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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순 변호사 실크로드에 가다
고려대 행정대학원은 친목을 주목적으로 1주일에 1회 유명강사를 초청해 강의를 듣는 최고위과정과 석사학위 취득을 목적으로 하는 석사과정을 개설해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오영재 행정대학원장님은 교우회장인 저에게 '최고위과정과 석사과정 사이에 중국문화, 특히 실크로드문화 연수과정을 개설하여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개인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아시아문화 최고위전문과정을 개설하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하였습니다.
평소 중국문화, 특히 북방 유목민족과 오아시스 문화, 흉노와 한민족의 관계에 대한 지적 호기심으로 충만해 있던 터라 흔쾌히 오 원장님의 제의에 동조하여 제1기 아시아문화 최고위전문과정 입학원서를 제출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2014년 9월 1일부터 2015년 6월 30일까지 1, 2학기로 나누어 30여 명의 동기생들과 함께 매주(목요일 오후 7시30분~9시) 1회 금쪽같은 강의를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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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교수, 강사들의 추천을 받아 '실크로드 위에 사는 사람들', '유목민의 입장에서 본 세계사', '실크로드의 악마들', '대월지', '흉노' 등의 책을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1년 동안 강사 섭외와 충실한 강의를 위해 수고해주신 오영재 원장님과 전반기 주임교수인 김효민 교수님, 2학기 주임교수인 주수완 교수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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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현장답사에 임하는 마음의 자세>
2015년 6월 초순 경 극심한 가뭄과 메르스의 창궐로 나라가 큰 혼란을 겪고 있었고, 해외여행 계획이 대부분 취소되고 있었습니다.
85세의 노모는 수시로 전화를 걸어 실크로드 답사를 그만둘 것을 압박하였고, 주위 사람들도 이에 동조하였습니다.
급기야는 실크로드 답사 신청을 하였던 최고위전문과정 동기들도 상당수가 답사 계획을 취소하였습니다.
큰 용기를 내어 7박 9일의 장기여행을 계획한 후에도 마음이 크게 흔들렸으나 '약속은 지킨다'라는 평상시의 마음가짐과 지적인 호기심에 힘입어 실크로드 답사를 강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후에 여행사 사장이 '10개 이상의 단체여행 계획이 취소되었음에도 고대만이 약속을 지켜주셨다, 역시 고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칭찬을 해주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의 결정이 나에게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지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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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항에서 신장자치구 주도 우르무치까지의 여행>
2015. 6. 13. 19:40경 인천공항에서 대한항공에 몸을 싣고 암흑 속으로 5시간 동안 비행하여 다음날 00:10 경 천산산맥 북측에 자리잡은 우르무치(위구르어로 '아름다운 초원의 도시')에 도착하여 미려화 호텔(5성급, 비수기로 저렴)에서 몸과 짐을 풀었습니다.
미지의 세계인 실크로드 답사라는 기대감으로 비행기 안에서 한 잠도 자지 못하였습니다.
빙그레여행사 이철희 사장(60)과 현지 조선족 가이드 박문학(40대 중반) 씨의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신장자치구가 한반도의 17배, 인구는 1억 정도 된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고, 중국은 성 1개가 나라라는 말을 실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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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 막고굴 등의 답사>
같은 해 6. 14. 05:00경 기상하여 버스로 공항으로 이동한 후 09:20경 비행기로 2시간 정도 비행하여 11:00경 돈황(위구르어로 '타오르는 횃불')공항에 도착하였습니다.
돈황은 실크로드(천산북로, 천산남로 일명 오아시스교역로)로 가는 관문으로 당나라 때까지 서역과의 교역을 통해 번영을 누렸던 오아시스 도시입니다.
일행은 버스를 이용하여 돈황으로부터 동남쪽으로 25km 떨어진 돈황막고굴로 갔습니다. 막고굴은 최고 높은 곳에 있는 굴이라는 의미입니다.
막고굴을 쳐다보니 나약한 인간이 어떻게 저런 거대한 석굴을 파서 아름다운 벽화를 만들었는지 감탄사가 절로 나오고 인간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대상(카라반)들은 무사히 타클라마칸 사막을 넘어갈 것을 기원하고, 넘어온 것에 대해 감사하기 위하여 1000여 년에 걸쳐 돈황 절벽에 석굴을 만들어 부처님을 모셨고, 현존하는 석굴은 492개입니다.
