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식탐
2021-02-03
베짱이 기질을 타고난 나는 노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좋은 시절 다 지나갔다는 걸 일찍이 직감했다. 들로 산으로 망아지처럼 뛰놀던 자유는 엄격한 학교에 저당잡히고 만 것이다. 그렇다고 장문의 편지를 써놓고 홍길동처럼 가출할 엄두는 못 냈다. 단지..
2021-01-13
내 친구는 채식주의자다. 처음엔 우유나 생선도 일절 안 먹는 비건이었으나 지금은 조개 정도는 먹는다. 하여 친구와 나는 고깃집에 가서 돼지 갈비를 뜯는 건 엄두도 못 낸다. 채식을 하게 되는 경우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친구는 어느 날 갑자기 고기가 몸에서 받지 않았다고..
2020-12-23
2017년의 동지는 금요일이었다. 어떻게 정확히 기억하냐고? 휴일에 우연찮게 절에 들렀다 팥죽을 먹었기 때문이다. 휴무인 그 날도 아침을 먹고 보문산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이었다. 산 아래 조그마한 절이 있는데 사람들이 들락날락했다. 평소엔 쥐죽은 듯 조용한 지라 뭔..
2020-12-02
그때만 되면 늘 추웠다. 간혹 눈발도 날렸다. 이리저리 흩날리는 눈송이를 쫓아다니는 아이들과 강아지만 신났다. 어른들은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랄 판이다. 일년 중 명절만큼 큰 대사를 치르는 시기다. 어린 내 눈엔 썩은 생선인데 엄마는 그걸 사골 고듯 푹푹 끓였다. 왜 썩..
2020-11-11
20여년 전 어느 겨울에 감기를 호되게 앓아 죽도록 고생을 했다. 비염이 악화돼 축농증으로 발전한 것이다. 매일 치료를 했지만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콧구멍을 시멘트로 발라 놓은 것처럼 꽉 막혀 도무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머리도 깨질 듯이 아팠다. 입으로 숨을 쉬기..
2020-10-21
찬바람이 분다. 숲속 양지바른 오솔길 쑥부쟁이가 이별을 고하려고 한다. 자기 전에 잠깐 보일러를 튼다. 유난히 추위를 타는 나는 인고의 겨울을 맞아야 한다. 온기가 몹시 그리운 어느날, 옷깃을 여미고 길을 나섰다. 마지막 한줌 햇살인 양 얼굴을 들고 맘껏 쬐었다. 회사..
2020-09-23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이 무대입니다. 병자호란은 조선이 청나라와의 싸움에서 치욕적 패배를 당한 전쟁입니다. 그 대가로 인조는 삼전도에 가서 청나라 칸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숙였습니다. 소설 속에서 칸은 무릎 꿇은 인조를 내려다보면서 바지춤을 내..
2020-09-02
내가 라면을 처음 먹어본 건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으로 기억된다. 봉지가 온통 주황색인 삼양라면이었다. 그 라면을 어떻게 해서 먹게 됐는지 자세히는 모르겠다. 면사무소에서 집집마다 나눠준 것 같기도 하고, 분명한 건 우리 돈으로 산 것은 아니었다. 하여간 그때 먹은 라면..
2020-08-12
정확히 25년만에 들렀다. 거의 그대로였다. 방이었던 곳을 터서 홀과 합쳤을 뿐, 벽에 걸린 액자, 주방과 이제 얼굴에 검버섯이 핀 주인 아주머니의 온화한 표정도 여전했다. 오미식당. 새삼스레 이 식당에 다시 가게 된 건 순전히 친구 덕분이었다. 친애하는 나의 친구가..
2020-07-22
먹는 걸 무지하게 밝히는 나는 어릴 적 전쟁 나면 하꼬방으로 달려가겠다고 맘먹곤 했다. 마을 어귀에 있는 하꼬방은 친구 할머니가 하는 거였는데 조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선반엔 과자, 캐러멜, 눈깔사탕 몇 봉지가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놓여 있었다. 친구 할머니는 막걸리..
2020-07-01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는 멕시코 마약 카르텔에 관한 영화다. 영화는 공포스럽고 구역질나는 장면이 많다. 그 곳엔 인간의 존엄성은 없다. 손이 뒤로 묶이고 얼굴에 비닐봉지를 쓴 채 죽은 수십 구의 시체들과 한 낮 고속도로에서 경찰의 총탄 세례를 맞아 벌집 투성이가..
2020-06-10
나에겐 특별한 영화가 있다. 로만 폴란스키의 '테스'가 그렇다. 고등학교 입학한 그 해 봄, 태어나서 극장에서 처음 본 영화가 '테스'였다. 내가 다니던 시골 중학교에선 종종 관광버스를 대절해 공주에 있는 극장으로 단체 관람을 가는 '전통'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전..
2020-05-20
대전역 앞 인쇄골목엔 이름도 발랄한 '명랑식당'이 있다. 메뉴는 육개장 하나다. 부드러운 바람이 살랑이는 5월 초, 육개장을 먹으러 갔다. 재작년에 처음 가 보고 이번이 두 번째다. 와글와글한 시내 지하상가를 벗어나 인쇄골목에 들어서자 딴 세상이었다. 한낮의 햇살이 내..
