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충신 정몽주는 절개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학자로 꼽힙니다. 일백 번 고쳐죽어도 님 향한 일편단심은 변치 않겠다던 단심가의 주인공이죠. 비록 그는 선죽교에서 철퇴를 맞고 세상을 떠났지만, 정몽주만큼 충신으로 기억되는 역사적 인물도 아주 드물 겁니다.
조선에도 정몽주 못지않은 절개를 보여준 인물들이 많습니다. 특히 구한말, 일본의 침략으로 국권을 상실했던 그때, 이완용 등 변절자를 상대로 나라를 지키려던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민족교육운동과 항일운동에 일생을 헌신했던 월남(月南) 이상재. 대한人 열두 번째 주인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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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한복과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다는 이상재 선생. 사진=월남 이상재 선생 기념사업회 제공. |
목은 이색 선생의 재현이다
2016년 3월29일은 월남 이상재 선생의 사망 89주기입니다. 그는 YMCA와 독립협회, 신간회 등 많은 업적을 남겼고 청년들의 사상적 뿌리가 되는 큰 스승이었습니다.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목은의 재현’이라는 칭송을 들을 만큼 뛰어났던 어린 시절의 성정만큼 올바른 절개를 지닌 청년으로 자랐습니다.
그는 글을 배우면서 조국의 현실에 눈을 뜨게 됐는데요. 1867년 18세의 나이로 과거시험에 응시하지만 부패한 제도 탓에 낙방하고 말았죠. 이때 월남의 인생을 바꿔줄 인생의 동지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죽천 박정양으로 진보적인 사상을 지닌 승지였습니다. 월남은 무려 13년 동안 박정양의 집에서 식객이 되어 오늘날로 말하면 개인비서 역할을 했던 것인데요. 이 둘은 정신적 동지가 되어 평생 친분을 유지했습니다.
두 사람에 얽힌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박정양이 벽장열쇠를 이상재 선생에게 맡기고 먼 곳으로 출장을 떠났습니다. 벽장을 열어보니 선물로 들어온 비단과 과일 등이 수북이 쌓여 있었죠. 이에 이상재 선생은 벽장의 물건을 모조리 꺼내고 그 안에 책을 쌓아 넣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박정양은 깜짝 놀랐지만, 이 당돌한 짓이 이상재 선생의 따끔한 훈계인 것을 알아차렸죠. 재물보다 책을 가까이 하라는 선비의 도리를 재차 확인 시켜준 것이죠. 첫 만남부터 이상재 선생의 영특함과 범상함을 알아본 박정양이었기에 당돌한 식객의 행동에도 나무라지 않고 스스로 반성했다는 일화입니다.
이후 박정양과 일본으로 신사유람단으로 일본 시찰을 다녀오기도 했고 미국으로 건너가 국서를 전달하는 자주독립 외교를 실천하며 첫 외교사절단으로 국가를 위해 일하기도 했죠.
우리는 흔히 독립문과 독립신문을 만든 사람으로 서재필 한사람만을 기억합니다. 이는 이상재 선생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인데요. 1896년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독립문과 독립공원 건설에도 큰 힘을 보탰습니다.
독립협회는 젊은이들을 모아 민중계몽운동을 실천했고 전국민 모금운동을 통해 독립문을 건립하기도 했습니다. 또 대중 집회였던 만민공동회를 조직했는데, 단골 연사였던 이상재 선생을 기리기 위해 주로 집회가 열렸던 종로 네거리에는 선생의 동상이 지금까지도 우뚝 서 있습니다.
이상재 선생은 청년들의 사상이 자주독립의 뿌리가 된다고 믿었고, 본인이 청년시절부터 지켜왔던 나라를 위한 애국심과 절개를 청년들에게 심어주고 싶었습니다.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는 청년들을 깨우기 위한 계몽적인 시도였던 것이죠.
옥중에서 읽은 성경구절 하나로… YMCA 창립
1902년 개혁당 사건으로 이상재 선생이 옥에 갇힙니다. 개혁당 사건이란, 친일 세력이었던 이완용 등이 중심이 되어 조작한 정부 전복 음모 사건입니다. 이상재 선생이 부정부패가 심하고 러시아와 일본 등 외국세력의 간섭이 날로 심하다며 민중 앞에서 공포했던 것이 표적이 되었습니다. 국사범으로 체포된 이상재 선생은 감옥에서 성경을 읽으며 기독교 신자로 거듭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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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YMCA서울지도자들과 함께한 이상재 선생. 사진=월남 이상재 선생 기념사업회 제공. |
또 하신 말씀을 너희가 들었나니 눈은 눈으로 갚고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으나 오직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사람을 대적하지 마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까지 돌려대며 또 사람이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하거든 겉옷까지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를 억지로 5리를 가자하거든 그 사람과 10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자거든 주며 네게 꾸고자하는 자여든 물리치지 말라. 또 하신 말씀을 너희가 들었나니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으나 나는 오직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마태복음 5장 성경구절이었습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마음을 동하게 만들었고 그의 54세에 기독교 신자로 거듭나는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이후 출옥한 이상재 선생은 선교사 언더우드 아펜젤러를 찾아가 황성기독교청년회, YMCA에 창설합니다. 이때가 1904년이었고, 1905년 11월9일 을사늑약 강제 체결,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됩니다. 이에 분개한 선생과 YMCA는 군중 결사반대 시위를 실시합니다.