대상이나 그 지방 호족들은 개인 돈으로 석굴을 파서 개인 사찰을 만들면서 벽화에 가족들을 프레스코화법으로 단장하였고, 가족에 대한 부처님의 가호를 빌었고, 예외적으로만 일반인에게 개방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배계급은 내세에 가서라도 현재의 부귀영화를 계속적으로 누리고 싶었고, 나약한 인간이 어찌 할 수 없는 거대하고 거친 사막의 횡포를 부처님에 의지하여 극복하려고 애를 썼던 흔적이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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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에 있는 장경동에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되었고, 혜초는 바닷길로 천축국에 갔다가 서역북로(오아시스 북로)로 돌아와 신라로 돌아가지 않고 당나라에서 포교를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혜초는 생사를 넘나들며 실크로드를 횡단하면서 달밤에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를 읊었습니다.
- 달밤에 고향 길 바라보니, 뜬 구름 바람 따라 떠나는 구나
편지를 봉하여 구름 편에라도 부치려 하나, 바람이 너무 빨라 내 말 들으려 않네, 내 고향은 하늘 저 북쪽에 있고, 나 있는 타국은 서쪽 땅끝, 열대의 이 곳 남쪽에는 기러기도 없는데, 누가 내 고향 계림으로 이 소식 보내주리 -
명사산의 곱고 거대한 모래 언덕을 보고 사막의 신비스러움을 느꼈고, 사구 안의 월아천을 보고 자연의 기이함을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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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판 답사>
같은 해 6. 15. 17:32 경 돈황 근처 고비사막(고비는 몽골어로 '풀이 자라지 않는 거친 땅')에 외로이 서 있는 유원 역에서 4시간 동안 고속철도를 타고 투르판(위구르어로 '저지대', '파인 땅')으로 갔습니다.
고속철도 안은 우리 기차보다 넓었고, 편안하였으며 우아함을 느끼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중국은 고속철도 기술을 특화하여 전 세계에서 고속철도 수주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거친 사막지대에 유전이 있고, 하미 지역에서는 최고 품질의 수박이 생산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투르판에 도착하여 고속철도에서 내리자 습식사우나에 들어온 것처럼 고온 다습한 공기가 가슴을 답답하게 하였습니다.
투르판은 천산 산맥 동부의 남쪽 기슭에 있는 거대한 분지로, 해발 -300m의 저지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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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는 위구르인 소유의 식당에서 위구르 고유의상을 입은 남녀 젊은이들의 식전 공연을 본 후 어린 양 바비큐로 식사를 하였으나 EBS 세계테마기행에서 본 것보다 사실감은 떨어졌습니다.
투하석유호텔에서 숙식을 한 후 다음날 실크로드 왕국인 고창국의 유적인 고창도성을 답사하였습니다. 당태종 당시 고창도성의 인구가 1만을 넘었고, 고창왕국은 번성하여 실크로드 전역을 지배하였다고 합니다.
불심이 깊은 고창국의 왕 국씨는 특히 현장법사를 흠모하여 왕사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법사의 정중한 거절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법사와 의형제를 맺은 후 성대하게 법회를 열도록 주선하여 그 흔적이 곳곳에 있었고, 법사가 실크로드로 떠날 때에는 수많은 호위병과 평생 필요한 금은보화를 챙겨주었다고 합니다.
서유기에 나오는 손오공 등은 당시 국씨가 붙여준 호위무사들이 아니었나 생각이 듭니다. 법사는 귀국 도중 고창국이 당에 의해 멸망하면서 국씨가 사망하였다는 말을 듣고 조의를 표하지 않고 고창국을 우회하여 귀국하였다는 씁쓸한 이야기도 전해져 오고 있었습니다.
이어서 고창도성 부근에 있는 고창국 귀족들의 공동묘지인 '아스타나고분'을 답사하였습니다.
귀족들은 내세에도 현세의 부귀영화를 계속적으로 누리려는 생각에 묘실 벽화에 현세의 삶을 새겨넣었고, 내부에는 현세의 삶에 필요한 갖은 물건들을 넣어놓기도 하여 당대의 내세관을 추측해 볼 수 있었고, 인간의 아둔함에 허망함을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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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판에는 서유기에 나오는 화염산이 붉은 빛깔을 내면서 웅장하고 길게 서 있었습니다. 당시 중국사람들은 인간이 현세를 떠나 서역으로 간다고 믿었고, 현세와 서역의 경계에는 인간이 살아서 넘어갈 수 없도록 불로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그곳을 화염산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화염산은 당시 동북아시아인들의 사고의 한계 지역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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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투르판의 명물인 카레즈(페르시아어로 파서 물을 통하게 하는 시설을 이름)를 답사하였습니다. 투르판인들은 천산의 빙하 물줄기를 찾아낸 후 터널식 지하수로를 만들어 물을 끌어들임으로써 물산이 풍부한 오아시스 문화를 이루어냈습니다. 카레즈는 인간의 삶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재삼 느끼게 하였고, 이집트,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발견되지만 규모, 건축기술 면에서 투르판 카레즈가 세계 제일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었습니다.
