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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충식 논설실장 |
최순실 게이트는 어떤 측면에서 워터게이트 사건과 자주 겹쳐진다.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퇴진은 도청으로 촉발됐지만 수사 방해와 거짓말이 진짜 이유였다. 훗날 닉슨은 TV 회견에서 “위선은 정치의 일부”라며 자멸적인 거짓말 없애기에 나섰다. “대통령 후보자라면 위장할 필요가 있다”며 대놓고 거짓말을 옹호하기도 했다.
우리 대선 주자들이 잘못 들으면 펄쩍 뛰며 반길 소리다. 닉슨은 더 결정적인 훈수를 곁들인다. “일국의 대통령이 스스로 믿지 않는 바를 얘기하더라도 반드시 비도덕적 의미에서 거짓말하는 것은 아니다.” 국민이 대통령에게 원하는 수준은 칸트의 엄격한 진실은 물론 아닐 것이다. 칸트 식으로는 “내 죽음을 알리지 마라”도 잘못된 거짓말이다. 부하에게 가언 명령(假言命令)으로 행동을 강요한다고 봤기에 여지가 없다.
플라톤은 이와 달랐다. 국익을 위해 적이나 시민들에게 거짓말이 허용된다는 소크라테스를 동원해 통치자의 거짓말을 이상국가 실현의 덕목으로 쳐줬다. 통치자는 거짓말 면허증 소지자였다. 정의에 관한 국가 최선자라는 전제에서였다. 우리 경우에 적용한다면 정의에서 우러난 고상한 거짓말, 국가의 단일성을 좇는 거짓말이라는 믿음을 갖기는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다.
내친김에 이보다 실용적인 마키아벨리의 거짓말 접근법까지 들여다본다. 피통치자는 사악하고 변덕스럽다. 여기에 맞설 무기로서 거짓말을 정당화한다. 백 걸음 양보해서 가장 모범적인 거짓말이 통치 능력이라 해도 현명함과 공익을 전제로 했다.
어느 단계까지는 그런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안철수 현상'이나 '안희정 현상'처럼 한때 있었던 '박근혜 현상'도 그랬다. 동명의 책에서 '정치공학, 권력욕, 특권층'과 '거짓말'을 박근혜 진정성 정치의 대립물로 꼽은 적이 있다. 탄핵 정국에서 강경한 보수 정체성을 세워 정치 입문에 성공했다는 서술은 지금 읽으면 실소를 자아낸다. 어느 부분도 더 이상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 자신이 보수 정체성을 철저히 망가뜨렸고 자신이 국정농단의 몸통임을 입증하는 세 트럭분 수사 자료에 대고 “음모이고 거짓말”이라며 거짓말 게임의 선두 역할을 탄핵 끝판까지 주도해 왔다. 개념 없고 품위 없는 거짓말에서 국민은 절망과 슬픔을 맛보았다. 이성이 완전히 문을 닫고 자기기만이 반복되면 정상이 비정상으로 보이는 법이다. 가슴 아프지만 여러 각도로 연구 자료가 될 것 같다.
실제로 대통령의 거짓말은 좋은 연구 대상이었다. 국내 출판 서적만 대충 봐도 '미국 대통령의 거짓말'(이시자와 야스하루), '왜 대통령들은 거짓말을 하는가'(하워드 진), '섹스, 거짓말, 그리고 대통령'(래리 플린트, 데이비드 아이젠바흐) 등이 있다. 선의나 악의를 가리지 않고 국민 개개인의 삶에 구체적인 영향을 미치는 대통령의 거짓말은 부작용이 치명적이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거짓말이 보편적인 법칙일 수는 없다. '사실, 거의 사실, 사실과 거짓, 거의 거짓, 거짓' 중 오른쪽에 가깝다고 믿는 다수 국민에게 '거짓말 면허증'을 반납할 기회가 지금이다. 꽃샘추위 지나 봄이 시간의 속살을 드러내려는 이때, 불관용과 편협함의 옷을 훌훌 벗고 한 번이라도 진실의 속살을 보여준다면 좋겠다. 너무 늦었지만 그것이 그나마 최소한의 도리 아닐까 싶다.
최충식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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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식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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