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서 신화 읽기] 제1장-농경문청동기와 대지의 여신

  • 문화
  • 문화/출판

[대전에서 신화 읽기] 제1장-농경문청동기와 대지의 여신

괴정동청동기와 농경 신화, 대전 땅의 가장 오래된 기억
‘근대 도시’ 대전, 알고보면 ‘청동기 문화의 유구한 터전’
가로 7.3X세로 12.8cm 농경문청동기에 선사인 소망 담겨

  • 승인 2026-02-03 11:11
  • 수정 2026-02-03 14:27
  • 신문게재 2026-02-04 8면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대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의 공간이자 시간이 담긴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보문산과 식장산 같은 산이며 부사샘이나 유성온천 같은 익숙한 장소에는 그 속에서 살다간 이들이 남긴 수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지요. 대전 땅 곳곳에 자리한 이야기는 세계 다른 공간의 신화와도 연결됩니다. 희노애락은 언제 어디서나 있는 것이어서, 인류 보편의 삶을 이해하고 세계와 관계 맺기 위해 만들어진 신화는 우리 이야기에도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욕망과 두려움, 고통과 환희가 교차하는 신화를 통해 대전을 새로이 바라보려 합니다. 무심히 지나다녔던 삶의 터전에서, 인류의 오래된 지혜를 찾아보는 이 시간이 부디 흥미롭고 유익한 여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주>

온라인-합성
대전시 서구 괴정동에서 발견된 농경문청동기 뒷면과 앞면 /출처=국립중앙박물관
제1장-농경문청동기와 대지의 여신

흔히 대전을 근대의 도시라 부릅니다. 일제 강점기에 이루어진 철도 부설과 대전역 건설, 뒤이은 충남도청 이전이 한가로운 마을을 교통과 행정의 중심지로 발전시켰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대전은 청동기문화를 꽃피운 수준 높은 유물들을 품어온 유구한 역사의 터전이기도 합니다.

그중 괴정동은 다량의 유물과 함께 최초의 한국식 동검이 출토된 의미있는 곳입니다. 특히 이 일대에서 발견되었다고 전해지는 농경문청동기(農耕文靑銅器)는 정식 발굴이 되기 전 세상에 나와 고물상의 손을 거쳐 알려지게 됐지만, 그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이 되었습니다. 까마득한 옛날, 기록조차 없던 시대를 살아가던 선사인들의 간절한 소망이 그 안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지요.

가로 7.3cm, 세로 12.8cm의 크기로 남아있는 농경문청동기는 대전이라는 공간을 신화적 서사 속으로 이끌어줍니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 몸으로 따비를 들고 밭을 가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머리에 깃털 장식을 한 그의 곁에는 토기에 무언가를 담는 여인이, 다른 면에는 하늘과 땅을 연결해 줄 새가 솟대 위에 앉아 있지요. 손바닥 만한 청동판 위에 담겨진 그림은 이 땅 위에서 살아가기 위해 인류가 무엇을 했고, 어떤 것을 바랐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땅을 고르고, 씨앗을 심으며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일. 그 간절한 기다림을 벌거벗은 사내와 솟대로 새겨 넣었던 것입니다.

신화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이 땅을 갈고 씨를 뿌리는 행위는 단순한 노동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 대지와의 신성한 결합이자, 우주적 생명력에 동참하는 숭고한 의례였지요. 인류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땅을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 이해해 왔으며, 여성의 모습으로 그려내곤 했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서막을 여는 가이아는 카오스 속에서 태어난 최초의 존재이자 대지의 신이었습니다. 가이아는 하늘과 바다, 산과 인간을 낳은 만물의 자궁이며, 모든 생명이 태어난 자리였지요. 어머니 신화는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됩니다. 메소포타미아의 닌후르사그와 이집트의 이시스, 북유럽의 요르드가 대지의 여신으로 숭배받았고, 중국에는 황토로 인간을 빚은 여와가 우리에게는 산과 강을 만든 마고 할미가 있지요. 이렇듯 대지는 여성이었기에 땅은 단순한 자원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을 지속시키는 거룩한 존재였습니다.

가이아의 생명력이 인간의 농경 생활과 결합하여 만들어낸 존재가 바로 데메테르입니다. 곡식의 어머니이자 농경의 질서를 관장하는 신으로, 그녀의 기분에 따라 풍년이 되기도 하고 흉년이 닥치기도 했지요. 딸 페르세포네가 저승의 신 하데스에게 납치되어 지하 세계로 끌려갔을 때, 데메테르는 슬픔에 잠겨 땅을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딸이 다시 지상으로 돌아왔을 때 비로소 대지는 싹을 틔우고 풍요를 회복했지요. 이 이야기는 농경 사회에서 수확이 단순한 노동의 결과가 아니라,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신들의 영역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니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열심히 일 한 뒤 기도로 응답을 기다릴 수 밖에요.

