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마정미 한남대 정치언론학과 교수 |
사회적으로는 다양한 멸칭들이 유행하고 있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혹은 나이가 적다는 이유로 혐오스런 멸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영포티, 개저씨, 급식충, 국밥충, 연금충, 초글링 등이 그 사례다. 대체 특정 연령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어디서 오는 걸까? 얼마 전 문제가 된 배재고의 '탱크데이, 가야지 가야지 스타벅스'처럼 역사에 대한 몰이해와 특정 지역에 대한 혐오와 멸칭도 심각하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고유명사인 그 이름 대신 다른 것을 부른다. 특정 발음으로 비튼 별명, 동물에 빗댄 조롱, 신체나 외모를 희화화한 표현. 처음엔 온라인 게시판 한구석에서 시작된 농담이었을 이 말들은 어느새 방송 자막에, 신문 제목에, 정치인의 국회 발언에까지 등장한다. 멸칭의 본질은 상대를 사람이 아니라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름을 부르는 순간 우리는 상대방을 하나의 인격체로 대한다. 그러나 멸칭을 부르는 순간, 그는 조롱거리가 되고 웃음의 소재가 되며 결국 논쟁할 가치조차 없는 존재로 격하된다. 정치적 대립은 원래 논쟁이어야 한다. 정책을 두고 다투고, 가치관을 두고 맞서야 한다. 하지만 멸칭은 이 모든 논쟁의 과정을 생략해 버린다. 상대의 주장을 들을 필요도 반박할 필요도 없다. 그저 우스꽝스러운 조롱의 대상일 뿐이다.
멸칭이 위험한 이유는 폭력을 유머로 포장하기 때문이다. 직접적인 욕설은 누구나 폭력성을 알아챈다. 그러나 재치있게 비틀린 별명, 그럴듯한 밈으로 소비되는 조롱은 폭력이라는 인식조차 만들어내지 못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유쾌한 언어유희라고 여기며 아무런 죄책감 없이 퍼 나른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혐오는 가장 은밀하고 효과적으로 번식한다.
멸칭은 전통적으로 선전 기법의 일환으로 사용됐다. 한편에서는 권위에 대한 유쾌한 도전이자 패러디 기법으로도 사용됐다. 언어유희와 풍자는 정치 문화의 오랜 일부이며, 권력을 향한 신랄한 조롱은 때로 견제의 기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견제와 혐오는 다르다. 정책과 발언을 겨냥한 날카로운 비판과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조롱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최근 멸칭 문화 현상이 유독 심해진 데에는 구조적인 이유가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는 같은 성향의 사람들끼리 모여 서로의 언어를 확인하고 강화하는 공간이다. 그 안에서 명칭은 소속감을 확인하는 암호가 된다. 같은 멸칭을 쓴다는 것은 곧 같은 편이라는 증명이며, 더 자극적이고 더 재치 있는 멸칭을 만들어낼수록 그 안에서 인정받는다. 여기에 알고리즘이 가세한다. 자극적인 표현일수록 더 많이 공유되고 더 오래 노출되니, 혐오는 점점 더 덩치를 키운다.
언론의 책임도 가볍지 않다. 균형 보도라는 명분 아래 혐오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고, 자극적인 발언을 뉴스거리 삼아 따옴표째 옮기는 관행은 혐오를 정제하기는커녕 공인된 언어로 승인해주는 결과를 낳는다. 온라인 밈으로 머물러야 했을 말이 신문 제목에 오르는 순간, 그것은 더이상 일부 극단적 이용자들의 언어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용인하는 공식 언어가 돼 버린다.
혐오는 유머의 얼굴을 하고 가장 손쉽게 스며든다.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은 거창한 관용이 아니라, 그저 상대를 제대로 된 이름으로 불러주는 아주 기본적인 예의다. 김춘수 시인의 시구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처럼 말이다. /마정미 한남대 정치언론학과 교수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김흥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