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식탐] 짜파구리 먹다 꿩 된 사연

  • 오피니언
  • 우난순의 식탐

[우난순의 식탐] 짜파구리 먹다 꿩 된 사연

  • 승인 2020-02-19 09:34
  • 수정 2020-02-19 10:10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짜파구리
연합뉴스 제공
학교 가는 걸 끔찍이 싫어했던 나는 대학도 6년만에 간신히 졸업했다. 휴학을 두 번이나 했으니 '의대 다니냐'는 소리를 들어도 할말이 없는 입장이었다. 거기다 시골 출신이 도시에 나와 숙식도 문제였다. 큰언니네서 얹혀 살다 기숙사에 들어가고 자취 1년 하다 다시 기숙사 생활. 고달픈 유랑의 세월이었다. 조직생활에 노련하지 못한 내가 기숙사에 들어가는 건 일대 모험이었다. 당시 대학 기숙사는 규칙이 엄격했다. 밤 열 시까지 들어와야 하고 세 번 걸리면 무조건 퇴사였다. 시간을 어긴 한 후배는 얼마나 겁을 먹었는지 현관 문 들어서면서 눈물보를 떠트려 화제가 됐었다. 기숙사는 한 방에 세 명씩 생활하는 구조여서 룸메이트를 잘 만나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적응을 못하고 중간에 나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성질머리 고약한 나 역시 2학년 한 해 살고 뛰쳐나온 건 어쩌면 당연지사였다.

대학 4학년 때 복학한 나는 다시 기숙사에 입사했다. 일 년만 잘 버티면 졸업할 수 있다는 희망에 순조롭게 적응했다. 아니, 즐거웠다. 왜냐면 기숙사에서 후배 H를 만났기 때문이다. 어쩌다 친하게 된 후배도 4학년이었는데 나랑 죽이 잘 맞았다. 무엇보다 후배도 뭐든 잘 먹었다. 그때 우리는 완두콩이 들어간 야채참치 캔을 무지하게 먹었다. 후배 가방엔 항상 참치 캔이 들어 있었다. 캠퍼스 벤치에 앉아 놀다 불쑥 참치 캔을 꺼내면 둘은 나무 젓가락으로 참치를 먹었다. 졸업 후에도 우리의 먹보 의리는 이어졌다. 딱히 기념할 만한 날이 아닌데도 케이크를 사다 먹곤 했다. 크라운베이커리 삼단케익. 수저로 퍽퍽 퍼먹는 맛은 봄밤의 입맞춤처럼 황홀했다. 내가 후배에게 붙여준 별명이 있었다. 레간자. 자동차 '레간자'의 광고 카피가 '소리없이 나간다'였는데 후배는 정말 소리없이, 빨리 먹었다. 자기 몫만 후딱 먹고 수저를 놨기 때문에 나랑 아귀다툼할 일도 없었다.

각설하고, 열 시 점호가 끝나면 기숙사 안에선 자유로웠다. 나는 후배 방에 뻔질나게 놀러갔다. 후배 방 식구들과 수다를 떨다 보면 배고파지기 마련. "언니, 라면 먹고 갈래요?" 응? 그날 후배는 짜파게티와 너구리를 꺼냈다. 방에서 라면을 끓이자면 천상 커피포트밖에 없었다. 하지만 커피포트는 전기세가 많이 나와 절대 사용하면 안 되는 거였다. 우리는 키득거리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고 거사에 돌입했다. 봉지를 재빠르게 찢어 물이 끓는 커피포트에 짜파게티와 라면을 투하했다. 수프와 짜파게티 소스도 한꺼번에 넣었다. 국적불명의 라면이 탄생했다. 요상하면서 맛있는 냄새가 방안에 퍼졌다. 다들 침을 꼴깍 삼키며 게슴츠레한 눈이 먹잇감을 찾은 독수리눈처럼 번들거렸다. 나는 커피포트 뚜껑, 나머진 라면 봉지를 접어 손에 들었다. 나무젓가락도 모자라 반으로 분질렀다.

