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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서울대 의대 전신인 대한의원 부속의학교를 다니다 '친일파 이완용 저격 사건'에 가담해 10년형을 선고 받은 오복원 애국지사. |
대한의협 산하 '한국의사100년기념재단'은 최근 '열사가 된 의사(醫師)들'이란 제목의 책을 통해 의사들 가운데 독립운동을 한 10명의 애국지사들을 소개했다.
평남 강동에서 13살까지 한문을 배운 오복원은 신한문을 배우기 위해 홀로 경성(현재 서울)로 유학을 온 뒤 독학으로 1906년 경성의전에 들어갔다.
당시 독학으로 공부해 최고 학부인 대한의원 부속의학교(후일 경성 의전)에 합격하기란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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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중앙에 서 있는 사람이 서울대의대 전신인 대한의원 부속의학교에 다니가 친일파 이완용 저격 사건에 나섰던 애국지사 오복원 의사다. |
1909년 12월 22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리는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석한 을사오적의 한 명인 총리대신 이완용을 저격한 이재명 의사와 '원팀'을 이뤘다.
오 의사는 이재명이 거사를 준비할 수 있도록 자금과 옷을 준비하는 역할을 했다.
13세까지 고향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1901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해 신의학을 배우는 한편 밤에는 천도교 교리강습소에 나가 학생들을 지도했다.
1909년 11월 이재명이 서울로 찾아와 을사오적의 우두머리인 이완용과 일진회(一進會)의 이용구를 살해하는 데 참여할 것을 요청하자 즉석에서 이를 승낙했다.
이재명은 이완용의 처단을 담당하고 오 의사는 박태은, 이응삼과 함께 자금조달의 임무를 맡아 각지를 돌아다니며 자금을 얻어 조창호에게 주어 거사 때 입을 학생복과 무기를 구하게 했다.
같은 해 12월 17일 그는 이재명의 숙소에서 거사계획의 점검을 위한 최종회의에 참석하고, 이완용을 먼저 처단하기로 한 계획변경 소식을 이완용과 이용구의 동정을 살피는 임무를 띤 같은 학교에 다니던 김용문에게 전했다.
이재명이 그해 12월 22일 명동성당 앞에서 이완용을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쳐 체포되자 그도 이에 연루돼 1910년 5월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이재명은 현장에서 이완용의 경호원들에게 체포돼 경찰에 넘겨졌고, 이재명은 거사를 가담한 사람에 대해 입을 함구했다.
그러나 이재명이 머물던 숙소 주인이 오복원, 김용문의 이름을 대 대한의원 부속의학교에 있던 두 사람은 잡혀갔다.
당시 최고학부 학생들이 관여됐다는 사실에 사회적 파장은 컸다.
1910년 4월 13일 오전 10시 경성지방재판소 제1호 법정에서 사건 관련 공판이 열렸다.
오 의사는 재판 내내 이재명 보다 더 강한 어조로 당당하게 맞서 변호사들조차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오 의사는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당시 25살이었다. 꽃다운 청춘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출소 후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 현실 정치에 나오지 않고, 충남 대덕과 충북 보은군 삼가면을 오가며 청년들에게 천도교 전파와 민족정기를 선양했다.
1959년 1월 14일 대덕에서 타계했다.
정부는 오복원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대한의사협(회장 최대집)회 제40대 집행부는 광복절인 지난 8월 15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 158'에 위치한 오 의사의 묘소를 찾아 참배했다.
최대집 회장은 "일제 강점기 당시 우리 선배 의사들의 독립 운동사에 대해 조사하면서 이토록 많은 분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매우 큰 감동을 받게 됐다"며 "우리 선배 의사들이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앞장섬으로써 독립과 대한민국 건국에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은 오늘날 후배 의사로서 크나큰 자긍심을 느끼게 한다"는 소회를 밝혔다.
서울=오주영 기자 ojy8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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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의협지도부가 지난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오복원 애국지사의 국립서울현충원 묘역을 찾아 참배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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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