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사자성어] 95. 궁여지책(窮餘之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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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사자성어] 95. 궁여지책(窮餘之策)

주정뱅이 아들의 어떤 승리

  • 승인 2016-09-08 01:00
  • 홍경석홍경석
암울한 어둠이 걷히고 다시금 아침이 찾아왔다. 밝은 햇살을 앞세우며 천지를 장악해나가는 아침이었지만 내 맘은 여전히 어둠에 휩싸였다. 술이 덜 깬 아버지를 두고 학교로 가는 발걸음은 천근만근이었다.

공부 또한 제대로 될 리 없었다. 그날따라 수업이 일찍 끝났다. 하지만 집에 일찍 돌아가고픈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누구처럼 아들을 반기는 엄마도, 멀쩡한 정신으로 맞이하는 아버지 역시 부재한 때문이었다.

학교를 나와 만화방으로 가 시간을 탕진했다. 어둠이 진주할 무렵에야 집으로 들어섰다. 슬몃슬몃 불안해했던 아버지의 술심부름이 다시 또 기다리고 있었다. 냄새만 맡아도 징그러운 소주 냄새……. ‘난 이담에 어른이 되면 죽어도 술을 안 먹을 테여!’

하지만 부전자전은 속일 수 없는 숙명이던가. 어제도 나는 소주를 세 병이나 비웠다. 초등학교 6학년 동안 단 한 번도 친구 내지 급우 역시도 내 집에 데려오지 못했다. 제아무리 너나들이(서로 ‘너’, ‘나’ 하고 부르며 터놓고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하는 친구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 홍경석 <경비원 홍키호테> 저자 & <월간 오늘의 한국> 대전·충청 취재본부장
▲ 홍경석 <경비원 홍키호테> 저자 & <월간 오늘의 한국> 대전·충청 취재본부장


그건 ‘내 집’이 없는 때문이었다.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 그것도 달랑 하나뿐인 셋방에서 부자가 부대끼며 사는 상황이었으니 왜 그러했겠는가. 그런 환경을 제공한, 아니 고수하는 ‘주정뱅이’ 아버지가 부끄러워서라도 친구들의 접근은 당연히 막고 볼 일이었다.

잠시의 잠포록이 평화는 무시로 깨지는 거울이었다. 특히나 자정 임박 무렵의 아버지 술심부름은 여전한 고통이었다. 통행금지에 걸려 경찰서까지 끌려간 적도 있었거늘 아버지는 그 심부름을 여전히 강권하셨다.

돈도 안 주면서 시키는 그 심부름이 죽기보다 싫어서 도망 잠을 무시로 감행했다. 남의 집 마루 밑과 심지어는 밭에도 들어가서 억지로 괭이잠을 청했다. 그러노라면 얼굴도 알 수 없는 엄마가 포근한 이불로 다가와 덮어주셨다.

현실이 그토록 절박하다보니 심성도 콘크리트처럼 굳었는지 좋은 말을 듣고도 기뻐할 줄 모르며 언짢은 말을 들어도 성낼 줄 모르는 사람을 이르는 말인 ‘물신선’으로 바뀌어갔다. 그러면서도 장차 내 아이들만큼은 반드시 그리 키우지 않으리라 이를 악물었다.

세월은 태풍보다 빨라 나도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돈도 없고 능력도 없었지만 궁여지책(窮餘之策)만큼은 있었다. 돈이 드는 사교육 대신 전날 신문의 알짜배기 내용 스크랩과 아울러 주말이면 함께 도서관을 다니는 걸로 상쇄했다.

덕분에 두 아이 모두 원하는 대학에 철썩 붙었다, 지난 달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신임 당 대표에 오른 추미애 의원은 스스로를 '추다르크' 또는 '세탁소 집 둘째 딸'로 표현한다고 했다.

1958년 대구의 한 세탁소에서 둘째 딸로 태어난 그녀는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떠나 외가에서 자랐다고 한다. 지독한 가난을 겪었고, 약자에게 힘이 되기 위해 법관의 길을 걷기로 결정한 뒤 사법고시를 통과해 판사가 된다.

판사의 길을 걷던 중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발탁에 의해 정치 무대에 데뷔한다. 이런 걸 보면 가난은 결코 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가난으로 치자면 둘째가라면 서운한 사람이 바로 나다. 하지만 용의주도하고 끈질겼던 궁여지책 덕분에 ‘자식농사’에 성공했다.

어제는 내 책을 읽은 독자라면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가난과 고난을 탓하지 않고 꿋꿋이 싸워 이긴 인간승리에 감탄했다고 했다. 쑥스러웠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래, 따지고 보면 나 또한 ‘주정뱅이 아들의 어떤 승리’였다.

이 칼럼과는 별도로 내가 참여하고 있는 모 언론사에 쓴 칼럼이 실린 월간지가 오늘 도착했다. 새삼 나 자신을 되돌아본다. 고착 조촐 학력 출신이 언감생심 논설위원이라고? 그러나 사실이다.

이는 30년에 가까운 독서와 10년을 넘긴 치열한 습작이 담보된 때문이다. 올 수능이 두 달 여 앞으로 다가왔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했다. 다양한 궁여지책을 동원하면 자신이 원하는 대학으로의 입성 또한 결코 어려운 게 아니다.

끝으로, ‘승리’ 얘기가 나온 김에 부언한다. 따지고 보면 승리나 성공이나 도긴개긴이다. 내가 추구코자 하는 그 두 가지의 핵심은 ‘가화만사성’이다. 아울러 그 기조의 오롯한 정립과 함께 연탄난로처럼 훈훈한 가족애의 불변이 소망이다.

홍경석 / <경비원 홍키호테> 저자 & <월간 오늘의 한국> 대전·충청 취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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