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人 칼럼] 고암 이응노의 '그리운' 사계 산수

  • 오피니언
  • 문화人 칼럼

[문화人 칼럼] 고암 이응노의 '그리운' 사계 산수

김현숙 (이응노연구소 소장)

  • 승인 2021-03-31 15:45
  • 신문게재 2021-04-01 19면
  • 오희룡 기자오희룡 기자
이응노, 풍경, 1
이응노, '풍경'. 1968. 한지에 수묵담채. 28.5×36cm,이웅노미술관소장
이 칼럼에 사진으로 실린 풍경화는 대전 이응노미술관의 '이응노의 사계'전에 전시되고 있는 그림 중 하나로 이응노가 유럽 간첩단 조작 사건인 '동백림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대전교도소에 복역했을 당시에 그려졌다.

길게 흐르는 큰 강을 가운데로 하여 뒤로는 나지막하고 둥근 산이 물결처럼 겹겹이 이어지고, 강 앞쪽의 흙 길에는 하얀 두루마기에 갓을 쓴 두 노인이 서있다. 삼단 구성에 호방한 붓질로 시원하게 펼쳐진 강변 풍경을 들여다보니 길 위의 두 노인네 표정과 몸짓이 사뭇 재미지다. 생선 한 축을 손에 든 노인은 고개를 돌려 뒤쳐진 친구를 바라본다. 한시라도 빨리 싱싱한 생선을 가족 저녁 상 위에 올리고픈 마음에 지팡이를 앞쪽으로 꾹 집었는데 무언가 그를 막는 기운이 있다. 살펴보니 뒤쳐진 어르신의 두루마기 앞섶이 흐트러져있고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지팡이를 짚지 않고 손에 들고 있으니 길을 가려는 마음이 없고, 벌건 얼굴색으로 미루어 이미 거나하게 마신게 틀림없다. 그럼에도 친구를 붙잡는 그 심사를 짐작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흥건하게 취해 인생사 쉬어가면 좋으련만 이 친구 날 버리고 그냥 가려하니 수염이 삐죽 곧추설 정도로 괘씸하지 않겠는가.

산꼭대기에 늠름하게 자리 잡은 정자, 소 등짝 같이 솟아 이어지는 산등성이, 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가옥들이 펼치는 그림 속 풍경을 눈으로 따라가 본다. 공간 지리 파악에 심히 어두운 필자로서는 이 곳이 어디일까 하염없이 궁금할 뿐이지만 어쩌면 구체적으로 어디라고 꼭 집어 말해줄 이가 홀연히 나타날 지도 모르겠다. 그림 우측에 화가가 직접 썼듯이 이 그림은 대전 교도소에서 그렸으니 직접 경치를 보고 그린 사경이나 실경은 아닌데, 산은 푸르고 미루나무와 버드나무에 살이 올라 잎이 풍성하니 때는 늦봄이나 초여름이다.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 풍경이고 인물인데 계절감까지 생생하게 전해지니 단원 김홍도가 울고 갈 실력이 아닐 수 없다. 고향 가까운 대전 교도소에서 그렸으니 도도히 흐르는 금강 변 풍경을 그리워하며 그리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김현숙 사진
김현숙(이응노연구소 소장)
고암은 '홍성에서도 몇 십리 더 떨어진 고요하고 평온한 작은 마을', 뒤로는 수수하고 우아한 월산이 받쳐주고 앞으로는 우뚝 솟은 용봉산 봉우리가 보이는 초가에서 태어났다. 부엉이 봉우리, 까까중 봉우리, 공주 봉우리, 올빼미 바위, 새색시 바위, 늙은이 바위 등을 오르내리며 자랐으니 훗날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늙은 부모와 형제,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그 바위들은 언제나 함께 있다'고 회고할 만하다. 고암에게 산수란 형상에 기개를 담고 거기에 냄새와 정감의 온도가 더해진 그리움의 덩어리가 아니었나 싶다.

