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지를 둘러싼 성곽의 도시, 대전 산성을 다시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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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지를 둘러싼 성곽의 도시, 대전 산성을 다시 보다

  • 승인 2026-02-19 16:46
  • 신문게재 2026-02-20 9면
  • 최화진 기자최화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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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산성에서 동쪽으로 바라본 대청호./사진=대전시 제공
대전은 근대 이후 성장한 도시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도시 외곽 산줄기를 따라가면 삼국시대까지 이어지는 성곽 유적이 촘촘히 남아 있다. 전국에서도 보기 드물게 산성이 밀집한 이유는 무엇이며, 어떤 산성들이 존재할까. 대전의 지리와 역사, 그리고 실제 확인된 산성들을 통해 도시의 또 다른 층위를 들여다본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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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 산성 분포도./사진=대전시 제공
▲왜 대전에는 산성이 많을까 - 역사적 배경과 지리적 특징



대전 지역에는 약 40여 개의 산성과 보루가 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가지정 1개소, 시지정 23개소, 비지정 유적 17개소 등 다양한 형태로 남아 있다.

이처럼 한 도시 안에 다수의 산성이 밀집한 사례는 전국적으로도 드물다.



그 이유는 먼저 지형에서 찾을 수 있다.

대전은 차령산맥과 소백산맥 사이에 자리한 전형적인 분지로, 중앙부는 낮은 충적지이고 사방은 해발 300~500m 내외의 산지가 둘러싼 구조를 이룬다. 갑천·유등천·대전천이 분지를 관통하며 넓은 평야와 생활 기반을 형성했고, 그 주변으로 완만한 산록과 산악지형이 발달했다. 이 같은 분지 지형은 생활에는 유리하지만 외부 세력의 이동로가 하천과 계곡을 따라 제한적으로 형성되는 특징을 낳는다. 결국 분지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외곽 산 정상에 감시와 방어 거점을 두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었다. 실제로 대전의 산성과 보루는 대부분 시내 외곽 산지의 정상부에 자리하고 있으며, 이러한 배치는 지형적 조건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역사적 배경도 결정적이었다.

대전은 마한 세력권에 속했다가 삼국시대 백제 영역으로 편입되었고, 5세기 후반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하면서 전략적 요충지로 부상했다. 백제와 신라가 정치·군사적으로 교섭하거나 충돌하려면 대전을 지나 옥천과 금산으로 나아가는 길을 이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두 나라가 맞닿은 접경의 성격을 띠게 되었고, 그 결과 삼국시대 산성이 집중적으로 축조됐다. 현재 대전과 금산, 옥천 일대에 수십여 개의 산성이 분포하는 것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관련된다. 즉 대전의 산성은 특정 왕조가 일괄적으로 만든 시설이 아니라 분지라는 지형 위에서 삼국의 긴장과 교류가 반복되며 축적된 군사 유산이다.

2012 대전의 산성 분포조사에 따르면, 대전 산성을 금강수계·계룡산계·갑천수계·보문산계·계족산 및 대청호계·식장산계 등 여섯 권역으로 구분된다. 이는 산성들이 개별적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분지를 둘러싼 산악선을 따라 체계적으로 배치됐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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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봉 보루 전경./사진=대전시 제공
▲금강수계 산성 - 북쪽 수로와 이동 통로를 감시한 전초선

대전 산성 가운데서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축이 바로 금강을 따라 형성된 금강수계 산성군이다. 이 권역 산성들은 공통적으로 강을 내려다보는 자리를 택하고 있다.

삼국시대의 강은 지금의 고속도로였다.

물길을 따라 사람이 움직이고, 군사가 이동하고, 물자가 실려 왔다. 금강과 갑천이 만나는 지점은 그야말로 교통의 결절점이었다.

소문성은 이 구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해발 200m 남짓한 산 정상에 자리 잡은 이 산성에서는 금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성벽 둘레는 약 376m로 크지 않지만, 입지는 작지 않다. 강을 따라 오르내리는 움직임을 감시하는 데 최적의 위치이기 때문이다.

금고동산성 역시 갑천이 금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을 내려다보며 자리한다. 이곳에서는 두 물길이 만나는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누가 어디서 올라오는지 숨길 수 없는 자리다.

