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식탐] 잊지 못할 라면 한 그릇

  • 오피니언
  • 우난순의 식탐

[우난순의 식탐] 잊지 못할 라면 한 그릇

  • 승인 2020-09-02 10:40
  • 신문게재 2020-09-03 18면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GettyImages-jv10982028 (1)
게티이미지 제공
내가 라면을 처음 먹어본 건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으로 기억된다. 봉지가 온통 주황색인 삼양라면이었다. 그 라면을 어떻게 해서 먹게 됐는지 자세히는 모르겠다. 면사무소에서 집집마다 나눠준 것 같기도 하고, 분명한 건 우리 돈으로 산 것은 아니었다. 하여간 그때 먹은 라면 맛은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맛의 신세계라고나 할까? 꼬불꼬불한 면도 그렇지만 수프 가루를 넣고 끓인 국물 맛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매일 신물나도록 먹는 청국장, 김칫국과는 딴 판이었다. 한번 먹으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마력의 맛!

그 후로 오랫동안 라면을 더는 먹지 못했다. 라면은 내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세계의 맛이었다. 4학년 때던가. 우리 집엔 TV가 없어 나와 언니는 저녁만 먹으면 옆집으로 달려갔다. 동네에서 좀 산다 하는 그 집은 바로코 스타일의 디자인에, 미닫이 문이 달린 TV를 일찌감치 장만해 부를 과시했다. 뻔질나게 드나들어 그 집 사람들 눈치가 좀 보였지만 우리는 TV 드라마의 유혹을 떨치기 어려웠다. 일일 드라마였는데 도시 변두리에 사는 소시민들의 얘기였다. 그런데 하루는 학교에서 돌아온 형한테 동생이 "형, 오늘 저녁은 라면 안 먹어도 돼. 밥 먹을 수 있어"라며 좋아라 했다. 내가 꿈에서도 먹지 못하는 라면을 지겨워하는 형제가 어린 나로선 이해가 안됐다.

고등학교 때 대학 다니는 언니와 자취하면서 라면을 원없이 먹었다. 주말마다 특식으로 먹었는데 네 개를 끓였다. 겨울엔 떡국떡도 넣었다. 80년대부터 라면은 부흥기를 맞았다. 라면 종류가 다양해졌다. 너구리, 안성탕면 등 신제품이 쏟아져 나왔다. 그 중 컵라면은 라면계의 혁명이었다. 내가 고3때 농심에서 '사발면'으로 처음 출시됐는데 어디서나 간편하게 뜨거운 물만 부으면 먹을 수 있고, 가늘고 꼬들꼬들한 면이 특이했다. 수업시간만 되면 잠귀신이 붙은 것처럼 졸다가도 도시락 먹고 후식으로 사발면 먹을 땐 눈이 반짝였다.

지금까지 살면서 무수히 먹은 라면이지만 잊을 수 없는 라면이 있다. 어느 해 5월 태안 해변길을 종일 걸었다. 고운 모래밭과 들꽃이 예뻤다. 소금기 머금은 서풍을 맞으면서 걸으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간식거리로 싸온 떡과 과자도 먹었다. 해가 머리 위에서 이글거릴 무렵, 배가 고파 식당을 찾았는데 보이지 않았다. 가도 가도 식당은 없었다. 허기지다 못해 식은땀이 나고 손이 떨렸다. 빨리 뭘 먹지 않으면 쓰러질 것 같았다. 언덕길을 올라 마을에 들어서자 마당에서 세차 중인 노인이 보였다. 배를 움켜쥐고 근처에 식당이 있는지를 물었다. "시골 마을에 무슨 식당이 있겠소. 밥은 없고 찬장에 라면 하나 있는데 끓여 먹어요. 난 세차 중이라서."

