캠퍼스를 준공했다. 지역과 함께 성장하며 새로운 분야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환자가 필요한 곳에 병원을 마련하는 을지 역사의 연장선에서다.

국내 의학발전과 인재양성에 평생을 헌신해 온 박영하는 2013년 5월 7일 영면했다. 향년 87세였다. '의료기관의 본래 사명은 환자를 위해 최선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봉사기관'이라며 의료기관의 근간을 바로 세웠다. 우리나라 의료계의 거목으로 이름을 남긴 박영하는 국가와 사회발전에 공헌한 기여로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묘역에 안장됐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대전 중수청, 세종 임시 개청 후 옛 대전세무서 부지로 이전 추진
  2. 대천해수욕장, 126명 안전요원 총출동
  3. 학교 믿고 입주했는데…입주민 "교육청 중재 나서라"
  4. 부산 동구, 북항 해양레저에 시민 1000명 모였다
  5. [르포] 선풍기도 없는 40.2도 정산부스… 폭염 속 공영주차장 근로자
  1. [르포] 대청호 녹조 시작점 추소리 가보니…걷어내도 짙은 초록빛
  2. [교육부 하반기 업무계획] 국가인재위원회 신설… 거점국립대 3곳 성장엔진·AI 분야 패키지 지원
  3. '우린 비급여만' 건강보험 미청구 의료기관 대전 65곳 충남 31곳
  4. 과학기술정보연구원, 1억원 상당의 신기술 기업 이전 완료
  5. 대덕특구 공동관리아파트 R&D 맞춤형 심사 대상될까…예타 폐지 새기회

헤드라인 뉴스


대전시 2037년 전력자립도 108% 달성 관건은 `주민 수용성`

대전시 2037년 전력자립도 108% 달성 관건은 '주민 수용성'

대전시가 2037년까지 전력자립도 108%를 달성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지역 산업계는 목표 달성의 핵심인 대형 발전소 건설이 과거 서구 평촌산업단지 LNG발전소 건설 추진 당시처럼 주민 반발에 부딪힐 가능성이 크다며 실현 가능성에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다. 6일 에너지경제연구원의 '2025 지역에너지통계연보'에 따르면 2024년 기준 대전의 전력자립도는 2.96%로 전국 17개 광역시·도 가운데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전력자립도가 5%를 밑도는 지역은 전국에서 대전이 유일하다. 16위 광주(9.56%)의 3분의 1에도 못..

정부 국가철도망 계획에 대전시 역량 집중해야
정부 국가철도망 계획에 대전시 역량 집중해야

철도사업의 출발점인 정부의 5차 국가철도망 구축 계획(2026~2035년) 발표가 임박하면서 지역 철도사업 반영을 위해 대전시와 지역 정치권의 역량 집중이 요구된다. 전국 지방정부 건의와 국정과제 등 검토사업만 300개 600조원에 달해 지자체 간 치열한 경쟁이 예고되고 있어서다. 6일 대전시와 정부에 따르면 정부는 제5차 국가철도망 구축계획을 연내 확정할 전망이다. 당초 지난해 말 발표가 예정됐지만, 국토교통부는 발표를 올해로 미뤘다. 6월 지방선거가 있는 만큼 지역 간 갈등과 선거 전 불필요한 오해를 예방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송전선로 반대 대행진, 서구청장에 "직접 나서 의견수렴·대안 제시해야"
송전선로 반대 대행진, 서구청장에 "직접 나서 의견수렴·대안 제시해야"

용인 반도체 국가산단 조성과 송전선로 건설에 반대하는 전국 대행진 참가단이 대전에 도착해 주민 의견 수렴과 보호 대책 마련을 위한 지방자치단체의 적극적인 대응을 촉구했다. 6일 대전환경운동연합과 대전송전탑백지화주민대책위원회 관계자 등 20여 명은 유성구청에서 서구청까지 거리행진을 벌인 뒤 전문학 서구청장과 간담회를 열고 의견서를 전달했다. 대전에서는 서구와 유성구 일부 지역을 경과대역으로 하는 345㎸ 신계룡~북천안 송전선로 건설사업이 추진되면서 예정 지역 주민들이 건강권과 재산권 침해를 우려하고 있다. 참가단은 서구가 송전선로 건..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극한 폭염 속 안전한 열차 운행을 위한 선로관리 극한 폭염 속 안전한 열차 운행을 위한 선로관리

  • ‘폭염으로 단축 영업합니다’ ‘폭염으로 단축 영업합니다’

  • ‘충청권 식수원을 보호하라’…대청호 녹조 제거하는 방제선 ‘충청권 식수원을 보호하라’…대청호 녹조 제거하는 방제선

  • ‘전문 간호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겠습니다’ ‘전문 간호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