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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이 트럭에 치이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수술을 받고 생명은 건졌으나 뇌를 많이 다쳐 걷는 것도 불편했고 갑작스런 경기를 자주 일으켰다. 그때마다 아이의 부모는 금산 집에서 대전의 대학병원 응급실로 달려갔고 응급실에서는 아이에게 주사를 놓기 위한 혈관을 찾느라 애를 먹었다. 응급실 인력이 매번 바뀌니 아이의 혈관을 매번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기가 주로 밤에 일어나다보니 아이 엄마는 아이 옆에서 새우잠을 자야 했다. 밤중에 경기를 하면 알아채기 위해서였다.
그 때 아이의 딱한 사연을 듣게 된 금산의 소아과병원 원장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아이가 경기를 하면 언제든 연락하고 병원으로 찾아오라”는 것. 같은 금산이라 아이의 집에서 병원이 가까울 뿐만 아니라 아이의 혈관 부위를 알고 있어 매번 혈관을 찾느라 진땀을 흘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아이 엄마는 아이가 경기를 하면 그 병원으로 전화를 했고 한밤중에도 그 원장은 아이를 위해 병원으로 나왔다. 경기가 자주 일어날 때는 한달에 두 번씩 한밤중에 찾아오기도 했지만 10년이 넘도록 의사는 기꺼이 아이의 주치의 역할을 했고 이제 아이는 어엿한 고등학생으로 자랐다.
환자 아이를 위해 10년을 한결같이 야간응급실 역할을 해준 주인공이 바로 김호택 연세소아과병원장(59·삼남제약 대표이사)이다. 김 원장에게 세상은 아픈 이들을 보듬는 '또 하나의 진료실'이다. 병원이 '의술'로 환자를 보듬는 공간이라면, 병원 밖 세상에서는 '나눔'으로 어려운 이들을 보듬고 있기 때문이다.
1억원 이상 고액기부자 모임인 아너소사이어티의 금산지역 제1호 회원(충남 11호·전국 552호)이자 전 국제로타리 3680지구 총재로 '초아의 봉사'의 삶을 실천하고 있는 김 원장을 지난 2일 금산 연세소아과병원에서 만나 아너소사이어티를 통한 나눔과 삶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편집자 주>
#문은수 회장 권유로 아너 소사이어티 가입
-아너소사이어티에 가입하게 된 동기가 있으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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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칭찬에 열 올리는 착한 남자
-인터뷰하면서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보다 남의 칭찬을 많이 하는 분을 만나는 일도 흔치 않은데요(웃음).
“문 병원장을 보면, 자신이 맡은 일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해내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습니다. 문 병원장의 권유로 저도 아너소사이어티에 가입했고 그 덕분에 적지 않은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 점에서 기부와 나눔은 '권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평소 좋은 생각을 갖고 있어도 선뜻 실천에 옮기기가 쉽지 않거든요. 누군가가 좋은 이야기를 하고 권유해서 같이 좋은 길로 가게 하는 일, 요즘말로 하면 '쿡 찌르기'가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저도 금산에서 세 분을 쿡 찔렀는데(웃음) “언젠가는 하겠다”고 하십니다. '나눔'이라는 의미있는 길을 함께 가는 분들이 새해에는 더욱 늘어나길 기대해봅니다.”
#나눔문화 확산 도움 될수 있어 보람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에 가입하고 난 뒤 느끼신 보람이있다면.
“솔직히 가입 전에는 부담도 있었습니다. 1억원을 한꺼번에 내려면 부담스러울 수 있었는데, 나눠내도 된다고 하기에 언제 빚 갚고 돈 남아돌 때가 있겠는가 싶어서 결행을 하게 됐습니다. 아내(중부대 영문과 양현미 교수) 역시 흔쾌히 동의해줘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막상 가입하고 나니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분들이 칭찬도 해주고 격려도 해주십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이 언젠가는 하려고 했던 것을 먼저 했다고 부러움 반, 질시 반의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제가 아너소사이어티에 가입함으로써 다른 분들에게도 나눔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면 보람이지요.”
#기부금 모교병원 환자와 고향 장학재단에
-아너소사이어티에 가입하면서 내신 기부금은 어떻게 쓰였는지요.
“지정기탁이 가능하다고 해서 기부금의 반은 모교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을 위해, 나머지 반은 금산 지역을 위해 쓰일 수 있도록 했습니다. 특히 세브란스병원 환자 중에서 치료비를 내기 어려운 형편의 분들을 돕는데 쓰였고, 나머지 반은 금산군이 주도해서 만든 금산사랑장학재단을 통해 지역의 인재를 위해 쓰여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장학회 세운 부친따라 지역서 나눔봉사
-의사로서 인술을 펼치시면서 지역사회를 위해 나눔 봉사를 하게 된데는 부친(김순기 삼남제약 회장·95)의 영향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부친께서는 장학회를 세우셨지요.
“아버님은 60년 전 모교인 제원초등학교를 위해 삼남장학회를 만드셨습니다. '영남, 호남, 충청의 삼남을 아우르는 회사를 만들겠다(인재가 되라)'는 의지로 삼남제약을 설립하셨고, 그 뜻을 후학들이 이어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정한 것입니다. 당시 50만원의 장학기금을 냈고 해마다 5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는데 중학생 몇 명의 학비와 학용품, 교복까지 마련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고 합니다. 세월이 흘러 화폐가치가 떨어지면서 이자로는 장학금을 감당할 수 없게 되어 사비로 장학금을 지원해 오셨는데 나이 드시면서 삼남장학회는 자연 소멸되고 말았다고 합니다.