이어서 흉노인들이 투르판을 지배하기 위해 세운 차사전국의 교하도성을 답사하였습니다. 교하도성은 하천을 사이에 둔 고지대에 자리 잡고 있고, 주택가가 미로이고, 주민들이 소단위로 조직되어 있어 적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있고, 간첩 색출이 용이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투르판의 포도는 당도가 엄청나게 높아 와인 제조용으로는 부적합하고, 포도를 말려 식용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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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판에서 우루무치 여행>
같은 날 투르판에서 우르무치까지는 버스로 이동하였습니다.
흉노족이 북방 초원에서 천산산맥 남쪽의 투르판 등 오아시스로 넘어가는 길은 오직 이 곳 한 길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그 옛날 흉노족은 따뜻한 남쪽 나라를 차지하기 위하여 이 곳을 경유하여 침공을 하였고, 오아시스 약소국은 한나라와 흉노 사이에서 곡예사의 줄다리 외교를 하였다고 하니 남의 일만은 아닌 듯하여 애잔하기까지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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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풍이 너무 세면 자동차의 운행이 중단되곤 한다니 바람의 세기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만 합니다.
그곳에는 막대한 희토류가 매장되어 있어 역설적으로 위구르족의 독립을 어렵게 한다고 하니 자원 부국이 꼭 삶에 유리한 것만은 아닌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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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산산맥, 타클라마칸의 위용>
같은 해 6. 17. 여행 5일 째 우루무치에서 08:50. 비행기에 몸을 싣고 카슈가르(일명 카스)로 이동하였습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천산산맥의 위용은 아름다운 한 폭의 산수화 같아 소담하기까지 하였고, 타클라마칸은 황무지 그 자체였으나 돌아올 수 없는 무시무시한 사막이 아니라 소꿉장난을 할 수 있는 모래밭 같았습니다.
타클라마칸이 위구르어로 '돌아올 수 없는 사막'이라는 말이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천산산맥 아래 오아시스는 산 밑에 있는 조그만 동네 같았고, 타클라마칸을 가볍게 횡단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하늘에서 일목요연하게 천산산맥을 바라보니 정상에 있는 빙하들이 특별히 신비스러울 것도 없었고, 타클라마칸도 정복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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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에서 타스쿠얼칸으로의 여행>
우리는 카스에 도착하자마자 36인승 버스로 카라코람하이웨이 도로를 이용하여 7시간 동안 파미르공원을 향하여 달려갔습니다.
카라코람하이웨이는 카스에서 파키스탄까지 이어지는 아스팔트 도로입니다.
국경지대인 관계로 검문검색이 특히 심하였고, 검문소 군인들의 무표정한 얼굴이 특이해 보였습니다.
도중에 도로변에 살고 있는 위구르족들의 농촌생활은 극히 원시적이었으나 그들도 우리와 같이 주어진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중간 중간 휴게소에서 위구르인들이 자연옥을 팔았고, 서로 더 많이 팔려고 애쓰는 모습에서 우리 조상들이 미군들에게 물건을 많이 팔려고 저런 모습을 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몹시 씁쓸하였습니다.
파미르고원에 들어서자 고지대 빙하가 뒷동산에 있어 자주 빙하를 접하다 보니 그 신비스러움도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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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쿨호수의 물은 검푸른색에서 하늘색에 이르는 다양한 색깔을 띠고 있어 더없이 아름다웠습니다.
7시간의 버스 여행은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타스쿠얼칸은 타지크현으로 타지크어로 석두성이라고 하고, 한 대에서 남북조 사이에 존재했던 서역의 성루로 1,400여 년 전에 축조되었고, 서역 36국 중 하나인 퓨리국의 도성으로 전해집니다.
타스쿠얼칸은 중국과 파키스탄의 국경인 쿤자랍 고개를 지나기 전의 마지막 도시이고, 곤륜산맥, 천산산맥, 힌두쿠시산맥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석두성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집니다.
