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식탐] 한 끼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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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난순의 식탐] 한 끼 밥

  • 승인 2020-01-29 10:08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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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 제공
"밥 더 먹어라.", "내 밥 가져가라. 난 배불러서 못먹겠다.", "떡국 더 없니? 오빠 떡국 갖다 줘라." 저희 집은 밥 먹을 때마다 엄마와 전쟁을 치릅니다. 엄마는 끊임없이 식구들 밥 챙기느라 당신은 제대로 밥을 못 먹을 지경입니다. 아무리 얘기해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치매를 앓는 엄마는 방금 한 말을 바로 잊어버리니까요. 엄마는 떡국 위에 얹은 고기를 못 씹겠다며 옆에 앉은 내 떡국 그릇에 서둘러 덜어 놓습니다. 원체 이가 안 좋기도 하지만 하나라도 자식 먹일 마음에서입니다. 자식들 밥에 집착하는 엄마에겐 예전에 어린 자식들 못 먹인 게 한이 됐던 모양입니다. 이번 설에도 밥상 앞에서 엄마의 성화에 난 그만 짜증을 내고 말았습니다. 일일이 참견하는 엄마의 상태를 알면서도 소견머리 없는 내가 철없는 짓을 하고 만 것입니다.

먹을 게 넘쳐나는 풍요의 시대입니다. 냉장고엔 질 좋은 신선한 고기가 그득하고 온갖 종류의 전을 부치느라 집안은 하루종일 고소한 냄새가 진동합니다. '신종 코로나'로 시절이 수상해도 시장과 마트는 설 음식을 장만하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이었습니다. 격세지감입니다. 우리가 언제 이렇게 맘껏 먹고 살았을까요. 제가 어릴 적 그 시절은 다수가 배를 곯았습니다. 고기도 명절에나 먹을 수 있었지만 그나마 비싼 소고기는 꿈도 못 꿨지요. 좀 여유있게 먹고 사는 집은 한 동네에 서너 집에 불과했습니다. 우리 옆집도 부자였는데 겨울에 사과를 박스 째 사다 먹곤 했습니다. 어린 저에겐 그것이 어찌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과일은 기껏해야 가을에 따서 장독대에 넣어 놓고 먹는 홍시가 유일했거든요. 언젠가 엄마가 그랬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밥은 안 굶었지. 겨울엔 점심에 밥 대신 고구마로 때우는 집이 숱했느니라." 인간에게 먹고 사는 문제만큼 중요한 명제가 있을까요.

설 며칠 전 출근길에 당혹스런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날따라 날씨가 꽤 추워 동동거리며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마침 거지 아저씨도 낡은 가방을 메고 빠르게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아무렇게나 자란 머리는 지저분했고 얼굴은 씻지 않아서 시커메졌습니다. 옷은 땟국물로 번들거렸고 양말도 신지 않아 보는 이를 움츠리게 할 정도로 행색이 말이 아니었지요. 그런데 거지가 길 가 건물 화단 위에 놓인 종이컵을 들어 홀짝 마시고 내던졌습니다. 누가 먹고 버린 커피였습니다. 그걸로 뭔 요기가 되겠습니까만 거지는 그거라도 먹어서 허기를 면해야 했던 겁니다. 살아야지요. 살아있는 생명체에게 배고픔만큼 괴로운 게 있겠습니까. 지상 위 인간의 한 끼 밥은 왜 이다지도 천차만별일까요.

세종대왕은 고기가 없으면 밥을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세종도 먹는 욕심이 대단했나 봅니다. 오죽하면 아버지 태종이 자신이 죽어 상중에 아들이 고기를 끊을까봐 "상중에도 고기를 먹어라"라고 유언을 했다고 합니다. 세종은 결국 고기를 너무 많이 먹어 비만병에 걸려 말년에 고통을 겪었습니다. 왕의 밥상과 민중의 밥상.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음식 앞에서 이 권력관계는 변하지 않는 서글픈 진리입니다. 부자든 빈자든 하루 세끼 먹는 건 다르지 않지만 밥상 위에 계급성이 존재하니 말입니다. 음식은 외로움을 달래 줍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음식엔 눈물과 땀방울이 녹아 있습니다. 일용직 노동자의 컵라면과 이주 노동자의 을씨년스런 밥상을 떠올려 보세요. 지옥같은 이들의 노고로 부자들의 낙원이 세워진다는 사실을요. 성경에 예수가 '오병이어' 즉, 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수천명을 먹였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남의 것을 빼앗지 못해 안달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런 기적이 가능할까요. 정직하게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이 초라한 한 끼 밥으로도 자존을 지킬 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미디어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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