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식탐
2019-08-07
아, 또 폭염이 들이닥쳤다. 여름을 좋아하지만 폭염은 정말 견디기 힘들다. 작년 이맘 때 회사에서 점심 시간에 지인 장례식장에 갔다가 길에서 졸도할 뻔 했다. 이글거리는 햇볕이 불에 달군 인두가 살을 지지듯 뜨겁고 아팠다. 그런데 건물 공사장에서 노동자들이 벽돌을 등에..
2019-07-17
손바닥만한 구두 속에서 하루종일 구겨져 있던 발을 꺼낸다. 열 개의 발가락을 쫙 펴고 스트레칭한다. 허물을 벗듯 블라우스, 스커트를 훌훌 벗는다. 온 몸을 옥죈 갑옷을 벗어 내려놓은 기분이다. 그리고 창문을 활짝 열고 거실에서 큰 대자로 벌러덩 눕는다. 물 먹은 솜처럼..
2019-06-26
해남 미황사를 병풍처럼 두른 달마산 능선에서 바라본 바다가 안개로 뿌옜다. 땀으로 범벅된 몸으로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침 8시부터 가파른 산을 오른 탓에 위장에선 아우성 소리가 요란했다. 배낭에서 바게트 빵을 꺼내 정신없이 먹었다. 물기도 없고 질겨서..
2019-06-05
내가 일하는 미디어부엔 고향이 서산인 동료가 있다. 전산 담당인데 얼굴이 동글동글하고 눈코입이 손톱으로 콕 찍은 것처럼 작고 귀여워 겨울엔 찐빵 같고 이때 쯤엔 하지 감자를 연상케 한다. 그런데 이 친구가 보기 드문 효자다. 철마다 부인과 휴가내서 가을 추수, 김장,..
2019-05-15
계절의 여왕 5월 첫 주말 옥천에 갔다. 대전역 앞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옥천읍에서 내려 다시 청산 가는 마을 버스를 탔다. 청산은 생선국수로 유명한 곳이다. 4월에 생선국수 축제도 열린다. 마침 옥천 장날이라 버스는 노인들로 꽉 찼다. 오전 10시 40분 차였는데 벌써..
2019-04-24
처음 봤을 때 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잊혀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뭉크의 '절규'라는 그림이다. 고등학교 시절 미술책에 실린 이 그림을 본 순간, 내 안에 잠재된 어떤 감정을 건드리는 느낌이어서 당혹스러웠다. 핏빛 노을을 배경으로 공포에 질린 커다란 눈과 두 손으로 귀를..
2019-04-03
대전 대사동에는 금요장터가 있다. 금요일마다 농협 주위에 장이 선다. 대전 근교에서 농사짓는 주민들이 채소, 과일 등을 가져와 판다. 직거래인 셈이다. '장돌뱅이'들도 온다. 금요일만 되면 그곳은 북적북적 5일장을 방불케 한다. 난 금요일이 휴무라 장도 보고 그곳에 단..
2019-03-14
스무 날 가까이 미세먼지 속에서 살았다. 독성이 가득한 부유하는 안개의 도시에 갇혀 생존의 문제로 고통에 몸부림쳤다. 산다는 것은 행복인가, 불행인가. 문명의 이기에 익숙한 인간의 딜레마는 계속될 것이다. 앞으로 나아갈 뿐, 멈추지도 않고 더구나 뒤를 돌아보는 건 어리..
2019-02-20
졸린 눈을 비비며 목포 터미널 대합실에 들어섰다. 대합실 의자에 배낭을 내려놓고 물 한모금으로 목을 축이는데 노랫소리가 들렸다. 나이 지긋한 남자의 구성진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무슨 노래더라? 멜로디는 익숙한데 선뜻 감이 안 잡혔다. '머나먼 저 하늘만 바라보고..
2019-01-30
우리는 물속으로 풍덩 빠졌다. 서울에서 직장 다니는 친구한테 온천 가자고 했을 때 거절할 줄 알았다. 워낙 낯가림이 있어 쑥스러움을 타는 친구이기 때문이다. "온양온천 어때?" 넌지시 제안을 하자 친구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오케이!" 알고 보니 친구도 온..
2019-01-09
새벽 5시 50분. 간신히 택시를 잡았다. 차 시간에 늦을까봐 초조했는데 다행히 와줘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일찍 어디 가시나요?" 인상이 깔끔한 초로의 신사 분위기의 택시기사가 물었다. 통영에 물메기탕 먹으러 간다고 하자 택시기사는 반색을 했다. "나도 가..
2018-12-19
한 해가 막 저물 무렵, 크리스마스라는 특별한 날이 막바지 뒷심을 발휘한다. 동정녀 마리아의 산고 끝에 말 구유에서 태어난 예수의 생일은 너나없이 즐거운 날이다. 교회나 성당에 안 다녀도 이 날은 으레 아이가 있는 집이나 연인들은 성탄절을 핑계삼아 외식하는 날 아니겠냐..
2018-11-28
한 자리에서 라면 6개를 끓여 후루룩 마시다시피하는 강호동 정도는 아니지만 나도 나름 대식가에 속한다. 음식 앞에서 질보다는 양을 따지는 편이다. 어쩔 수 없는 습성이다. 어릴 적엔 엔간히 음식투정을 부렸지만 고등학교 때 자취생활 하면서 그 버릇이 싹 없어졌다. 대학생..
