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식탐] 명절 혼밥

  • 오피니언
  • 우난순의 식탐

[우난순의 식탐] 명절 혼밥

  • 승인 2021-02-03 11:12
  • 신문게재 2021-02-04 18면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1
베짱이 기질을 타고난 나는 노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좋은 시절 다 지나갔다는 걸 일찍이 직감했다. 들로 산으로 망아지처럼 뛰놀던 자유는 엄격한 학교에 저당잡히고 만 것이다. 그렇다고 장문의 편지를 써놓고 홍길동처럼 가출할 엄두는 못 냈다. 단지 소심한 방법으로 꾀병을 앓아 학교에 가지 않는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에 들어가니 상황은 더 심각했다. 1학년 때 어쩌다 팔자에 없는 '자리'를 맡았다. 실장, 부실장 밑에 무슨무슨 부장이란 게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나에게 떨어졌다. 당시엔 학년 초에 전 학급을 대상으로 환경심사라는 게 있었다. 담임선생님은 간부들한테 일요일에 나와 교실 환경을 꾸미라는 특명을 내렸다. 암담했다. 휴일에까지 나와야 하다니, 생병 날 지경이었다. 나와는 달리 친구들은 그리 싫지 않은 모양이었다. 1년 동안의 이런 '노역'은 나에겐 자유를 빼앗는 족쇄였다.

조직생활을 버거워하는 성향은 성인이 돼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밥벌이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먹고 살려면 일을 해야 하는 건 불문가지. 단, 철칙을 만들었다. 휴일엔 회사사람 안 만나기! 퇴근하면 회사 일은 깡그리 잊자는 주의였다. 말이 좋아 잊는 거지 사실 잊혀지는 건 아니다. 다만 회사 사람을 보지 않음으로써 물리적으로 회사와 거리를 두자는 의미다. 나야말로 진작부터 워라밸을 실천한 소유자인 셈이다.

이런 나의 철학이 신은 못마땅했던지 결국 형벌을 내렸다. 재작년 설날에 회사에 출근하고야 말았다. 내가 속했던 미디어부는 연휴에도 돌아가면서 당직을 서야 한다. 속보가 있을 수도 있고 그날의 기사가 올라오기 때문에 홈피 웹 편집을 해야 한다. 집에 노트북이 있어 고향집에 갖고 가서 업무를 보면 문제될 게 없었다. 그런데 이 놈의 노트북이 갑자기 먹통이 돼버렸다. 직장생활 하면서 처음으로 명절에 고향에 못가는 불상사를 맞았다. 설날 아침 대충 도시락을 쌌다. 전날 저녁 먹었던 봄동 겉절이와 김, 잡곡밥, 그리고 배와 오렌지. 아, 집에선 맛있는 떡국과 온갖 전, 나물 반찬이 밥상에 그득할텐데. 고소한 기름냄새가 코 끝에 맴도는 것 같았다. 적막한 사무실에서 도시락을 까먹으며 문득 재밌는 상상을 했다. 얄미운 사람들 책상 서랍에 용수철 달린 장난감 뱀을 넣어놓는다, 출근해서 서랍을 열면 뱀이 튀어오른다, 그리고 기절초풍한다…. 음하하하.

포기하니 마음이 편했다. 전날의 충격이 가시고 명절 혼밥이라는 색다른 경험이 짜릿했다. 명절에 회사 출근을 어디 상상이나 했는가 말이다. 설날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홀로 있는 내가 특별한 존재로 느껴졌다. 그러자 전에 없던 애사심마저 생겼다. 내가 도의 경지에 다다랐나? 이게 무슨 증후군일까. 사무실 화초에 일일이 물을 주고 창문을 활짝 열고 환기도 시켰다. 잠깐 틈을 내 회사 옆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한 시간 동안 걸었다. 한 쪽에선 남자 애가 축구공으로 발재간을 부리고 있었다. 머리 스타일이 멋들어진 소년은 축구선구가 꿈이라고 했다. 햇살이 전에 없이 따사로웠다.

다음날 엄마와 언니가 음식을 바리바리 싸들고 왔다. 사골국물에 떡국에 얹는 양념한 소고기도 있었다. 명절 혼밥의 쓸쓸함을 한방에 날렸다. 하, 그런데 이번 설도 예사롭지 않다. 징글징글한 코로나가 끈덕지게 물고 늘어진다. 누그러질만 하다가도 여기서 퍽, 저기서 퍽. 정말이지 코로나라는 놈은 진을 쏙 빼놓는다. 타인과 온기를 나누면 필연적으로 상처를 수반하는 이 아이러니. 암울한 미래를 그린 공상과학영화의 카피도 아니고. 혼밥이 개인적 취향에서 전 인류의 일상이 되는 건 우울하다. 고립 속의 자유는 옳지 않다. 하지만 끝은 있는 법. 악명높은 페스트도 과거지사가 됐다. 또 한번 견뎌야 한다.

