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강희 한국표준과학연구원 광도측정그룹 책임연구원 |
실험 수업은 6·25전쟁 참전용사이셨던 열정적인 명예교수님과 학과에서 연구 잘하는 것으로 유명한 조교님이 담당하셨다. 매주 달라지는 실험 주제에 대한 교수님과 조교님의 수업 방침은 그 주의 실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실험 설명서에 얽매이지 말고, 어떤 방법이든 스스로 실험을 설계해 최대한 자유롭게 탐구하라는 것이었다. 또, 자유로운 실험을 위해 실험실은 언제든 열어두셨다. 이 방침은 나에게 큰 동기 부여가 됐다. 넉넉한 실험 시간이 보장되면서 몰입을 잘하는 나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늦은 시간까지 실험하고, 수업이 없는 날에도 실험실에 가곤 했다. 복사량과 온도의 관계를 측정하는 실험에서는 원래 물을 채워서 100도까지 실험하라는 설명서를 벗어나 기름을 채워서 200도까지 더 높은 온도에서 측정해보기도 했고, 소리에 관한 실험에선 조용한 실험환경을 위해 아무도 없는 새벽에 나와 실험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주에 거리 역제곱 법칙(Inverse square law of distance)에 관한 실험을 진행하게 됐다. 이 실험은 방사능 측정 장비인 가이거 계수기(Geiger counter)의 거리를 바꿔가며 방사능 물질의 방사속(Radiant flux)을 측정하는 실험으로, 실험 목표는 측정되는 방사속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실험은 간단했지만, 그때 사용하던 가이거 계수기는 플라스틱 마개로 덮여 있었고 이에 따라 계수기와 방사능 물질 간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기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마개를 벗기고 더 정확한 거리를 측정하려 했는데, 그 순간 계수기가 펑 하고 터지고 말았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계수기 안쪽은 낮은 압력이 유지되고 있어서 충격에 매우 약했고, 이를 보호하기 위해 마개가 있었던 것이다.
수백만 원이 넘는 고가의 장비를 망가뜨리는 큰 실수를 했기 때문에, 조교님에게 바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불이익을 달게 받겠다 말했다. 그때 조교님이 해준 말이 2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난다. "장비를 망가뜨렸다고 점수를 올려줄 수는 없지만, 네가 열심히 하려고 노력을 하다 망가뜨린 것이니 불이익은 없다. 오히려 잘한 거고, 계속 이렇게 실험해라. 다만 부주의로 다치면 반드시 학점을 깎을 것이니 안전에 주의해라."
과학자가 된 지금 돌이켜 보면, 실험 전 장비의 특성을 충분히 살피지 않은 점은 분명 실수였고 더 신중했어야 했다. 다만 과학 연구는 본질적으로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진행하기 때문에 실수는 자주 일어나기 마련이고, 이러한 점을 잘 아셨기에 조교님은 질책 대신 격려를 해주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몇 년 전 실수로 무인기를 추락시킨 연구원에게 손해 배상이 청구됐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물론 그 연구원의 잘못이 컸을 것으로 추측하지만, 과학 연구란 본질적으로 잘 알지 못하는 것을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에 대한 관용과 격려가 없다면, 과연 과학자들이 불확실성을 극복하며 의미 있는 연구를 할 수 있을까? 다행히도 나는 조교님의 격려 덕분에 물리 실험에 열정을 잃지 않고, 스스로 설계하는 실험의 재미를 마음껏 느낄 수 있었다. 덕분에 지금까지도 물리 실험에 대한 '덕질'을 이어가고 있다.
이강희 한국표준과학연구원 광도측정그룹 책임연구원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