2018-11-07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에서 미역국에 넣는 고기는 소고기나 닭고기 정도다. 내가 어릴 적엔 집집마다 돼지며 소, 닭 등 가축을 키웠다. 닭은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풀을 뜯어먹거나 볍씨, 싸라기를 먹으며 컸다. 이렇게 자란 닭을 잡아 미역과 함께 끓이면 둘이 먹다 하나가..
2018-10-17
지역마다 향토음식이란 게 있다. 전주비빔밥, 병천순대국밥, 안동찜닭, 구즉묵밥, 강릉초당두부, 부산 돼지국밥. 그 지역에 가서 먹어보면 과히 실망하지 않는다. 괜히 소문난 게 아니구나 고개가 끄덕여진다. 요즘은 전국 어디서나 모든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세상이다. 향토음..
2018-09-26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없이 청명한 계절에 맞는 한가위. 낼 모레면 50 중반을 바라보는데도 명절만 되면 아직도 설렌다. '이쁜이 꽃분이 모두 다 반겨주는데~'. 마음은 벌써 고향으로 한달음 달린다. 뭐 기혼여성들은 머리 깨나 아프겠지만 말이다. 집 떠나 객지생활..
2018-07-20
나는 수박을 먹는다. 체질상 추위를 많이 타는 이유로 겨울은 딱 질색이다. 나에게 겨울은 그야말로 인고의 계절이다. 하여 여름이 오면 내 세상인 셈이다. 옷 입기도 간편하고 무엇보다 수박이 나오는 계절 아닌가. 참외는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굳이 찾지 않는데 수박이라면 사..
2018-05-04
난 좋고 싫음이 분명한 성격이다. 싫은 것도 많지만 좋은 것 또한 많다. 난 떡을 아주 좋아한다. 냉장고 냉동실엔 늘 떡이 쌓여 있다. 팥떡, 콩떡, 영양떡 등. 때때로 전문 떡집에 한 박스 주문해 냉동실에 넣어 두고 아침 식사용으로 먹거나 산에 갈 때 몇 개씩 싸 갖..
2018-03-23
일요일 퇴근 길 용두시장 주택가를 지나다 정겨운 장면을 만났다. 대문 앞에서 아주머니가 나물을 다듬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탄성을 지르며 발걸음을 멈췄다. 지칭개라는 봄나물이었다. 풍년초도 드문드문 섞여 있었다. 감탄사를 연발하며 나물을 뒤적이면서 어디서 뜯었냐고 물..
2018-02-15
추위를 많이 타는 겨울을 달가워하지 않지만 좋은 것도 있다. 펑펑 날리는 눈과 떡국. 뭐 요즘에는 사시사철 시장이나 마트에 가면 언제든지 떡국떡을 사다 해먹을 수 있다. 허나 떡국은 온전히 겨울에 먹어야 맛있다. 먹는 거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로 식탐이 많지만..
2018-02-09
희대의 바람둥이 카사노바는 여자 못지 않게 먹는 걸 좋아했다. 먹는 것과 키스는 입과 관련돼 있으니 식욕과 성욕은 통한다는 얘기가 괜한 말은 아닌 듯 싶다. 입술과 혀와 목젖을 건드리며 그 무엇이 넘어가는 통로인 목구멍은 음식을 먹고 삼키고 혹은 빨고 핥는 행위를 목적..
2017-12-15
저번에 금산 갔다 오다 드디어 발견했다. 버스 타고 지나다가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닭계장'(맞춤법상 닭개장이 맞다)이라고 쓰인 간판이 얼핏 눈에 뜨였다. 깜박깜박 졸다가 잠이 확 달아났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이렇게 얘기하면 닭개장 못 먹고 죽은 조상..
2017-11-10
춘향? 춘양? 춘양(春陽)이었다. 춘양의 어원은 어디서 왔을까. 어둑어둑한 가을의 춘양에서는 봄볕(春陽)은 온데간데 없고 골 깊은 찬 기온이 옷섶을 파고들었다. 하긴 봉화 어디엔가 이몽룡의 생가가 있다고 하니 춘양이란 지명이 뜬금없어 보이진 않는다. 10월의 마지막 밤..
2017-10-19
세상에서 제일 값싸고 맛있는 게 김밥이다. 김밥의 재료는 무궁무진하다. 무얼 넣느냐에 따라 색다른 맛을 연출할 수 있다. 요즘은 럭셔리한 김밥도 나온다. 한우 불고기가 들어가기도 하고 캐비어를 넣기도 한다. 싱글들의 일상을 보여주는 '나 혼자 산다'에서는 방송인 솔비가..
2017-07-20
“모히또 한 잔 할래?” 응? 모히또? “마셔봐, 너도 반할거야.” 그렇게 나의 모히또 입문은 시작됐다. 여름이 오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반사적으로 모히또가 생각난다. 카페 창가에 앉아 여름 한낮의 이글거리는 땡볕이 내리쬐는 바깥풍경을 바라보며, 모히또를 마시는 느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