제 부친은 없는 길을 만들어 오신 분입니다. 이리농림학교와 일본약전 졸업 후 취직한 산쿄제약에서도 창의적인 발상으로 개발부 전체의 큰 숙제 하나를 풀어내셨다고 합니다. 동료로 함께 근무하던 민관식 전 장관께서 '나와 같이 제약회사를 만들어 보자'며 개성까지 데려가신 적이 있을 정도로 창의적이고 진취적이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해방이 되면서 대전에 약국을 개업하셨고 6·25전쟁을 맞으면서 금산으로 약국을 옮기셨지요. 당시 시중에 돌아다니는 백반, 중조 등의 군사용 원료들을 사들여 미군이 갖고 들어온 '암포젤'과 같은 제품을 만들어 토마토케첩 병에 담아 '아루미나겔'이라는 이름으로 판매하셨다고 할 정도로 길을 만들어가며 사신 분입니다.
제 어머니는 이런 아버지를 뒷바라지하고 7남매를 훌륭히 키우시면서 '우리 부부가 너희 7남매를 모두 대학까지 서울에서 가르칠 수 있었던 것은 금산사람들이 삼남약국 약을 사주고, 삼남제약을 사랑해준 덕분이다. 잊지 말아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저는 '금산에 빚이 있다'는 생각을 품고 살았습니다. 이제 빚을 다 갚았는지, 아직도 남아있는지를 어머니 무덤을 찾을 때 가끔 여쭤보곤 하지요. 직업적으로도 저는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너는 손이 따뜻하니 의사가 맞는 직업인 것 같다'는 말씀을 수시로 하셨지요.
저는 당연히 의사가 되어야 하는 줄 알고 자랐고, 아무 생각 없이 의대에 진학했지요. 그리고 이것이 제 천직이라는 것을 수도 없이 많이 느끼고 부모님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괜찮은 의사였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원이 없을 겁니다.”
#부친은 금산 유일 삼남약국·삼남제약 설립자
-부친께서는 금산 유일의 약국을 경영하신 분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데요.
“아버지께서는 6·25전쟁의 와중인 1951년 금산군 내 최초의 약국인 삼남약국과 삼남제약을 세우셨습니다. 삼남제약은 아버지께서 일제 말기에 일본약학전문학교를 졸업하시고, 일본 산쿄(三共)제약 개발부에서 익힌 경험을 바탕으로 창업하신 기업입니다. 보건복지부에 원료의약품 생산 1호 업체로 등록되어 있고, 금산 최초의 본격적인 기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90여 평생을 제약과 인삼연구를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이제 65주년을 맞는 삼남제약은 한때 어려움도 겪었지만 내부적으로 내실경영을 해 왔습니다. 마그밀, 게루삼, 카라드라민, 제파논 등의 제품들은 모두 50여년의 역사를 지난 장수제품들입니다. 창립 70주년이 되는 2021년에는 강소기업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해보겠습니다.”
#태어나고 자란 고향에 각별한 관심
-평소 사회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계신데요. 혹시 정치 쪽으로 생각은 없으신지요.
“정치 쪽,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지역 현안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금산이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릴 적에는 금산에 대해 고향이라고 할만한 별다른 감정이 많지 않았습니다. 어려서 서울로 유학을 가서 사춘기와 학창시절을 모두 서울에서 보낸 뒤 1991년 서울의 강서병원에서 소아과 과장으로 일하고 있던 시절, 아버지의 강력한 호출로 금산으로 내려오게 된겁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외로우셨던거죠. 연세 드시면서 삼남제약 운영도 물려주고 싶어하셨어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금산에 내려와 연세소아과병원을 세우게 됐습니다. 금산 최초의 소아과병원이었죠. 고향에 와서 살다보니 정도 들고, 지역을 위해서 나름 봉사할 수 있는 일들이 생겼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지식과 능력이 제 고향 발전에 작은 도움이라도 될 수 있다면 제가 할 일은 하겠다는 생각뿐입니다. 그것을 제 명예나 영달을 위해 이용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보람된 일을 하면서 조금씩 늙어가려 합니다. ”
#아직도 갚아야 할 인연의 빚 많아
-양띠해 새해가 밝았는데 올해 활동 계획이 있다면.
“동기생인 이병석 전 박근혜대통령 주치의가 연세의대 학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제 큰 딸아이가 인턴 재직 중 산부인과 근무할 때 당시 강남세브란스병원 원장이던 이병석 학장을 알게 된 인연으로 제 큰 딸 민정이의 주례를 서주셨지요. 학장 취임을 축하하러 찾아간 자리에서 의대 기숙사를 건립하는데 자금 문제로 어려움이 있다고 하기에 건립 기금으로 조금씩 기부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살면서 그동안 맺은 인연들에 대한 은혜의 빚을 조금이라도 갚기 위해 앞으로도 기회와 능력이 닿는대로 노력하려 합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는 벌여 놓은 일들이 많아 아직도 갚아야 할 빚이 있고, 여러 방면으로 해야 하고 도와야 할 일들이 많아 마음 같이 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 마음의 부담이 됩니다.”
나이를 먹는 일은, 칠을 더할수록 빛을 발하는 옻칠과 같아야 하고, 해를 더할수록 울창해지는 나무와 같아야 한다고 한다. 옻칠처럼 나무처럼 세월을 더하는 연륜 속에 지역과 이웃을 위해 묵묵히 나눔을 실천하는 김 원장의 새해 행보를 기대해본다.
대담=한성일 취재3부장(부국장)·정리=김의화·사진=이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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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일 취재3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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