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식탐] 밥줄

  • 오피니언
  • 우난순의 식탐

[우난순의 식탐] 밥줄

  • 승인 2020-09-23 10:19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1145381562
게티이미지 제공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이 무대입니다. 병자호란은 조선이 청나라와의 싸움에서 치욕적 패배를 당한 전쟁입니다. 그 대가로 인조는 삼전도에 가서 청나라 칸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숙였습니다. 소설 속에서 칸은 무릎 꿇은 인조를 내려다보면서 바지춤을 내리고 오줌을 갈겼습니다. 김훈은 남한산성 안에 47일 동안 갇혀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져 시시각각 멸망이 다가오는 상황에 맞닥뜨린 왕과 신하와 백성들의 생존에 대해 썼습니다.

『남한산성』엔 다양한 음식이 나옵니다. 육포, 보리밥, 말국, 찐 메주콩, 졸인 닭다리, 구운 개구리, 조 껍데기 술, 떡국, 냉잇국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전쟁 중 목숨을 부지하는 건 절박한 문제입니다. 살기 위해선 먹어야 하는데 그 음식이 보잘 것 없고 빈약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임금의 수라상이나 백성의 밥상이나 매 한가지입니다. 수라상은 닭다리 한 개와 말린 취나물국이 전부였습니다. 떡국도 달걀 한 개만 풀어 끓였습니다. 그러니 백성의 밥은 오죽할까요. 성을 지키는 군병들은 보리밥에 뜨거운 간장 국물 한 대접을 마셨습니다. 엄동설한 밤에 보초를 서는 군병들은 얼어버린 찐 메주콩을 침으로 한 알씩 녹여 먹었습니다. 굶어 죽은 말을 가마솥에 삶아 뼈다귀를 뜯어먹기도 했습니다.

김훈은 어느 인터뷰에서 "나에게 절대적인 것은 '밥'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에게 돈과 밥은 평생을 따라다니는 업보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먹고 살기 위해서 글을 씁니다. 6.25때 피란 갔던 부산에서 겨우 세 살의 김훈은 굶는 것에 대한 절망감을 알게 됐다고 합니다. 저는 타고난 허약 체질이어서 어렸을 때 놀다 지쳐 저녁을 안 먹고 자면 아침에 일어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기운이 없어 변소도 아버지가 업고 가야 했습니다. 엄마는 서둘러 국에 밥을 말아 덜덜 떠는 저를 먹였습니다. 당연히 그날은 학교에도 못 갔지요. 그래서 초등학교 시절 개근상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김훈과는 차원이 다르지만 밥의 중요성을 저도 일찍 깨달은 셈이지요.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감염병으로 경제가 말이 아닙니다. 전쟁이 따로 없습니다. 자영업자들은 손님이 없어 굶어 죽을 지경이라고 아우성입니다.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고 실업자가 된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비정규직은 더 말할 것도 없고요. 학교를 졸업한 청년들도 취업을 못해 생계를 걱정해야 합니다. 말 많던 이스타항공은 몇백명의 직원을 해고했습니다. 이들은 당장 먹고 살 일이 막막한 처지가 됐습니다. 얼마 전엔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하청 노동자가 또 숨졌습니다. 왜 노동자들은 개선 요구가 묵살당하는 위험한 일터에서 계속 일을 할까요. 목숨과도 같은 '밥줄' 때문입니다. 이윤의 논리가 작동하는 자본의 시스템은 노동자의 밥줄을 쥐고 '그 쇳물'을 쓰고 있습니다.



