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시평] 디지털 모닥불 시대의 학습근육

  • 오피니언
  • 중도시평

[중도시평] 디지털 모닥불 시대의 학습근육

최동연 건양사이버대 교육혁신처장

  • 승인 2026-01-27 17:35
  • 신문게재 2026-01-28 18면
  • 정바름 기자정바름 기자
최동연 건양사이버대 교육혁신처장
최동연 처장
인류의 가장 오래된 생존 조건을 정면으로 그린 장자크 아노 감독의 영화 〈불을 찾아서(Quest for Fire, 1981)〉는 시작부터 관객을 압도한다. 영화 속 부족에게 불은 '있으면 좋은 것'이 아니라 '없으면 끝나는 것'이다. 불씨가 살아 있는 한 밤은 덜 무섭고, 맹수는 함부로 다가오지 못한다. 익혀 먹는 음식은 몸을 지키고, 따뜻함은 사람을 버티게 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불씨를 품에 안고, 또 누군가는 밤새 불을 지킨다. 불은 공동의 재산이자, 공동의 불안이다. 불빛이 흔들릴 때마다 부족의 표정이 같이 흔들린다. 그런데 어느 순간 불이 꺼진다. 그때 사람들의 얼굴에 번지는 공포는 과장이 아니다. 불은 따뜻함을 넘어 안전이었고, 조리였고, 빛이었고, 함께 모여 배우게 하는 삶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궁극적으로 보여주는 건 한 가지다. 불을 '가지고 있는' 삶과 불을 '만들 줄 아는' 삶은 생존을 가른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불씨가 꺼질까를 걱정하진 않는다. 대신 배터리, 네트워크, 계정, 알림 같은 디지털의 불씨로 일상을 유지한다. 길을 잃을까 불안할 때 우리는 지도 앱을 켜고, 약속에 늦을까 초조할 때 실시간 교통을 확인한다. 단체방 알림 하나에 사람들이 모이고, 온라인 대기열 하나에 수만 명이 같은 '문 앞'에 줄을 선다. 횡단보도의 디지털 신호는 낯선 사람들을 한 덩어리로 멈춰 세웠다가, 정해진 순간 한 방향으로 흘려보낸다. 예전 모닥불이 밤을 버티게 했듯, 오늘의 디지털은 생활을 버티게 해준다. 불이 맡았던 역할의 상당 부분을, 지금은 디지털이 조용히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여기서 생긴다. 디지털이 편해질수록 우리는 "내가 뭘 하고 있는지"를 잊기 쉽다. 길 찾기는 쉬워졌는데 방향 감각은 약해지고, 정보는 손쉽게 얻는데 스스로 정리하는 힘은 줄어든다. 영화 속 인물들이 불씨를 다시 얻었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난 것이 아니었듯, 우리도 디지털의 울타리 안에 들어와 있다고 끝은 아니다. 중요한 건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쓰느냐'다. 더 중요한 건 '쓰느냐'가 아니라 '다룰 줄 아느냐'다.

그래서 나는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역량을 학습근육이라고 부르고 싶다. 학습근육은 지식의 소유를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알아차리는 힘, 질문을 세우는 힘, 근거를 확인하는 힘, 내 말로 짧게 정리하는 힘, 그리고 내 삶에 적용해보는 힘을 뜻한다. 근육이 그렇듯 쓰지 않으면 줄어들고, 자주 쓰면 단단해진다. 디지털이 생활의 중심이 된 시대에는 특히 이 근육이 쉽게 약해진다. 편리함이 늘수록 생각과 고민의 과정이 생략되기 때문이다.

이 변화는 교육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배움의 무대가 교실에서 화면으로 옮겨오면서, 디지털화된 교육의 대표 모델로 사이버학습이 자리 잡았다. 여기서 사이버학습은 단순히 '온라인으로 강의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학습의 목표와 활동, 피드백과 평가가 디지털 모닥불에 맞게 돌아가도록 다시 설계되는 방식에 가깝다. 그래서 사이버학습을 콘텐츠를 받아보는 통로로만 여긴다면 학습은 단순 소비로 끝나기 쉽다. 반대로 사이버학습을 훈련장으로 쓴다면 디지털은 내 생각을 약하게 만드는 도구가 아니라, 내 생각을 단단하게 만드는 도구가 된다. 기술 중심으로만 접근하면 학습의 장점이 죽을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방법은 거창하지 않다. 강의를 켜기 전에 오늘 내가 얻고 싶은 것을 질문 하나로 적어보면, 화면이 나를 끌고 가는 대신 내가 화면을 주도하기 시작한다. 수업을 마친 뒤에는 남의 문장을 복사하지 말고 내 말로 다섯 줄만 요약해보자. 그 다섯 줄이 막히는 지점이 내가 아직 모르는 지점이다. 그리고 배운 것을 이번 주에 해볼 행동 하나로 바꾸어보자. 짧은 기록까지 남기면 다음 학습은 훨씬 깊어진다. 이런 작은 반복이 학습근육을 단단하게 해준다.