이처럼 금강수계 산성은 수로를 따라 형성된 이동 축을 관리하는 역할이 중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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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동 산성 출토유물./사진=대전시 제공
▲계룡산계 산성 - 험한 산세 자체가 성벽이 된 '자연 요새'

대전에서 서남쪽으로 방향을 틀면 도시의 분위기가 눈에 띄게 달라진다.

완만한 분지 풍경 대신 능선이 겹겹이 이어지고,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산세가 점차 높아진다. 이 일대가 바로 조사에서 '계룡산계'로 묶이는 권역이다. 이 권역 산성의 특징은 한마디로 산을 쌓은 게 아니라 산을 썼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안산동산성은 유성구 고조산 정상에 자리한 테뫼식 산성이다.

성벽이 능선을 따라 둘러지며 형성돼 있는데, 실제로 올라가 보면 성벽보다 지형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급한 경사와 길게 이어진 능선이 이미 방어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대전에서 조치원으로 이어지는 길과 주변 평야가 내려다보인다. 즉, 계룡산계 산성은 대규모 주둔시설이라기보다 분지 서남쪽으로 접근하는 움직임을 조기에 확인하는 감시 거점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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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골산성 남벽./사진=대전시 제공
▲갑천수계 산성 - 분지를 가로지르는 생활축을 지킨 중간 방어선

대전 지도를 펼쳐 놓고 보면 갑천은 도시를 남북으로 가르는 굵은 축처럼 보인다. 이 하천을 중심으로 형성된 산성들이 조사에서 '갑천수계' 권역으로 분류된다

갑천수계 권역의 산성들은 이 하천을 따라 형성된 이동 축을 감시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 외곽을 막는 최전선이라기보다, 분지 안으로 들어온 세력의 이동을 다시 한 번 통제하는 '중간 방어선' 성격이 강하다.

대전 산성 체계가 단일 방어선이 아니라 여러 단계로 구성됐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외곽 산성에서 1차 방어가 이뤄지고, 갑천 일대에서 다시 한 번 흐름을 조절하는 구조였던 셈이다.

▲보문산계 산성 - 도심을 내려다보는 남쪽 방어의 핵심 축

보문산 일대는 대전 시민에게 가장 익숙한 산이지만, 역사적으로는 분지를 남쪽에서 감싸는 핵심 방어 거점이었다.

이 권역에는 보문산성, 사정성, 흑석동산성 등이 연결되며 능선을 따라 배치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 산성들은 외곽 방어라기보다 분지 중심부를 직접 방어하는 내곽 거점 역할을 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지형적으로도 보문산 능선은 분지 가장자리를 따라 이어져 자연스럽게 하나의 '남측 방어 벨트'를 형성한다. 지금은 도심을 내려다보는 휴식 공간이지만, 과거에는 도시를 지키는 마지막 방어선에 가까운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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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산성에서 동쪽으로 바라본 대전 시내./사진=대전시 제공
▲계족산·대청호계 산성 - 동북 능선을 따라 이어진 연속 감시망

대전 동북부의 계족산과 대청호 일대는 능선이 길게 이어지는 지형이 특징이다.

이 권역 산성들은 특정 거점을 중심으로 하기보다 능선을 따라 연속적으로 배치된 양상을 보인다.

남북 방향으로 이어진 산줄기를 따라 이동 상황을 감시하는 구조로, 한 곳의 성이 아니라 여러 거점이 시야를 이어가며 방어망을 형성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지역 산성은 지형을 따라 '선형 방어'가 이루어진 사례로 이해된다.

▲ 식장산계 산성 - 옥천으로 이어지는 동쪽 관문을 지킨 방패

식장산 일대는 대전에서 옥천 방면으로 넘어가는 동쪽 관문에 해당한다.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연결되는 전략적 이동로가 이 방향으로 형성돼 있었다.

식장산계 산성들은 이 통로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배치돼 동쪽에서 들어오는 세력을 조기에 파악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대전 산성 체계에서 보면 이 권역은 동쪽 경계를 담당하는 '문지기'와 같은 위치라 할 수 있다.
최화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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