네 여자는 허겁지겁 '짜파구리'를 흡입했다. 가슴은 콩닥거리고 입에선 후루룩거리고. 훔친 사과가 맛있다고 했나? 몰래 먹는 짜파구리 맛을 무엇에 비할까. 금기에 도전하는 짜릿함이 이런 걸까? 하지만 신은 너그럽지 않았다. 라면을 다 먹고 국물을 나눠 마시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 순간 방문이 벌컥 열렸다. "이거 무슨 냄새지?" 사감 선생의 보름달 같은 얼굴이 훅 들어왔다. 우리는 사색이 돼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후배의 룸메이트가 얼마나 놀랐는지 숨는다는 게 벽장 속에 머리만 집어넣었다. 흡사 풀섶에 대가리만 숨은 꿩같은 꼴이었다. 근엄한 사감은 그걸 보고 얼굴이 빨개지도록 웃었다. 웃음을 선사한 덕분에 사감은 커피포트만 압수하는 데 그쳤다. 항상 커트머리에 이쁜 꽃핀을 꽂고 가을이면 캠퍼스를 거닐던 사감 선생. 아! 우리의 사랑스런 'B 사감'과 짜파구리 나눠 먹던 후배들은 다 어디 갔을까. <미디어부 부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갑천 야경즐기며 워킹' 대전달빛걷기대회 5월 10일 개막
  2. 수도 서울의 높은 벽...'세종시=행정수도' 골든타임 놓치나
  3. 충남 미래신산업 국가산단 윤곽… "환황해권 수소에너지 메카로"
  4. 이상철 항우연 원장 "한화에어로 지재권 갈등 원만하게 협의"
  5. [근로자의 날] 작업복에 묻은 노동자 하루…"고된 흔적 싹 없애드려요"
  1. 충청권 학생 10명 중 3명이 '비만'… 세종 비만도 전국서 가장 낮아
  2. 대학 10곳중 7곳 올해 등록금 올려... 평균 710만원·의학계열 1016만원 ↑
  3. 함께 새마을, 미래로! 세계로!
  4. [춘하추동]삶이 힘든 사람들을 위하여
  5. 2025 세종 한우축제 개최...맛과 가격, 영양 모두 잡는다

헤드라인 뉴스


[근로자의 날] 작업복에 묻은 노동자 하루…"고된 흔적 싹 없애드려요"

[근로자의 날] 작업복에 묻은 노동자 하루…"고된 흔적 싹 없애드려요"

"이제는 작업복만 봐도 이 사람의 삶을 알 수 있어요." 28일 오전 9시께 매일 고된 노동의 흔적을 깨끗이 없애주는 세탁소. 커다란 세탁기 3대가 쉴 틈 없이 돌아가고 노동자 작업복 100여 벌이 세탁기 안에서 시원하게 묵은 때를 씻어낼 때, 세탁소 근로자 고모(53)씨는 이같이 말했다. 이곳은 대전 대덕구 대화동에서 4년째 운영 중인 노동자 작업복 전문 세탁소 '덕구클리닝'. 대덕산업단지 공장 근로자 등 생산·기술직 노동자들이 이용하는 곳으로 일반 세탁으로는 지우기 힘든 기름, 분진 등으로 때가 탄 작업복을 대상으로 세탁한다...

`운명의 9연전`…한화이글스 선두권 경쟁 돌입
'운명의 9연전'…한화이글스 선두권 경쟁 돌입

올 시즌 절정의 기량을 선보이는 프로야구 한화이글스가 9연전을 통해 리그 선두권 경쟁에 돌입한다. 한국프로야구 10개 구단은 29일부터 다음 달 7일까지 '휴식 없는 9연전'을 펼친다. KBO리그는 통상적으로 잔여 경기 편성 기간 전에는 월요일에 경기를 치르지 않지만, 5월 5일 어린이날에는 프로야구 5경기가 편성했다. 휴식일로 예정된 건 사흘 후인 8일이다. 9연전에서 가장 주목하는 경기는 29일부터 5월 1일까지 대전 한화생명볼파크에서 열리는 LG 트윈스와 승부다. 리그 1위와 3위의 맞대결인 만큼, 순위표 상단이 한순간에 뒤바..

학교서 흉기 난동 "학생·학부모 불안"…교원단체 "재발방지 대책"
학교서 흉기 난동 "학생·학부모 불안"…교원단체 "재발방지 대책"

학생이 교직원과 시민을 상대로 흉기 난동을 부리고, 교사가 어린 학생을 살해하는 끔찍한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학생·학부모는 물론 교사들까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경찰과 충북교육청에 따르면 28일 오전 8시 33분쯤 청주의 한 고등학교에서 특수교육대상 2학년 A(18) 군이 교장을 비롯한 교직원 4명과 행인 2명에게 흉기를 휘둘러 A 군을 포함한 모두 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경계성 지능을 가진 이 학생은 특수교육 대상이지만, 학부모 요구로 일반학급에서 공부해 왔다. 가해 학생은 사건 당일 평소보다 일찍 학교에 도착해 특..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2025 유성온천 문화축제 5월 2일 개막 2025 유성온천 문화축제 5월 2일 개막

  • 오색 연등에 비는 소원 오색 연등에 비는 소원

  • ‘꼭 일하고 싶습니다’ ‘꼭 일하고 싶습니다’

  • 함께 새마을, 미래로! 세계로! 함께 새마을, 미래로! 세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