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충식 문화칼럼] 번역, 부정한 미녀와 정숙한 추녀

  • 오피니언
  • 문화칼럼

[최충식 문화칼럼] 번역, 부정한 미녀와 정숙한 추녀

  • 승인 2017-07-12 11:33
  • 신문게재 2017-07-13 22면
  • 최충식 논설실장최충식 논설실장
▲ 최충식 논설실장
▲ 최충식 논설실장
사전을 들척거리다 보면 이상한 부분이 하나둘 아니다. '부정(不貞)하다'는 '부부가 서로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다'로 풀이된다. 부정을 이렇게 부부에만 한정한다. 또한 '정숙(貞淑)하다'는 '여자로서 행실이 곧고 마음씨가 맑고 곱다'로 되어 있다. 왜 '여자로서'야? 의문을 뒤로 하고, 오늘 본론은 번역·통역 얘기다.

번역가들 세계에선 '부정한 미녀냐 정숙한 추녀냐'는 잘 알려진 기준이다. 이런 예가 있다. 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이 일본군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낸다. 당시 일본 총리 스즈키는 이에 “우리 할 일은 그 통첩을 모쿠사츠(もくさつ)하는 것”이라고 했다. '할 말 없음', '노코멘트' 정도의 쓰임이었다. 만약 모쿠사츠가 경멸이 보태진 '묵살'로 보도되지 않았으면 원폭 투하는 피할 수도 있었다.

더 부질없는 기억을 더듬어보자. 최초의 조선과 미국 간 교섭은 '무시'로 시작된다. 왜 그랬는지는 1882년 조미(한미)수호조약 전의 김윤식이 설명한다. 이홍장에게 김윤식은 “외교가 없었으니 어찌 서양말과 글을 해독하는 자가 있으리오”라고 했다. 조선과 미국의 협상에 중국과 미국이 얼굴을 맞댔다. 중국어 통역과 필담으로 일부 의견을 조율했지만 미국과는 입 한번 뻥긋 못해보고 국제질서 속에 편입된 셈이다.


한문 실력은 득이 아닌 독이 됐다. 조약 제1조의 '필수상조(必須相助)'를 미국이 모름지기 도와주겠다는 약속으로 철석같이 믿었다. 서양말은 '왜가리가 시끄럽게 지절거리는 것' 같고 글씨는 '헝클어진 실 모양' 같다던 조선왕조실록에 아직 머물고 있었다. 그때에 비해 지금은 천지개벽이다. 영어 실력이 비영어권 국가 60개국 중 24위로 매겨지지도 하지만 가끔씩 결정적인 실수가 등장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정문도 오역이 넘쳐난다. 우체국 근무 공익요원이 군복무자, 공무원시험이 성인 의무시험, 시내버스가 시외버스로 바뀐 사례도 있었다.

모두 국격과 국익을 해치는 일이다. 프린스(prince)가 마키아벨리에서는 군주, 영화 '벤허'에서 족장, 유럽에선 귀족으로도 쓰인다. 작은 왕국의 지존인 대공(大公)도 프린스다. 이런 다중적 의미를 놓치고 '왕자'로 쓰고 본다. 대개 원문에 충실하면 정숙함으로, 어긋나면 부정함으로, 정돈된 문장은 미녀, 그렇지 않은 문장은 추녀라고 간주한다. 정숙한 미녀, 부정한 미녀, 정숙한 추녀, 부정한 추녀의 네 조합이 이래서 탄생한다.

대화를 하다 보면 부정한 추녀라도 어물쩍 넘어가줘야 할 일이 꼭 있다. “내가 투르에서 깊이 사랑한 여자가 떠오른다. 아름답지만 부정한 여인이었다.” 유려하지만 충실하지 않은 번역을 언어학자 질 메나주는 이처럼 솔직하게(?) 서술한다. 사교적 자리에선 직역의 정확함보다 의역의 미려함을 일부러 좇을 수도 있다. 국제관계라면 조르주 무냉의 채색 유리와 투명 유리 사이에서 고뇌할 일이 자주 생긴다.

지나친 정숙은 이 경우 죄(罪)일 수 있다. 그런데 미추 관계없이 또 다른 걸림돌이 우리 앞을 가로막는다. 바로 특수외국어 문제다. 가령 라오스 대통령과 회담한다면 라오스어, 영어, 한국어 순으로 거듭 통번역을 한다. 아랍어, 히브리어, 힌디어, 세르비아어 등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제1순위로 사라지는 해당 외국어학과와 함께 사라진다. 이것이 대학 구조조정의 실상이다.

