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서 신화 읽기] 제11장-젖밭들과 나주 박씨 열녀정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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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에서 신화 읽기] 제11장-젖밭들과 나주 박씨 열녀정려비

한소민/배재대 강사, 지역문화스토리텔링연구소 소장

  • 승인 2026-05-05 11:04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젖밭들'이라는 지명은 정유재란 당시 왜군에게 희롱당한 치욕을 씻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나주 박씨 부인의 비극적인 역사와 여성의 정절을 목숨보다 중시했던 시대적 아픔을 담고 있습니다. 조선 사회의 유교적 질서와 가문의 명예는 여성들에게 자발적인 선택을 가장한 가혹한 희생을 강요했으며,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성의 삶을 억압해 온 잔인한 굴레였습니다. 우리는 열녀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여성들의 고독한 죽음과 공포를 기억하며, 비석에 새겨진 그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진심으로 응시하고 위로해야 합니다.

1-충남대
충남대학교 야외박물관에 서있는 나주박씨 열녀정려비. 사진=한소민 소장
2-수몰
충남대학교 야외박물관에 서있는 나주박씨 열녀정려비. 1975년 대청댐건설로 수몰된 지역에 있던 내탑동 탑 등과 함께 충남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왔다. 사진=한소민 소장
3-비석
나주박씨 열녀정려비의 비문에 '열부 증무공랑 금정도찰방 정선처 안인나주박씨지려'라고 새겨져 있다. 사진=한소민 소장
이제는 대청호 물 속 깊이 잠겨버린 삼정골에는 한때 '젖밭들'이라 불리던 들판이 있었습니다. 낯설고도 생소한 이 이름 뒤에는 정절이라는 굴레 아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야만 했던 한 여인의 처절한 이야기가 담겨있지요.

정유재란 당시, 삼정골의 나주 박씨 부인은 전쟁의 참화가 다가오는 줄도 모른 채 평소와 다름없이 밭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평화롭던 일상은 방화와 약탈을 일삼던 왜군들의 습격으로 순식간에 무너졌지요. 그들은 놀라 저항하는 그녀를 폭행하고 가슴을 만지며 희롱한 뒤 달아났습니다. 정신을 차린 박씨 부인에게 닥친 고통은 신체적 상처 그 이상이었습니다. 정절을 목숨처럼 여겼던 시대, 적의 손길이 닿은 육신은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치욕이었기에 그녀는 결국 곁에 있던 농기구를 집어 들어 자신의 가슴을 자르고 숨을 거둡니다. 이후 사람들은 그녀의 피로 물들었던 자리를 '젖밭들'이라 불렀고, 열녀정려비를 세워 그 죽음을 기렸습니다.

이러한 죽음은 전쟁이 낳은 또 하나의 비극이었습니다. 이 땅의 아들들이 전장에 나가 창검을 맞댈 때 여인들은 그녀들만의 전투를 치러야 했지요. 의정부 검은돌마을의 전주 류씨 가문에서는 동서지간이었던 김씨와 신씨가 왜적에게 유린당하지 않으려 스스로 목을 매거나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으며, 예천 낙동강의 쌍절암에서는 시누이와 올케가 왜군 추격을 피해 강물에 몸을 던진 이야기가, 영광 칠산 앞바다의 팔열부정각에는 여덟명의 부녀자들이 강이나 바다로 몸을 던져 정절을 지켰다는 전설이 전해지지요.

여성들의 희생은 전시상황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유교적 질서 위에 세워진 조선 사회에서 여성의 정절은 곧 가문의 명예였습니다. 남편과 사별한 뒤 스스로 생을 마감한 여성은 열부(烈婦)라 칭송받으며 정려를 받았습니다. 가문과 공동체의 체면을 위해 목숨을 버려야 했던 이들의 결단은 자발적인 선택이라기보다 사회가 강요한 희생에 가까웠지요. 우리 땅 곳곳에 남겨진 정려비들은 정절이라는 규범이 얼마나 가혹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성의 몸을 향한 일방적 욕망과 그에 맞선 저항은 서구의 신화와 전설에서도 찾아 볼 수 있지요. 태양신 아폴론은 에로스의 금화살을 맞아 다프네를 사랑하게 되었지만, 다프네는 미움과 혐오의 납화살을 맞아 그를 필사적으로 거부했습니다. 아폴론의 일방적인 구애를 피해 달아나던 다프네는 그가 자신을 잡으려는 순간 아버지 페네우스에게 자신의 모습을 바꿔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고, 순간 그녀의 몸은 월계수 나무로 변하게 됩니다. 부드러운 살결은 거친 나무껍질로, 팔다리는 가지와 뿌리로, 머리카락은 잎사귀로 바뀌어 버렸지요. 신의 욕망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나무가 되어버린 그녀의 변신은 극단적 저항의 또 다른 형태입니다.

로마의 전설 속 루크레티아 이야기는 열녀 서사와 더욱 닮아 있습니다. 루크레티아는 귀족 가문의 여인으로 미모와 부덕을 겸비해 칭송이 자자한 여인이었지요. 하지만 손님으로 찾아온 왕족 섹스투스에게 겁탈당하고 난 뒤 남편과 아버지 앞에서 자신이 당한 치욕을 눈물로 고백하고는 단검으로 심장을 찔러 생을 마감하지요.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폭력의 책임을 짊어지고, 사회적 낙인을 지우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던 잔혹한 선택은 시대와 문화를 막론하고 여성들에게 주어진 가혹한 굴레였습니다.

젖밭들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관습이라는 이름 아래 여성의 몸과 삶이 가문의 명예를 위해 바쳐졌던 잔인한 역사의 흔적이었지요. 캠퍼스 잔디 위에 비각도 없이 의미도 잃은 채 그저 장식물처럼 서 있는 비석. 그 위에는 남편의 직책과 이름을 사이에 두고 '열부'라는 두 글자와 그녀를 지칭하는 '나주 박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아무런 죄도 없이 그저 희롱을 당했다는 이유만으로 죽음을 선택한 그녀. 그때 그녀가 감당했을 공포와 외로움을 우리가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요? 그저 걸음을 멈추고 잠시 마음을 건네는 일, 차가운 비석 위에 새겨진 한 인간의 고독한 죽음을 응시하는 일. 그 뒤늦은 경청이야말로 그녀의 마음을 보듬어 주는 가장 따뜻한 위로가 아니겠는지요?

한소민/배재대 강사, 지역문화스토리텔링연구소 소장

한소민-최종
한소민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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