흔히 인간의 삶을 정글에 비유합니다. 인간의 야만성, 야비함, 비열함과 싸워야 하는 끝없는 고통. 정글은 적자생존의 장입니다. 밟느냐, 밟히느냐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조직의 생리입니다. 밥줄이 위태로운 시대에 밥벌이는 징글징글합니다. 날마다 사표 쓰는 상상을 하며 출근하지만 생존을 위해 치욕을 견딥니다. 인간 정글에서 권력은 약자에게 투철한 노예근성을 요구합니다. 말 잘 듣는 고분고분한 노예 말입니다. 그래서 충성스런 노예는 사유하지 않습니다. 현실 속에서 자존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무력한 개인들은 어찌해 볼 수 없는 상황을 굴욕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밥벌이의 지겨움을 토로한 김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밥에는 낚싯바늘이 들어 있다. 밥을 삼킬 때 우리는 낚싯바늘을 함께 삼킨다." 오늘도 시시포스는 낚싯바늘의 고통을 참으며 바윗덩어리를 들어 올립니다. <미디어부 부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이진숙 교육장관 후보자 첫 출근 "서울대 10개 만들기, 사립대·지방대와 동반성장"
  2. '개원 53년' 조강희 충남대병원장 "암 중심의 현대화 병원 준비할 것"
  3. 법원, '초등생 살인' 명재완 정신감정 신청 인용…"신중한 심리 필요"
  4. 33도 폭염에 논산서 60대 길 걷다 쓰러져…연일 온열질환 '주의'
  5. 세종시 이응패스 가입률 주춤...'1만 패스' 나오나
  1. 필수의료 공백 대응 '포괄2차종합병원' 충청권 22곳 선정
  2. 폭력예방 및 권리보장 위한 협약 체결
  3. 임채성 세종시의장, 지역신문의 날 ‘의정대상’ 수상
  4. 건물 흔들림 대전가원학교, 결국 여름방학 조기 돌입
  5. (사)한국청소년육성연맹, 관저종합사회복지관에 후원물품 전달식

헤드라인 뉴스


야권에서도 비충청권서도… 해수부 부산이전 반대 확산

야권에서도 비충청권서도… 해수부 부산이전 반대 확산

이재명 정부가 강공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해양수산부 부산 이전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보수야권을 중심으로 원심력이 커지고 있다. 그동안 충청권에서만 반대 여론이 들끓었지만, 행정수도 완성 역행과 공론화 과정 없는 일방통행식 추진되는 해수부 이전에 대해 비(非) 충청권에서도 불가론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원내 2당인 국민의힘이 이 같은 이유로 전재수 장관 후보자 청문회와 정기국회 대정부질문, 국정감사 등 향후 정치 일정에서 해수부 이전에 제동을 걸고 나설 경우 이번 논란이 중대 변곡점을 맞을 전망이다. 전북 익산 출신 국민의힘 조배숙..

李정부 민생쿠폰 전액 국비로… 충청권 재정숨통
李정부 민생쿠폰 전액 국비로… 충청권 재정숨통

이재명 정부가 민생 회복을 위해 지급키로 한 소비쿠폰이 전액 국비로 지원된다. 이로써 충청권 시도의 지방비 매칭 부담이 사라지면서 행정당국의 열악한 재정 여건이 다소 숨통을 틀 것으로 기대된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는 1일 전체회의를 열어 13조2000억원 규모의 '민생회복 소비쿠폰' 지급 관련 추가경정예산안을 의결했다. 행안위는 이날 2조9143억550만원을 증액한 2025년도 행정안전부 추경안을 처리했다. 행안위는 소비쿠폰 발행 예산에서 중앙정부가 10조3000억원, 지방정부가 2조9000억원을 부담하도록 한 정부 원안에서 지방정..

대전·충남기업 33곳 `초격차 스타트업 1000+` 뽑혔다
대전·충남기업 33곳 '초격차 스타트업 1000+' 뽑혔다

대전과 충남의 스타트업들이 정부의 '초격차 스타트업 1000+ 프로젝트'에 대거 선정되며, 딥테크 기술창업 거점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1일 중소벤처기업부가 주관하는 '2025년 초격차 스타트업 1000+ 프로젝트'에 전국 197개 기업 중 대전·충남에선 33개 기업이 이름을 올렸다. 이는 전체의 16.8%에 달하는 수치로, 6곳 중 1곳이 대전·충남에서 배출된 셈이다. 특히 대전지역에서는 27개 기업이 선정되며, 서울·경기에 이어 비수도권 중 최다를 기록했다. 대전은 2023년 해당 프로젝트 시행 이래 누적 선정 기업 수 기준으로..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수영하며 야구본다’…한화 인피니티풀 첫 선 ‘수영하며 야구본다’…한화 인피니티풀 첫 선

  • 시구하는 김동일 보령시장 시구하는 김동일 보령시장

  • 故 채수근 상병 묘역 찾은 이명현 특검팀, 진실규명 의지 피력 故 채수근 상병 묘역 찾은 이명현 특검팀, 진실규명 의지 피력

  • 류현진, 오상욱, 꿈씨패밀리 ‘대전 얼굴’ 됐다 류현진, 오상욱, 꿈씨패밀리 ‘대전 얼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