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식탐] 김치전만한 게 있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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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난순의 식탐] 김치전만한 게 있을라고

  • 승인 2020-01-08 10:14
  • 신문게재 2020-01-09 22면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김치전
해가 바뀐 탓일까. 가벼운 마음으로 새해를 시작하고 싶었다. 집안을 둘러보았다. 잡다한 물건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안방으로 갔다. 책장에 쌓인 것들을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10년도 더 된 영화잡지들과 여행지에서 갖고 온 관광안내 책자들이었다. 여태까지 그것들을 한번도 꺼내 보지 않았다. 책꽂이에 꽂힌 서류철엔 20대의 추억이 오롯이 담겨 있다. 영화 포스터들과 시를 베껴 놓은 편지지가 누렇게 바랬다. 그때 코폴라 감독의 '드라큘라'를 서너번 봤나? 자막을 거의 외울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허걱! 일기장도 있네. 하던 걸 멈추고 주저앉아서 읽었다. 웃음이 피식 나왔다. 허구한 날 사랑타령이었다. 마음이 변했나, 오늘 왜 전화를 안 받을까, 실연의 상처로 징징거리던 내 모습이 눈에 선했다. 사랑이 인생의 전부였던 청춘이었다.

친구와 주고받은 편지도 한 박스나 됐다. 대학 때 노래를 녹음한 테이프들도 있었다. 그 중 하나를 카세트에 넣고 틀었다. 변진섭의 '홀로 된다는 것', 마리안느 페이스풀의 '디스 리틀 버드'가 추억을 소환했다. 일기장, 편지, 테이프만 남겨놓고 나머진 쓰레기봉투에 버렸다. 단순한 삶을 모토로 삼는 내가 불필요한 물건들을 이고 지며 살고 있다. 며칠 전엔 가죽 장갑을 꿰맸다. 오른쪽은 멀쩡한데 왼손잡이여서 왼쪽 엄지와 검지에 구멍이 뚫린 것이다. 정이 들었는지 20년 낀 장갑을 선뜻 버릴 수 없었다. 난 겨울이면 밤마다 바느질 하는 여자가 된다. 발가락에 가시가 돋쳤는지 양말이 금방 '빵구' 난다. 버리면 채워진다고, 다 버릴 거라고 호언장담하면서 너널너덜한 장갑, 양말 하나 버리지 못하는 마음은 뭘까.

맙소사! 벌써 3시가 넘었다. 하던 일이 끝나지 않은 터라 빨리 해먹을 수 있는 걸 생각했다. 김치전이 제격이었다. 사곰사곰한 배추김치를 떠올리자 입안에 침이 고였다. 스테인리스 볼에 가위로 김치를 싹둑싹둑 썰어 넣었다. 거기에 부침가루와 우리밀 통밀 가루를 반반 부었다. 주먹만한 양파를 굵게 채 썰고 마지막으로 청양 고추도 쫑쫑. 물을 부어 되직하게 갠 다음 불에 달군 프라이팬에 기름을 넉넉하게 두르고 국자로 듬뿍 떠 넣어 펼쳤다. 지글지글. 전 가장자리가 노릇해지기 시작했다. 표면이 어느 정도 익어갈 즈음 뒤집었다. 뱃속에선 어서 달라고 난리부르스다. 프라이팬을 들고 식탁에 앉았다. 전은 프라이팬 째 놓고 뜨거울 때 후후 불며 먹어야 제 맛이다. 또 하나, 설거지거리도 줄일 수 있으니 핑계가 얼마나 훌륭한가. 젓가락으로 전을 찢어 입에 넣었다. 시큼하고 바삭한 김치전이 혀에 착착 감겼다. 으음 으음. 맛있는 걸 먹으면 콧구멍이 벌름거려지며 콧소리가 절로 나온다. 이런 때 애주가들은 소주 한 잔이 생각나겠지만 난 연잎차로 대신했다.

어릴 적 우리집은 김치 하나로 한겨울을 났다. 궁핍에 몸서리치던 시절이었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팠으나 김칫국은 신물이 났다. 콩나물을 키울 땐 어쩌다 콩나물이 들어간 게 전부였다. 어린 나는 밥상머리에서 안 먹겠다고 투정부리기 일쑤였다. 엄마라고 해서 고깃국으로 자식들 배부르게 먹이고 싶은 마음 굴뚝같겠지만 한둘도 아닌 자식들 키우는 게 어디 녹록한가. 김칫국, 김치죽, 김치수제비. 김치수제비도 많이 먹었다. 혹한의 절정으로 지붕 처마에 한 자나 되는 고드름이 매달리면 우리는 수제비를 해먹었다. 엄마는 김치를 넣은 뻘건 국물이 펄펄 끓는 솥에 질게 반죽한 밀가루 죽을 손바닥에 펴서 수저 손잡이로 뚝뚝 떼어 넣었다. 얼큰하고 따끈한 수제비. 그토록 질색하던 김치를 이젠 제일 좋아한다. 냉장고 문을 열고 김치통을 볼 때마다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다. 아, 그날 김치전은 두 장 부쳐 먹었다. 후식은 홍시 두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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