2020-04-22
재작년 11월의 여행을 떠올리면 입안에 침이 고인다. 1주일 휴가를 내고 1천m 넘는 영남 알프스의 고봉들을 차례로 오르던 때였다. 산이 워낙 높아 새벽부터 올라 정상에 다다르면 뱃가죽이 등에 붙을 정도로 허기졌다. 김밥과 주전부리로는 아쉬웠다. 하지만 천왕산에선 최고..
2020-04-01
내가 자란 고향의 면소재지엔 자그마한 교회가 있다. 워낙 궁벽한 시골이어서 면소재지라고 해도 그럴 듯한 건물은 초등학교, 지서, 면사무소 그리고 마을 끄트머리에 붙어있는 교회가 전부였다. 고딕 양식의 교회는 제법 멋들어졌다. 뾰족한 첨탑과 살구색의 건물 외양이 밀레의..
2020-03-11
1995년 삼풍 백화점이 붕괴돼 아비규환이던 장면을 난 병원에서 보았다. 지옥도가 따로 없었다. 피투성이 머리를 손으로 감싸고 뛰쳐나오는 사람,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먼지를 뒤집어 쓴 중년 여성…. 나 역시 놀란 눈으로 입원실 침상에서 보신탕을 먹으며 TV 브라운관에..
2020-02-19
학교 가는 걸 끔찍이 싫어했던 나는 대학도 6년만에 간신히 졸업했다. 휴학을 두 번이나 했으니 '의대 다니냐'는 소리를 들어도 할말이 없는 입장이었다. 거기다 시골 출신이 도시에 나와 숙식도 문제였다. 큰언니네서 얹혀 살다 기숙사에 들어가고 자취 1년 하다 다시 기숙사..
2020-01-29
"밥 더 먹어라.", "내 밥 가져가라. 난 배불러서 못먹겠다.", "떡국 더 없니? 오빠 떡국 갖다 줘라." 저희 집은 밥 먹을 때마다 엄마와 전쟁을 치릅니다. 엄마는 끊임없이 식구들 밥 챙기느라 당신은 제대로 밥을 못 먹을 지경입니다. 아무리 얘기해도 소용없는 일입..
2020-01-08
해가 바뀐 탓일까. 가벼운 마음으로 새해를 시작하고 싶었다. 집안을 둘러보았다. 잡다한 물건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안방으로 갔다. 책장에 쌓인 것들을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10년도 더 된 영화잡지들과 여행지에서 갖고 온 관광안내 책자들이었다. 여태..
2019-12-18
'어르신들, 제가 엿듣고 있다는 거 아시죠?' 대구 살을 쩝쩝 씹으며 옆자리 식탁을 힐끗 쳐다봤다. 일행 중 한 할아버지가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거기까지였다. 왜냐면 할아버지 마나님이 맞은 편 동생부부에게 열변을 토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보아하니 서울서 내려온 자매 부..
2019-11-27
차는 커녕 운전면허증도 없는 원시인 체질이어서 식구들이나 친구들한테 면박을 당하기 일쑤다. 차가 있으면 얼마나 편한데 궁시렁 궁시렁…. 다행인지 여태까지 회사 근처에서 산다는 이유로 굳이 차가 있어야 한다는 절실함이 없기도 했다. 그래서 여행갈 땐 대중교통을 이용하는데..
2019-11-06
하루는 밤 11시가 넘어서 친구한테 전화가 왔다. 순대국밥 먹으러 가자는 거였다. 이 시각에 웬 순대국밥인가 하면서 따라 나섰다. 문창동 대전천변에 있는 식당인데 상호가 '농민식당'이었다. 멀리 금강이 바라다 보이는 시골 깡촌의 농민의 딸이었던 나는 식당 이름이 일단..
2019-10-16
세상 밖으로 나서기엔 이른 새벽. 먼동이 트려면 아직 멀었다. 어둠을 헤치고 발소리를 죽이며 복도를 빠르게 걸었다.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이웃들에게 방해가 되면 안된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찬 기운이 폐부 깊숙이 들어가 밭은 기침이 나왔다. 간밤에 발작적인 기침으로 잠..
2019-09-25
스산한 바람에 옷깃을 여미게 되면 나는 시장에 간다. 그것은 땅거미 질 무렵 둥지를 찾아 돌아오는 새의 본능과도 같은 것이다. 나는 인정이 몹시 그리워 시장 구석구석을 기웃거린다. 대전 중앙시장은 내 살아온 날들의 추억이 배어 있다. 고향을 일찍 떠나 터를 잡은 대전에..
2019-08-28
문득,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매달렸다. 나는 지금 왜 여기에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속 시원히 알 수가 없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어제의 세계』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모든 뿌리에서, 그 뿌리를 키울 토지에서조차 떠나 있는 나는 온갖 시대를 둘러보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