<디지털룸 2팀 부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타임월드 매각 검토에 둔산 상권 촉각…백화점 유지 변수
  2. 타임월드 매각 검토에 고용 불안…노조 “안정 보장하라”
  3. 대전 한전 전력연구원 ESS 화재…배터리팩 28개 전소
  4. 행정수도 온통대전 충청 밥상머리 민심 관통 전망
  5. 천리포수목원, 꽃무릇 개화 시작…추석 절정 맞아
  1. 최재근 일자리진흥원장과 전용석 대전신보재단 이사장 각각 임명
  2. 대전시 지역 첫 방산 소부장 특화단지... 'AX 클러스터' 시정동력 탄력
  3. 한화, 1R서 설악고 민주홍 지명…학교 첫 1라운더
  4. 허태정 "트램 흔들림 없이 추진" 정상 추진의지 밝혀
  5. 충남 천안·아산 7개 산업단지, 반도체 후공정 특화단지 지정

헤드라인 뉴스


전국 유일 `식물의회` 대덕구의회 의장 선출 또 무산

전국 유일 '식물의회' 대덕구의회 의장 선출 또 무산

석 달째 '감투 싸움'으로 개점휴업 상태인 대전 대덕구의회가 21일 임시회를 열고 다시 의장 선출에 나섰으나 여야 간 이견을 좁히지 못하면서 또다시 무산됐다. 전국 227개 기초의회 가운데 아직까지 원 구성을 마무리하지 못한 곳은 대덕구의회가 유일하다. 민생 현안은 뒷전인 채 의장 자리를 둘러싼 여야 대치가 장기화하면서 주민들이 의회에 근조화환을 보내는 등 지역사회의 반발도 거세지고 있다. 21일 중도일보 취재결과, 대덕구의회는 이날 오전 제295회 임시회를 열고 전반기 의장 선출을 위한 표결을 진행했으나 단독 후보로 등록한 서미경..

저축성예금 50조원 목전 둔 대전... 은행권 예금 금리 경쟁에 더 오를까
저축성예금 50조원 목전 둔 대전... 은행권 예금 금리 경쟁에 더 오를까

주요 시중은행이 앞다퉈 정기예금 금리를 올리며 금융소비자 모시기에 나서면서 50조 원을 목전에 둔 대전 예금은행 저축성예금 수신 잔액도 크게 오를 전망이다. 최근 시장금리가 오르면서 은행들이 수신 경쟁을 본격화하고 있는데, 정기예금 금리를 3% 중반까지 올리고 있다. 21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은행은 이날부터 대표적인 정기예금 상품 금리를 0.1%포인트 올렸다. 지난 14일 같은 상품 금리를 최고 0.6%포인트 올린 이후 일주일 만에 추가 인상이다. 이에 따라 1년 이상 2년 미만 만기 예금 금리는 연 3.4%에서 3.5%로 올..

충청권 AI활용 발전비전 전력공급 원활한 확보 시급… 화력발전 의존 장래에 불리
충청권 AI활용 발전비전 전력공급 원활한 확보 시급… 화력발전 의존 장래에 불리

충청권 지자체가 인공지능(AI)을 활용한 방산·바이오·반도체 산업을 미래 성장동력으로 육성하려 AI 데이터센터에 투자하고 있지만, 필요한 전력 확보가 주요 현안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충청권은 석탄화력발전 의존도가 높은 데다 송전망과 무탄소 전원 여력이 충분하지 않아 향후 데이터센터가 본격 가동되면 전력 공급에 병목이 발생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21일 한국전력 대전충남본부와 에너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대전·세종·충남·충북이 AI를 활용한 성장전략에 집중하면서 AI 데이터센터 투자가 확대되고 있으나 전력공급이 중요한 현안으로 떠오르고..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지방의회법 제정을 촉구한다’ ‘지방의회법 제정을 촉구한다’

  • 미리 보는 2026 지상군페스티벌…유·무인 복합전투체계 실전 시현 미리 보는 2026 지상군페스티벌…유·무인 복합전투체계 실전 시현

  • ‘풍요로운 추석 명절 보내세요’ ‘풍요로운 추석 명절 보내세요’

  • 차례상 차리기 배우는 어린이들 차례상 차리기 배우는 어린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