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 '평범한 불선'이 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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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소리] '평범한 불선'이 퍼지다

김태열 수필가

  • 승인 2024-03-04 11:16
  • 신문게재 2024-03-05 19면
  • 조훈희 기자조훈희 기자
풍경소리 김태열 수필가
김태열 수필가
봄기운이 소리 없이 북적거리고 있다. 겨우내 움츠렸던 몸과 마음을 대지의 리듬에 맞추어 기지개를 켤 때다. 이동할 때 대중교통을 주로 이용하고, 취미로 걷거나 자전거를 자주 타다 보니 주위를 둘러보는 눈길이 부산하다. 더러 이건 아닌데 하는 행동들이 눈에 들어온다. 규범이나 법을 위반하지만 적발하기에는 공권력이 미치지 못해 개인의 양심에 기댈 수밖에 없는 영역에 속한 행위들이다. 정작 당사자는 이 정도는 어물쩍 넘어가도 된다고 여기는 듯하다. 너무 흔해 '평범한 불선'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이와 거리가 있지만 다소 비슷한 개념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아돌프 아이히만이 체포돼 전범 재판에 넘겨졌다. 그는 재판과정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는커녕 뜻밖에도 상부에서 시키는 대로 일을 했기에 법으로는 무죄라고 주장해 사람들을 경악에 빠뜨렸다. 이 과정을 줄곧 참관한 정치철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악인은 생김새와 정신구조가 우리와 다르리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었다. 우리나라도 군사독재 시절에 고문치사사건으로 악명 높았던 사람이 가정에서는 평범한 아빠, 남편이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악은 멀리 있지 않고 우리 자신 속에 있을 수 있기에 얼마든지 불합리한 일을 저지를 수 있음을 책에서 밝히고 있다. 그녀는 '악의 평범성'이 집단의 논리와 광기에 매몰된 채 사유하지 않고서 지시만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데서 나타난다고 봤다.

선악에 대해서 동양과 서양이 보는 관점이 달라 흥미롭다. 서양에서는 선과 악이 대립하고 투쟁하는 개념인 반면, 동아시아에서는 선의 반대말은 악이 아니라 불선(不善)이다. 오늘날 주로 악(惡)으로 사용되는 한자는 옛날에는 아름다움의 반대를 뜻하는 오(惡)로 읽었다. 불선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잠시 선한 마음이 달아나 나타났기에 고치면 얼마든지 선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생활 주변에서 목격되는 평범한 불선의 사례는 많다. 오토바이가 보행자와 같이 횡단보도를 버젓이 건너기도 하며 교통신호 무시는 너무 흔하다. 운전하면서 창문 열고 담배꽁초를 버리는 행위도 자주 눈에 띈다. 골목길, 천변길, 산이나 공원 쉴만한 곳에서는 막 버린 일회용 커피잔, 캔맥주, 담배꽁초로 걷거나 쉬고 싶지 않을 정도다. 결국 여름철 홍수 때마다 상류에서 떠내려온 각종 쓰레기는 우리들의 실종된 양심의 종합세트가 아닐지.

평범한 불선은 일상생활에서 결과를 생각하지 않거나 하찮게 여기는 행위에서 나온다. 하지만 결코 그 영향은 사소하지 않다. 이런 일이 많을수록 점점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저신뢰 사회로 될 것이다. 이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전체와 연결된 유기적 존재가 아닌 분리된 존재로만 생각하기에 일어나는 것이다.

겉으로는 선진국의 문턱을 넘어도 아직도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우리 지성의 현주소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K컬처로 지구촌을 유혹하고 '빨리빨리'의 긍정적 문화는 세계에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가 됐다. 이제는 지구촌에 제시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 볼 시점인 듯하다.

현시점에서 중요한 일은 내가 좋아하고 내게 유익했다고 타인에게 권하기보다는 타인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을 하지 않는 태도다. 그런 노력이 모일 때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려보고 배려와 공감하는 마음이 봄의 꽃처럼 널리 피어날 테다.

지속 가능한 공동체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개인의 각성을 통한 집단지성의 선한 힘을 키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일상에서 쉽게 일어날 수 있는 '평범한 불선'이 내 안에서 움트고 있는지 성찰해 선으로부터 달아난 마음을 돌아오게 하자. 그럴 때 '이 정도는 괜찮겠지, 봐주겠지'하는 내 안의 자기 합리화라는 악순환의 고리에서 빠져나와 성숙한 사회로 가는 희망의 풍선을 띄울 수 있을 것이다. /김태열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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