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비밀스러운 삶

  • 오피니언
  • 편집국에서

[편집국에서]비밀스러운 삶

  • 승인 2020-02-20 00:01
  • 신문게재 2020-02-21 22면
  • 박솔이 기자박솔이 기자
편집국에서 바탕사진
남편은 그날따라 불안해했고 웬일인지 오랜 친구들과 모임을 빨리 벗어나고 싶어 했다. 식탁 위에 올려둔 핸드폰이 울리면 눈치 보기 바빴다. '한 놈만 걸려라' 눈빛으로 모여 앉은 6명은 남편 핸드폰이 울리자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네 입술이 그리워'. 문자 보낸 이가 누구냐 소리쳐도 그저 친구들만 보며 SOS 요청만 하고 있다. 내가 담배를 입에 물자 아이 아빠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렸다. 오늘 밤, 애 셋 딸린 엄마가 아닌 한 남자의 여자로 보이려 머리도 하고 속옷도 야시시한 색으로 입었는데. 내 남편은 이미 다른 남자의 애인이었다.

최근 다시 보게 된 영화 '완벽한 타인'의 수현(염정아)-태수(유해진) 부부 이야기다. 매년 시골 동창들과 모여 부부 내외끼리 함께했던 식사자리. 코흘리개 시절부터 애 딸린 부모가 될 때까지 34년 동안 모르는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행여 식탁 중앙에 모아 둔 스마트 폰이 울릴까 애간장 타던 얼굴들. '다음은 너야'라며 완벽하게 숨겨놓은 다른 나를 끄집어냈던 그 물건이 총처럼 느껴진 건 과한 표현이 아닐지 모른다.



영화는 끝날 무렵 묵직한 메시지를 던졌다. '사람들은 모두 3가지 삶을 산다. 공적인 삶, 사적인 삶, 비밀스러운 삶…'. 애 엄마 수현, 새싹 문예가 수현, 그리고 유부남과 은밀히 연락을 주고받는 수현. 역할은 다를지 몰라도 모두 수현이다. 남편 태수 역시 그렇다. 변호사 태수, 게이인 친구 핸드폰과 바뀌어 졸지에 게이가 된 태수, 그리고 13살 많은 여자와 매일 밤 10시 몰래 연락하는 태수. 어떤 상황에 처해도 모두 태수의 삶이다.

수현은 태수의 비밀스러운 삶을 거부했다. 차라리 여자를 좋아하지라고. 태수 역시 수현의 비밀스러운 삶에 핏대를 세웠다. 어떤 속옷을 입고 있냐며 흥분하는 유부남을 상상하느니 옆에서 시답지 않은 시 낭송이나 듣는 게 낫겠다고 말이다.



내 사람들의 비밀스러운 삶을 알게 되더라도 나는 그들을 포용할 수 있을까. 수현과 태수처럼 서로를 거부하고 상처 줬을지 모른다. 받아들일 수 없을지 모른다. 잘못 된 길이라며 다그칠지 모른다. 하지만 그 사람의 비밀스러운 베일을 한 꺼풀 벗겨냈을 때 내 눈에는 '편견'이 두껍게 덮인다. 한 번 덮이면 뗄 수도 없게.

나 역시 비밀스러운 삶을 살고 있으면서 더럽다, 이상하다, 저럴 줄 알았다며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 영화 '완벽한 타인' 속 7명처럼 서로를 향해 서슴없이 폭언부터 날린다.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 해졌을 때 비로소 빈껍데기만 남았을 뿐이다.

오늘 나의 삶은 어땠을까. 남의 비밀스러운 삶을 벗겨내기 위해 나를 더 완벽한 타인으로 만들어 숨진 않았을까. 거울이 무서워지는 날이다.