YMCA는 기독교 청년단체로 이상재 선생의 주도로 독립운동의 중요한 조직으로 확대됩니다. 전국 10곳의 YMCA를 규합해 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를 조직하고 청년들의 독립정신은 고양시켰습니다. 이들은 1919년 3.1운동의 기반이 되기도 했습니다. 칼로 일어난 자는 칼로 망한다는 성경구절로 일제의 회유에 대응하며 신실한 종교인으로 거듭났죠.
고종 중국 망명 계획을 세웠지만…
고종에게 이상재 선생은 든든한 신하였습니다. 청년시절 박정양에게 벽장사건으로 선비의 도리를 되새겨줬듯 고종과도 비슷한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1887년 박정양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귀국한 월남은 고종을 알현하게 되었는데, 매관매직을 일삼던 김홍육 일파가 고종에게 받친 뇌물을 보게 됩니다. 이때 월남 선생은 “상감 계신 방이 왜이리 추운가”라며 뇌물보자기를 난로에 태워버렸습니다. 이에 통곡하며 대죄했고 고종은 오히려 이상재 선생의 손을 잡아주며 그의 올 곧은 심성을 확인케 되는 계기였습니다.
신은 비록 만번 주륙을 당할지라도 이런 매국의 도적들과는 조정에 같이 설 수 없사온 즉, 폐하께서 만일 신이 그르다고 생각하시면 신의 목을 베이사 모든 도적들에게 사례하시고 만일 옳다 여기시면 모든 도적의 목을 베이사 온 국민에게 사례를 하소서.
-을사조약 체결 이후 고종의 어명을 거역하며 올린 상소
이후 1905년 한국의 외교권을 박탁하는 일방적인 을사조약이 체결됩니다. 이날 고종은 이상재 선생에게 의정부 참사관을 명했지만 위 상소를 올리며 어명을 거역합니다. 이후 고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관직에 오르지만 오랜 시간 머물지는 않았습니다.
1918년 이회영, 오세창, 한용운과 고종의 망명계획을 시도합니다. 당시 미국 우드로우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의 제창 소식을 접했는데 국내외에서도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고종의 승낙을 얻었고 임시정부에서 활약하고 있던 김가진 등과 비밀리에 연락해 고종의 중국 망명을 도모합니다. 그러나 1919년 1월 갑작스러운 고종황제의 서거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만약 이 계획이 성공했더라면, 어쩌면 우리는 다른 역사를 배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 최초 사회장, 10만명 운집
3.1만세운동의 배후에 월남이 있을 거라 짐작했던 일본은 선생을 다시 감옥에 가둡니다. 3개월의 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이후 다시 사회로 나온 월남 선생은 더욱 다양한 활동무대를 만듭니다. 조선교육협회 회장, 보이스카우트 초대 총재, 조선일보 사장(1920년대 조선일보는 친일파 신문으로 낙인 찍혀 있었는데, 월남 선생이 혁신적인 민족지로 재탄생 시켰다), 신간회 회장을 차례로 역임합니다.
신간회 회장을 맡을 당시 이상재 선생은 몸은 그리 좋은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회장직을 승낙합니다. 신간회는 민족적 정치적 경제적 예속의 탈피해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쟁취, 파벌·족보주의 배격, 동양척식회사 반대, 근검절약운동 등을 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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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10만명이 운집한 이상재 선생의 사회장. 운구행렬 모습. 사진=월남 이상재 선생 기념사업회 제공. |
그리고 1927년 3월29일 많은 청년들의 스승이었던 이상재 선생이 노환으로 별세합니다. 선생의 장례는 한국 최초 사회장으로 치러졌는데, 그를 추모하기 위해 모인 인파가 무려 10만 명이었습니다. 국내 129개 사회단체가 자발적으로 참여했고 4월7일 거행됐습니다.
부정부패의 절정이었던 조선의 말기, 이상재 선생의 존재는 말 그대로 횃불 같았습니다. 청년들에게는 나아갈 길을 일러주는 등대였고, 고종과 조선에는 나라를 지켜주는 충신의 상징이었습니다. 일제에 맞서는 강직한 신념과 청년교육만이 조선을 구할 수 있다는 미래를 보는 안목까지… 그는 놀라운 선구자였습니다. 그 또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그러했듯이 조국의 독립은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상재 선생이 닦아놓은 길로 말미암아 독립을 맞이한 것이죠. 그가 품었던 조국을 향한 절개가 오늘따라 더욱 강직하게 느껴집니다. 조국의 큰 스승이었던 월남 이상재. 그 앞에서 부끄러운 청년으로 살지 않기 위한 다짐을 해봅니다. /이해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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