영화 속 불은 꺼지면 끝나는 운명이었지만, 결국 사람들은 '불을 만드는 법'을 배우며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우리도 비슷한 갈림길에 서 있다. 디지털 모닥불 앞에서 따뜻함만 얻는 사람으로 남을지, 아니면 배우는 힘을 키워 디지털을 제대로 다루는 사람이 될지. 디지털 모닥불이 아무리 환해도, 내 안의 학습근육이 꺼지면 우리는 다시 어둠으로 돌아간다.

/최동연 건양사이버대 교육혁신처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대전교육청 2026년 공무직 채용 평균 경쟁률 6.61 대 1… 조리실무사 '최저'
  2. 의대 정원은 늘리는데 비수도권은 교원 확보 난항…감사원 "대책 시급"
  3. 표준연 '플래시 방사선 1초 암 치료기' 프로젝트 시작 "2035년 상용화 목표"
  4. 6개월 째 치솟는 주담대 금리…대전·세종·충남 실수요자 부담 가중
  5. 교복부터 릴스까지… 대전교육감 후보 이색 홍보 경쟁
  1. 임신 23주 600g 신생아 4개월 집중치료 덕분에 '집으로'
  2. 대통령 체험학습 발언에 지역 교원단체 "교권 보호" 한목소리
  3. "지식재산고등법원으로" 특허법원 명칭 개정 목소리 나와
  4. [박현경골프아카데미]호구 안 당하고 싶다면 이렇게 하세요..현직 프로들이 말하는 OECD 극복하기
  5. 육군32보병사단, 대전 충무훈련서 민·관·군·경 합동 수송동원 훈련

헤드라인 뉴스


선대위 띄우고 공동선언하고… 대전·충청 선거 분위기 고조

선대위 띄우고 공동선언하고… 대전·충청 선거 분위기 고조

6·3 지방선거를 30여 일 앞두고 기선을 잡으려는 여야 각 정당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지고 있다. 국민의힘은 대전 선거대책위원회를 띄워 본격적인 선거 체제에 돌입했고, 더불어민주당 충청권 4개 광역단체장 후보들은 '충청권 공동대전환'을 선언하는 등 선거 열기가 점차 고조되는 분위기다. 먼저 더불어민주당 대전, 세종, 충남, 충북 4개 시·도지사 후보들은 29일 오전 세종시청에서 '충청권 공동대전환'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번 공동선언은 민주당 충청권 광역단체장 후보들이 이재명 정부의 '지방주도 성장' 기조에 맞춰 충청을 변방이 아닌..

與 충청 시·도지사 후보, "수도권 일극 깨부순다" 초광역 협력 선언
與 충청 시·도지사 후보, "수도권 일극 깨부순다" 초광역 협력 선언

더불어민주당 충청권 4개 시·도 광역단체장 후보들이 수도권 일극체제 타파와 초광역 협력을 내걸며 세몰이에 나섰다. 더 이상 지역 간 소모적인 경쟁 없이 세종 행정수도 완성과 광역 경제·생활권 구축 등 핵심 의제에 힘을 모으겠다는 뜻을 담았다. 이를 통해 충청권을 대한민국의 새로운 중심지로 전환하겠다는 약속을 이어갔다. 허태정(대전), 조상호(세종), 박수현(충남), 신용한(충북) 시·도지사 후보는 29일 오전 세종시청 브리핑룸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충청권 공동대전환' 선언식을 가졌다. 이들은 "수도권 일극체제는 더 이상 대한민..

대전 버드내초 인근 신생 핫플레이스로 `주목`…신규 창업점포 지속적 증가
대전 버드내초 인근 신생 핫플레이스로 '주목'…신규 창업점포 지속적 증가

대전지역 곳곳에서 신생 상권이 새롭게 형성되고 있다. 평소 주목받지 못했던 지역에 아파트가 들어서거나, 다시금 유동인구가 늘어나며 신규 점포 등이 하나둘 문을 열고 있어서다. 기존 상권과 달리 신규 창업 점포가 눈에 띄게 눈에 띄게 확장되자 창업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또 하나의 블루오션으로 주목받는다. 29일 소상공인 365 빅데이터가 추려낸 대전 신생 핫플레이스는 중구 유천1동 '버드내초등학교' 인근이다. 신생 핫플레이스란, 상권이 형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장소로 최근 들어 급부상하는 곳을 뜻한다. 5만 1045㎡ 규모의 해당 상..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때 이른 더위에 장미꽃 ‘활짝’ 때 이른 더위에 장미꽃 ‘활짝’

  • ‘우회전 시 일시정지 꼭 해주세요’ ‘우회전 시 일시정지 꼭 해주세요’

  • ‘74명 사상’ 안전공업 건물 철거 돌입…현장감식 병행 ‘74명 사상’ 안전공업 건물 철거 돌입…현장감식 병행

  • 이재명 대통령, 충무공 이순신 장군 탄신 제481주년 기념다례 참석 이재명 대통령, 충무공 이순신 장군 탄신 제481주년 기념다례 참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