박솔이 편집2국 기자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아산시 '곡교천 탕정지구 연계사업' 밑그림 그려졌다"
  2. "방문 환경 개선" 양산 천성산 미타암, 새 공양간 건립공사 준공
  3. 주말 사우나에 쓰러진 60대 시민 심폐소생술 대전경찰관 '화제'
  4. 대전 교사들 한국원자력연 방문, 원자력 이해 UP
  5. 낮고 낡아 위험했던 대전버드내초 울타리 교체 완료 "선제 대응"
  1. 대전우리병원, 척추내시경술 국제 교육 스파인워커아카데미 업무협약
  2. 가톨릭대 대전성모병원, 심장­호흡재활센터 개소
  3. 유등교 중고 복공판 사용 형사고발로 이어져…안전성 이슈 재점화
  4. [라이즈 현안 점검] 대학 졸업자 지역 취업 증가 목표…실현 가능할까?
  5. 충남대병원 안순기 예방관리센터장 보건복지부장관상 수상

헤드라인 뉴스


[기획] 철도가 바꾸는 생활지도… 2030년대 충청 `30분 생활권`

[기획] 철도가 바꾸는 생활지도… 2030년대 충청 '30분 생활권'

충청권 광역철도 1단계, 대전~옥천 연장, CTX(광역급행철도)가 2030년대 중반까지 순차적으로 개통될 경우, 대전·세종·충북을 오가는 시민들의 생활권은 지금과 크게 달라질 전망이다. 가장 큰 변화는 이동시간 단축이다. 현재 대전 도심에서 세종 정부청사까지는 교통 상황에 따라 40~50분이 걸리지만, CTX와 광역철도가 연결되면 통근 시간은 20~30분대로 줄어든다. 세종 근무자의 대전 거주, 혹은 대전 근무자의 세종 거주가 현실적인 선택지가 된다. 특히 출퇴근 시간대 교통체증에 따른 불확실성이 줄어들면서, 젊은 직장인과 공무원의..

[기획]2028년 교통 혁신 도시철도2호선 트램 완성으로
[기획]2028년 교통 혁신 도시철도2호선 트램 완성으로

2028년이면 대전은 도시철도 2호선 트램 완공과 함께 교통 혁신을 통해 세계적으로 지속 가능한 미래 도시로 성장할 전망이다. 11일 대전시에 따르면 대전 도시철도 2호선 트램 사업은 지난해 12월 착공식을 개최하고, 현재 본선 전구간(14개 공구)에서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2027년까지 주요 구조물(지하차도, 교량 등) 및 도상콘크리트 시공을 완료하고, 2028년 상반기 중 궤도 부설 및 시스템(전기·신호·통신) 공사를 하고, 하반기에 철도종합시험 운행을 통해 개통한다는 계획이다. 최근에는 내년 대전시 정부 예산안에 공사비로 1..

美 연준, 기준금리 0.25%포인트 인하…원·달러 환율 향방은?
美 연준, 기준금리 0.25%포인트 인하…원·달러 환율 향방은?

미국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Fed)가 10일(현지시간) 고용 둔화 등을 고려해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하했다. 이로 인해 한미 간 금리 차이가 줄어들면서, 최근 1500원대를 위협했던 원·달러 환율에 숨통이 트일 것이란 기대가 나온다. 연준은 이날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 뒤 기준금리를 기존 3.75∼4.00%에서 3.50∼3.75%로 내렸다. 이는 올해 9월과 10월에 이은 3번 연속 금리 인하다. 연준의 이번 결정으로 한국(2.50%)과 미국 사이의 금리차는 상단 기준 1.25%포인트로 좁혀졌다. 파월 의장은..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트램 2호선 공사현장 방문한 이장우 대전시장 트램 2호선 공사현장 방문한 이장우 대전시장

  • ‘자전거 안장 젖지 않게’ ‘자전거 안장 젖지 않게’

  • ‘병오년(丙午年) 달력이랍니다’ ‘병오년(丙午年) 달력이랍니다’

  • 풍성한 연말 공연 풍성한 연말 공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