이래서는 안 된다. 필자는 미래를 예측하는 힘인 TQ(Trend Quotient·트렌드지수)의 변수 하나로 언어소통을 꼽는다. 굳이 '미추'나 '정절'의 문제만은 아니다. 을사늑약에 이르기까지 조선이 맺은 조약들은 온통 미사여구 범벅이었다. 영어권에서 아랍어를 중시했으면 9·11 테러가 안 일어났다는 가정법을 다시 끄집어낸다. 소수 특수외국어 인력 양성을 국정과제에 포함시키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는 이유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세종 명학산단, 삼성 8조 투자 본격화…"물 늘리고 땅 넓히고"
  2. 대전 서대전육교서 오토바이 교명주 충돌… 40대 운전자 숨져
  3. 서산 해미읍성의 가을, 전국 가수들의 열창으로 물들였다
  4. 갤러리아 타임월드 매각된다?... 지역 유통업계 '술렁'
  5. 경영악화로 폐업하는 대전서남부터미널
  1. 조합이냐 신탁이냐… 정비사업 어떤 방식이 좋을까?
  2. 더블유렌트카, '2026 예당호 모터 페스티벌' 성료
  3. "김 원초 광천산 아니어도 '광천김'" 대법, 지역서 쌓은 명성 인정
  4. [사설] 이 대통령 지지율 하락은 '민심의 경고'
  5. 미래대응기금 교부세 축소 불안 대전 자치구까지 확산

헤드라인 뉴스


추석 차례상 어디서 장볼까… 시장이 마트보다 8만원 저렴

추석 차례상 어디서 장볼까… 시장이 마트보다 8만원 저렴

추석을 앞두고 차례상 준비 비용을 아끼려면 전통시장이 가장 유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형마트는 물론 온라인플랫폼과 비교해도 전통시장의 가격 경쟁력이 두드러졌다. 15일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에 따르면 9월 첫째 주 전통시장과 대형마트, 온라인플랫폼의 추석 제수용품 28개 품목 가격을 비교한 결과, 4인 기준 차례상 비용은 전통시장이 평균 35만 2553원으로 가장 저렴했다. 대형마트는 43만 2062원, 온라인플랫폼은 37만 367원으로 전통시장보다 각각 7만 9509원(18.4%), 1만 7814원(4.8%) 높았다. 품목별 가격 차..

김민석 첫 대전 방문…민주당 `원팀` 대전 현안 해결 나서야
김민석 첫 대전 방문…민주당 '원팀' 대전 현안 해결 나서야

더불어민주당 김민석 대표가 16일 내전(來田) 하는 가운데 산적한 지역 현안 해결사 역할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대전시장과 지역 국회의원 7명 모두 민주당 소속으로 집권여당을 전폭 지지해 준 지역 민심에 보답하는 김 대표의 통 큰 정치를 바라는 것이다. 그의 이번 방문으로 대전시가 이재명 정부 집권 중반 신 성장엔진으로 도약하기 위한 당 차원의 전폭 지원을 견인하는 변곡점이 돼야 한다는 여론이다. 더불어민주당 대전시당에 따르면 김 대표는 16일 대전시청을 찾아 현장 최고위원회의를 주재한 뒤 대전시와 예산정책협의회를 갖는다...

이 대통령 `연임하지 않겠다`는 명확한 입장 밝힐까…추석 앞둔 18일 대국민 기자회견
이 대통령 '연임하지 않겠다'는 명확한 입장 밝힐까…추석 앞둔 18일 대국민 기자회견

이재명 대통령이 추석을 앞둔 18일 오전 청와대 영빈관에서 대국민 기자회견을 연다. 취임 후 일곱 번째 회견으로,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 집권 후 지지율이 급락하는 상황에서 어떤 발언을 쏟아낼지 주목된다. 성기홍 청와대 홍보수석은 15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 기자회견장에서 브리핑을 열고 이 대통령의 기자회견 일정을 밝혔다. 민생·경제와 정치·외교·안보, 사회·문화·기타 등의 분야로 세분화하던 기존 기자회견과 달리 이번에는 정치·외교와 정책·경제 2개 분야에 대한 질의를 받는다. 모두발언과 질의응답, 마무리 발언까지 90분간 진행하겠다..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사랑의 송편 나눔’…명절 꾸러미 한가득 ‘사랑의 송편 나눔’…명절 꾸러미 한가득

  • 대전 동부소방서, 추석 앞 화재안전 점검 대전 동부소방서, 추석 앞 화재안전 점검

  • ‘대한민국의 情을 보냅니다’ ‘대한민국의 情을 보냅니다’

  • 경영악화로 폐업하는 대전서남부터미널 경영악화로 폐업하는 대전서남부터미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