충청이 낳은 세계적 거장 고암 이응노의 작품세계에 대해서는 주로 '문자추상'과 '군상'이 중심이 되어 논해질 뿐이지만 그는 산수, 인물 풍속, 대나무, 소와 닭과 개 그림 등 셀 수 없이 많은 그림과 조각 등속을 마치 숨을 쉬듯 제작했다. 그러하니 고암이라는 큰 산을 오르는 길은 수 없이 많을 수밖에 없으며 그 길의 고비 고비마다 풍경과 물상과 이야기들이 펼쳐지게 된다. 누구도 길 하나의 시각으로 모든 것을 보았다 말하지 말라. 지금 대전 이응노미술관에서는 고암이 머물렀던, 혹은 지나치며 마음에 담았던 사계절의 산수풍경이 부활하듯 펼쳐지고 있다. 만물이 따사로운 빛을 받으며 기지개를 펴는 봄 날, 고암 이응노와 함께 계절 속으로 들어가 보기를 권한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2030년 행정수도 거점의 광역교통망 촘촘히 구축
  2. 기나긴 공방 끝, 지천댐 건설 동력 확보… 기후부, 충청권 메가프로젝트 용수 수요에 '다목적댐' 추진
  3. 교육비 격차 벌어졌는데 장학금은 평균 웃돌아… 대전 대학 엇갈린 지표
  4. 세종교육청의 뜻깊은 하루… '퇴직·신규 교직원' 예우와 '헌혈' 동참
  5. 세종환경교육센터의 독창적 교구 눈길… 전국 벤치마킹 모델 주목
  1. (사)한국스마트혁신기업가협회, 오석진 대전교육감 초청 8월 정기모임 개최
  2. 충남대 국립공주대 통합신청서 통과…구성원 찬반투표 본격화
  3. 가을을 재촉하는 비
  4. 세종청년센터 지원 사업… 국세청 공모전서 금상 영예
  5. '실종' 사망 사고 불안감 확산… 세종경찰도 경계 태세

헤드라인 뉴스


특진·포상 받은 수사, 무죄 나면?… 경찰개혁 ‘사후검증’ 과제

특진·포상 받은 수사, 무죄 나면?… 경찰개혁 ‘사후검증’ 과제

경찰 송치 이후 불기소나 무죄로 뒤집힌 사건까지 추적해 기존 수사 성과를 다시 평가하는 시스템 마련이 경찰개혁의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경찰이 사건 무작위 배당과 수사심사 강화, 우수 수사관에 대한 포상·승진 확대 등을 추진하는 만큼 잘한 수사뿐 아니라 결과가 뒤집힌 수사도 사후 검증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검거나 수사 실적으로 특별승진이나 포상을 받은 뒤 해당 사건이 불기소나 무죄로 끝난 경우 이를 어떻게 평가하고 인사에 반영할 것인지도 논의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27일 경찰청에 따르면 경찰은 전날 오후 '경찰 범죄 수사..

담배꽁초 하나에 유성 카센터 2억 화재… 항소심도 벌금 500만원
담배꽁초 하나에 유성 카센터 2억 화재… 항소심도 벌금 500만원

담배꽁초를 제대로 끄지 않은 채 버려 2억 원이 넘는 화재 피해를 낸 남성이 항소심에서도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28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전지법 제2-2형사부는 실화 혐의로 기소된 A 씨의 항소를 기각하고 벌금 500만 원을 선고한 원심을 유지했다. A 씨는 2025년 3월 23일 낮 12시 13분께 대전 유성구의 한 카센터 앞에서 담배를 피운 뒤 담배꽁초를 바닥에 버린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A 씨가 현장을 떠난 뒤 약 4분 만에 카센터 건물 외벽에서 불이 났고, 외벽과 천장 등이 타면서 수리비 약 2억 1125만 원 상당의 피해..

2030년 행정수도 거점의 광역교통망 촘촘히 구축
2030년 행정수도 거점의 광역교통망 촘촘히 구축

충청권이 행정수도 세종시를 중심으로 한 그물망 광역교통망으로 한층 가까워진다. 2029년 대통령 세종 집무실, 2033년 국회 세종의사당 시대를 앞두고 메가시티, 즉 광역연합의 시너지 효과도 커질 전망이다. 청주공항~KTX오송역~조치원역~대전역~세종터미널~유성터미널~KTX공주역까지 각 지역 교통 거점에다 국회 세종의사당을 잇는 별도 노선들도 속속 계획되고 있다.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이하 행복청, 청장 강주엽)은 28일 청주국제공항(한국공항공사 청주지사)에서 제34차 행복도시 광역계획권 교통협의회(이하 광역교통협의회)를 열고, 이..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가을을 재촉하는 비 가을을 재촉하는 비

  • 대입 수시 앞 실기준비 ‘구슬땀’ 대입 수시 앞 실기준비 ‘구슬땀’

  • ‘청렴문화 함께 만들어요’ ‘청렴문화 함께 만들어요’

  • ‘온통대전 2.0’ ‘온통대전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