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당신이 잠든 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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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당신이 잠든 사이에

  • 승인 2019-06-16 10:58
  • 신문게재 2019-06-17 22면
  • 박새롬 기자박새롬 기자
'경고. 4층 세입자 분 재활용 쓰레기 버리지 마시오.'

분리수거장에 붙은 하얀 종이 위 빨간 색 글자를 보고 3초 정도 멍해졌다. 여기는 빌라 공용 재활용수거장인데. 너무 재활용품을 많이 버렸던 걸까, 아니면 너무 자주 버렸던가. 집으로 돌아와서 한참 고민하다가 빌라 관리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빌라에는 공용 재활용품 수거장이 없어요."

5층 현관 맞은 편 계단 앞에 '비닐류' '플라스틱류'라는 종이가 붙어있는 분리수거함은 알고보니 5층 거주자의 개인 공간이었다. 빌라 공용 시설로 착각했고 4개월 동안 그 곳에 재활용품을 배출했다. 자신이 버리지 않은 재활용품이 들어있었으니 5층 거주자는 황당했을 것이다. 그에게 4층에 사는 사람은 얼굴도 모르지만 예의 없고 몰상식한 이였을 테다.

다음날 구청 홈페이지에서 재활용품 분리 배출 요령을 확인했다. 새벽 수거 일정에 맞춰, 그 전날 저녁 투명 비닐봉지에 담아 내놓았다. 다음날 아침, 내놓은 재활용품이 사라진 걸 확인했다. 재활용품 배출 능력 합격증을 받은 듯 기뻤다. 5층에서 받은 '몰상식한 사람'의 딱지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밤에 시민이 재활용품을 내놓으면 새벽에 수거업체가 가져가는 일은 서로가 '보이지 않아서' 가능한 거래다. 재활용품 수거업체를 직접 만나 분리수거 한다면 우리는 재활용품의 상태에 신경 쓸 것이다. 음식물이 잔뜩 낀 플라스틱, 라면 국물로 물든 스티로폼은 원칙적으로 받아주지 않는다. 직접 만나 일일이 검사받지 않으니 '이 정도면 괜찮겠지'라는 마음으로 재활용품을 내놓는다. 수거업체에서도 재활용 상태가 불량해도 원칙대로 수거해가지 않으면 민원이 들어오기 때문에 웬만하면 가져가준다. 버리는 이도, 치우는 이도 서로 보이지 않으니 많은 걸 모르는 척 한다.

최근 식료품 구매의 한 흐름에 새벽배송이 있다. 대표적 업체 중 한 곳은 오후 11시 전 주문하면 다음날 아침 7시 전까지 구매한 식료품을 배달해준다. 다음날 마실 우유가 없다는 걸 전날 밤 10시 30분에 알게 돼도, 눈을 뜨고 현관문을 열면 집 앞에 우유가 도착해있다. 얼굴을 볼 일 없는 누군가 주문에 맞춰 밤을 달려 왔기 때문이다. 어느 새벽배송 기사는 새벽 4시 배송을 하던 중 아파트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몰라서 잠든 경비원을 깨워야 했다고 한다. 고객을 깨우지 않고 문 앞에 놓아 두는 게 원칙이기 때문이다.

재활용품 수거처럼, 배송기사를 만나기 어려운 새벽배송도 생활의 한 시스템이 되어간다. 내놓은 재활용품을 가져간 '보이지 않는 손'을 떠올렸다. 그 덕에 쓰레기 더미에서 살지 않으니 감사하다. 밤에 주문한 식료품을 다음날 아침 편하게 맛볼 수 있는 세상. 문 앞을 지나간 그를 만나지 않는다 해도 그의 노고에 눈을 감을 수는 없는 일이다. 나의 편함은 언제나 남의 수고로움에서 나온다.
박새롬 기자 ono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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