중국 공주가 호위무사들을 데리고 서역으로 시집을 가다가 서역에서 반란이 일어나 잠시 기다리던 중 호위무사와의 불륜으로 임신을 하게 되자 서역 또는 중국 어느 곳으로도 갈 수 없어 이 곳에 자리를 잡고 아기를 출산하였다고 합니다.
공주는 이 아이를 들판에 버렸으나 늑대가 아이를 돌보아주어 호위무사들이 하늘이 낸 사람이라고 왕으로 모셔 석두성을 도성으로 퓨리국을 창업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왕권신수설을 여기에 와서도 전설로 경험해보았습니다.
타스쿠얼칸은 해발 4,000m로서 이경숙 원우가 고산증세를 보였고, 나도 석두성으로 오르는 도중 어지러움을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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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 여행>
같은 해 6. 19. 여행 6일 째 타스쿠얼칸에서 다시 버스를 7시간을 달려 카스로 이동하였습니다.
여행 7일 째 카스 관광을 하였습니다.
카스는 신강서남쪽에 위치한 중국 최서남단의 도시이고, 중국 서부 문호의 교통요충지로서 동으로는 우루무치, 동남으로는 호탄과 티베트 아리 지역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카스는 여름이 길고 겨울이 짧아 혹한이 없어 이상적인 관광명승지로 명성이 나 있었습니다.
카스에는 26개 민족이 살고 있고, 위구르족이 75%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카스에 거주하는 위구르인은 오아시스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호탄과 오랫동안 전쟁을 한 관계로 호탄 거주 위구르인과 사이가 좋지 않고, 교리가 엄격한 관계로 자유분방한 투르판 거주 위구르인과도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합니다.
카스는 날씨가 좋아 '과일의 고향, 춤과 노래의 고향'이라고 불리고, 특히 동문바자르(바자르는 위구르어로 '정기적으로 열리는 시장'이라는 의미로 바자회의 어원이라 함)는 유명합니다.
카스에는 실크로드 상의 불교 유적이 많았고, 삼선동석굴, 모드불탑 등이 유명합니다.
카스에 있는 이드카 광장(위구르어로 축제의 광장 의미)에는 동시에 4,200명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전국에서 규모가 제일 큰 모스크인 청진사가 있고, 그 옆에는 전통적인 바자르가 있었으나 현재는 특히 구입할 만한 물건이 별로 없었습니다.
카스에는 향비묘가 있고, 향비는 카스 출신으로 청나라 건륭제의 총애를 받았으나 고향에 대한 향수가 심하여 적응하지 못해 일찍 죽었고, 카스에 매장되었다는 애잔한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었습니다.
향비묘에는 많은 왕과 왕족들 무덤이 있었고, 이슬람교인들은 무덤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부질없는 인간의 욕심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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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무치 여행>
같은 해 6. 9. 17:20경 저녁 5:20. 비행기로 카스를 떠나 우루무치로 이동하였고, 갈 때의 호기심, 감동은 이미 차분히 가라앉은 상태였습니다.
우루무치는 위구르어로 '아름다운 초원'을 의미하고,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성도이고, 인구가 300만을 넘는다고 하고, 한족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여행 8일 째는 호텔 조식 후 박물관으로 이동하여 전설의 왕국 '누란미녀' 등의 미이라를 감상하였고,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홍산은 1,391m로서 그리 높지 않지만 우루무치의 전경을 한눈에 내려볼 수 있는 곳으로서 한 번 가 볼만한 곳이었습니다.
우루무치에서 2시간 정도 걸려 천산으로 이동하였고, 천산에 있는 천지는 전설의 서왕모가 살고 있다고 전해지는 곳으로서 당시 중국인이 생각한 서역이 이곳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천지는 그다지 크지 않았고, 관광선이 한 바퀴 도는데 1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우루무치 바자르도 소문나 있지만 실제로 구입할 만한 것은 비단 정도였습니다.
우루무치 여행객 중에 한국인이 많았고, 이들이 물건값을 많이 깎다 보니 한국인인 것을 알면 처음에 가격을 높여 부른 다음 깎아준다고 하고, 일본인에게는 제값을 부른다는 말을 듣고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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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의 귀향>
7박 9일의 실크로드 여행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니 인생의 허무함과 중국의 광대함, 잠재력의 엄청남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나를 알고 남을 알아야 삶의 경쟁에서 성공할 수 있듯이 앞으로 중국을 다시 알게 됨으로써 우리의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선후배 변호사님들께 결코 후회하지 않을 실크로드의 여행을 적극 권유하면서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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