주방에 가서 재빨리 라면을 끓였다. 내 집인 양 냉장고를 열고 겉절이도 꺼내 식탁에 놓았다. 뜨거운 김을 들이마시며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라면을 먹어치웠다. 적당히 익은 배추겉절이와 라면이 찰떡궁합이었다. 국물까지 다 마시고 겉절이도 싹 비웠다. 비로소 살 것 같았다. 신바람 나게 설거지를 해 놓고 마당으로 나갔다. 어르신에게 이렇게 맛있는 라면은 처음 먹어본다며 수다를 떨었다. "어이구, 배고프니까 맛있지 뭘. 껄껄." 알고 보니 그 집은 별장이었다. 어쩐지 살림이 단출했다. 서울에 사는 노신사는 가족과, 때론 혼자 별장에 내려와 낚시도 하고 쉬었다 간단다. "태안 놀러오면 여기서 묵고 가요. 열쇠는 현관 옆 창문 틈에 있으니까." 생면부지의 이방인에게 이토록 호의를 베풀다니, 어르신이 보여준 나에 대한 믿음에 가슴이 뭉클했다. 라면은 언제 먹어도 맛있다. 염천에 뜨거운 라면을 후루룩거리며 시큼한 총각김치와 먹는 맛도 끝내준다. 나중에 찬밥 말아먹는 것도 필수! <미디어부 부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대전 괴정동 옛 예지중고 건물서 불… 15분 만에 진화
  2. 대전신세계, 가정의 달 맞이 푸드트럭 '부릉부릉'
  3. 재선 도전 김태흠 충남도지사, "4년 동안 성과, 도민들이 판단할 것"
  4. 5차 석유 최고가격제 또 동결
  5. 대전 헤레디움 '이봉 랑베르: 예술가의 곁에서'展
  1. "국힘, 반쪽 공청회 책임져라" 지역사회 거센 비판
  2. 대전과학기술대, 지역 스포츠·헬스케어 인재 양성 장학금 기탁식
  3. 전 세계 초능력 히어로 국립중앙과학관 집결… '비밀 신입 요원' 모집
  4. 대전 검정고시 891명 합격… 초등 합격률 98%
  5. 한밭새마을금고, 어버이날 특식 지원 활동 후원

헤드라인 뉴스


서산교통, 공용버스터미널 인근 인사 사고, 공식 사과

서산교통, 공용버스터미널 인근 인사 사고, 공식 사과

서산교통(대표이사 안광헌)이 7일 서산공용버스터미널 인근에서 발생한 교통사고와 관련해 시민들에게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종합 안전대책 마련에 나섰다. 이번 사고는 7일 오전 10시께 서산시 동문동 서산공용버스터미널 앞 도로에서 발생했으며, 길을 건너던 80대 보행자가 시내버스 차량에 치여 관내 중앙병원으로 긴급 이송돼 수술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경찰과 관계기관은 사고 운전자 진술과 CCTV, 차량 블랙박스 영상 등을 토대로 정확한 사고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이날 사고 발생 이후 서산지역사회에서는 터미널..

전 세계 초능력 히어로 국립중앙과학관 집결… `비밀 신입 요원` 모집
전 세계 초능력 히어로 국립중앙과학관 집결… '비밀 신입 요원' 모집

전 세계 초능력 히어로 캐릭터가 대전에 자리한 국립중앙과학관에 모여 비밀 신입 요원을 모집한다. 하반기 '초능력 비밀 아카데미' 개관에 앞서 국민 관심을 모으기 위한 이벤트다. 국립중앙과학관은 16~17일 과학관 사이언스터널에서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이색 과학 축제 '초능력 히어로 박람회: 비밀 아카데미 신입 요원 모집'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번 행사는 하반기 창의나래관에 선보이는 '초능력 비밀 아카데미'에 대한 기대를 높이기 위한 것으로, 새로운 비밀 요원을 모집하고 훈련시킨다는 세계관을 바탕으로 마련됐다. 관람객은 초능력과..

"국힘, 반쪽 공청회 책임져라" 지역사회 거센 비판
"국힘, 반쪽 공청회 책임져라" 지역사회 거센 비판

국회 행정수도특별법 공청회에 국민의힘 소속 의원들이 전원 불참한 것을 두고, 지역 시민사회단체와 정치권의 비판이 확산하고 있다. 국민의힘 소속 의원이 법안 공동발의에 참여한 가운데, 이미 개최가 합의된 논의의 장에 집단 불참한 것은 사실상 공청회를 무력화하고, 행정수도특별법 추진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라는 인식에서다. 특히 공청회 자체가 법안 처리의 분수령으로 평가받았던 만큼, 국회 논의 동력이 약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43개 전국·세종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행정수도특별법 제정 범시민대책위원회(가칭)는 8일 오전 '행정수..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작은 지구촌에서 즐기는 세계인 어울림 대축제 작은 지구촌에서 즐기는 세계인 어울림 대축제

  • 5차 석유 최고가격제 또 동결 5차 석유 최고가격제 또 동결

  • 유성온천 문화축제 준비 ‘이상무’ 유성온천 문화축제 준비 ‘이상무’

  • ‘공정선거 함께해요’ ‘공정선거 함께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