벌가벗은 몸으로 밭을 가는 나경은 조선 중기의 학자 유희춘의 『미암일기』에도 나오는 풍습으로 단순한 기행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가장 순수한 상태로 되돌려 어머니인 대지의 살결에 온몸을 밀착시키며 풍요를 비는 절실한 몸짓이었던 것이죠. 그러니 농경문청동기 속 남자는 단순한 노동자가 아닌, 대지에 온전히 자신을 바치는 기도자였던 셈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옷을 벗고 밭을 갈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생의 밭'을 일구며 살아가고 있지요. 노동의 씨앗을 뿌리고, 풍성한 수확을 바라면서 신에게 기대기도 하고 무언가를 찾아 의지하기도 하지요. 방식은 달라졌을지라도, 안정되고 풍요로운 삶을 향한 염원은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걷는 이 땅 아래에 여전히 가이아의 생명력과 데메테르의 축복이 맥박치고 있다고 믿는 순간, 대전은 근대 도시를 넘어 신화의 무대가 될 것입니다. 이 땅의 가장 오래된 기억이 신화와 깊이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한소민/배재대 강사, 지역문화스토리텔링연구소 소장

KakaoTalk_20260203_141306403
한소민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세종 아파트값 상승폭 확대… 대전·충북은 둔화, 충남은 하락폭 축소
  2. 괴산 사리면발축제 성료···주민 손맛 담은 면 요리 맛보여
  3. 저가 수소 공급계획 무산 대전 수소트램…선정 평가 타당성 도마
  4. 천안시, 8일 '천안삼거리 떡 페스티벌' 개최
  5. 은행서 정기예금 연 4% 이상 금리 비중 2년 9개월만에 두 자릿수로 '껑충'
  1. [기고] ‘행정은 세종에, 과학은 대전에'
  2. [전문인칼럼] 돈은 돌아왔는데, 바이오벤처는 목마르다
  3. 충청권 광역 BRT 운영체계 새판…4개 시·도 협력 시험대
  4. 세종 소상공인의 날 개최…'행정수도법 연내 제정' 촉구
  5. 충남대 통합 재추진 시동…이번엔 학내 반대 여론 넘을까

헤드라인 뉴스


중도일보 중부권 언론사 최초 `50억 규모 사내근로복지기금` 설립

중도일보 중부권 언론사 최초 '50억 규모 사내근로복지기금' 설립

중도일보가 중부권 언론사 최초로 50억 원 규모의 사내근로복지기금을 설립해 임직원 복지 증진 향상에 나섰다. 임직원의 복지를 위해 설립된 사내근로복지기금은 자녀 초·중·고·대학 학자금부터 건강검진, 의료비 지원, 장기근로자 포상 등 실생활에 필요한 지원을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중도일보(회장 김원식)는 2일 오전 10시 중도일보 회장실에서 김원식 회장과 유영돈 사장, 김현수 대표, 김은정 근로자대표 등 임직원이 참석한 가운데 50억 원 규모의 사내근로복지기금 전달식을 가졌다. 중도일보는 50억 원을 출연해 사내근로복지기금 법인을 설..

트램부터 대통령 공약까지… 대전시 11월 현안추진 분수령
트램부터 대통령 공약까지… 대전시 11월 현안추진 분수령

민선 9기 허태정 호(號) 출범 첫해 대전시 주요 현안과 관련해 11월이 중대 변곡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도시철도 2호선 트램 급전방식 등 연내 결론을 예고한 대형 사업들의 구체적인 추진 방향이 이달 중 윤곽을 드러낼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민선 9기 공약사업 성패가 달린 첫 본예산 편성과 이재명 대통령 지역공약 이행 가능성 등도 조만간 가늠해 볼 수 있는 포인트다. 2일 대전시 등에 따르면 도시철도 2호선 트램은 지난달 대동교와 대덕대교 교량 개축에 따른 장기 교통통제가 시작된 데 이어 이달 16일부터 약 10개월간 유성구 온천..

`행정수도법` 신중하자던 野, 사전 조율은 회피…11일 심사 직행
'행정수도법' 신중하자던 野, 사전 조율은 회피…11일 심사 직행

<속보>=행정수도특별법의 오는 11일 축조심사를 앞두고 사전 조율을 위한 추가 회의 일정 협의가 사실상 결렬된 것으로 파악됐다.<10월 22·29일자 1면 보도> 앞서 야당인 국민의힘 측이 신중한 검토를 강조하면서도 추가 논의에는 동의하지 않아, 쟁점을 충분히 조율하지 못한 채 곧바로 심사에 들어설 전망이다. 특별법 제정 논의가 6개월 만에 재개됐지만, 이로 인해 연내 정기국회 통과 여부는 여전히 안갯속에 놓였다는 평가가 나온다. 2일 국회와 지역 정치권 등에 따르면 지난달 28일 정기국회 내 첫 회의를 개최한 국토교통위원회 국토법..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대전 타이어전문점 화재 대전 타이어전문점 화재

  • ‘더 화려하고 아름답게’ ‘더 화려하고 아름답게’

  • ‘포기마다 정성 담아’…맛있는 이웃사랑 ‘포기마다 정성 담아’…맛있는 이웃사랑

  • 미래 진로직업 체험 미래 진로직업 체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