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식탐
2022-08-17
비온 후 푹신한 낙엽 밟는 느낌이 좋다. 물기 머금은 눅눅한 냄새. 소나무에서 조청처럼 흐르면서 굳은 송진 냄새가 확 풍긴다. 전날까지 줄기차게 내리던 비가 뚝 그치고 푸른 하늘엔 목화송이 같은 구름이 떠다닌다. 시루봉이 가까워온다. 끈적한 땀이 온 몸에 달라붙자 날파..
2022-07-27
"아자씨 지슈(계세요)? 말씀드릴 게 있어서유. 어이구, 저녁 드시네유." 소쩍새가 우는 한 여름 저녁, 우리 식구는 두리반에 둘러앉아 저녁으로 상추쌈을 먹는 중이었다. 밭에서 뜯어온 한 소쿠리 상추와 된장을 끓여 올린 밥상이었다. "어, 여기 앉게나." 먼 친척뻘 되..
2022-07-06
뭘 입을까. 품이 넉넉한 걸 입어야 하는데. 옳지, 호피무늬 시폰 미니 원피스를 입으면 딱이겠다. 오전 11시에 찐 고구마 하나를 먹었다. 점심은 그걸로 끝. 예식은 2시 50분이었다. 이게 얼마만인가. 코로나다 뭐다 해서 몇 년 만에 결혼식장에 간다. 후배 결혼으로..
2022-06-15
지난 금요일 아침 일찍 보문산에 갔다가 오는 길에 금요장터에 들렀다. 테미삼거리에서 충남대병원 쪽으로 조금 가다보면 튀밥장수 할아버지가 자리를 잡고 있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한가롭다.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졸기 일쑤다. 그런데 이날은 손놀림이 바빴다. 튀밥 튀기는..
2022-05-18
푸를 청(靑) 볕 양(陽). 내 고향 청양은 칠갑산 자락이 넓게 드리워진 오지에 속하는 지역이다.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1학년 때 교장 선생님이 침 튀겨가며 한 말씀 중에 기억나는 게 있다. 그때의 아침 조회시간은 정말이지 지옥이었다. 피죽도 안 먹은 것 같은 교..
2022-04-20
"오늘 점심은 칼국수 어때? 얼큰한 공주칼국수나 바지락 넣은 시원한 칼국수도 좋고.", "짬뽕이 당기는데?", "아냐, 오랜만에 짜장면 먹을까? 곱빼기로." 점심을 먹고 식곤증으로 감기는 눈을 부릅뜨고 모니터를 보며 자판을 두드린다. 어느새 4시 50분. "피자 왔습니..
2022-03-30
오랜 옛날(그래봤자 50년 조금 안된), 올망졸망 6남매의 '흥부네' 가족이 있었다. 이 가족에게 고기는 명절이나 제사 때 먹을 수 있는 귀한 거였다. 겨울에 흥부 마누라는 선짓국을 종종 끓였다. 시뻘건 선지를 양철 함지박에 담아 머리에 이고 팔러 다니는 할머니가 있었..
2022-03-10
고도의 전략과 이미지 전술. 세상은 다분히 정치적으로 돌아간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그렇지 않은가. 남녀의 '밀당'이야말로 정치공학적이다. 영화 '나인하프위크'는 매력적인 남자를 만나 위험한 일탈에 빠지는 여성의 얘기다. 이 영화의 하이라 이트는 두 남녀가 섹스게임을..
2022-02-16
일년 중 가장 맛있는 밥을 먹는 날은 언제일까? 내겐 정월 대보름이 그날이다. 오곡밥과 나물들로 차려진 밥상. 청나라 서태후의 호화로운 황실요리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나물의 다채로운 풍미는 잊지 못할 맛의 추억을 선사한다. '그 나물에 그 밥'이란 말이 있다. 비슷비슷..
2022-01-19
오늘밤은 '고파장'을 먹는다. 고사리와 대파를 넣고 푹 끓인 것이다. 먼저 두툼한 냄비를 불에 달궈 파기름을 만든다. 거기에 고춧가루를 넣고 볶다가 물을 붓고 고사리, 대파, 표고버섯을 듬뿍 넣어 끓이면 끝. 육개장처럼 얼큰하고 훌훌 불며 먹으니 땀이 나면서 몸이 후끈..
2021-12-29
최강 먹보왕 '히밥'엔 어림없지만 나 역시 먹는 거라면 체면 따지지 않는 거 너도 알지? 도우가 두툼한 피자도 네 쪽 반이나 먹어치우니 말야. 내 몸의 중심 위장(胃腸)아, 애 많이 쓴다. 그런데 지지난주 휴일에 스타벅스 초코조각케이크를 후식으로 먹고 나서 뱃속이 조청..
2021-12-08
삼겹살은 회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메뉴다. 6년 전인가? 그날도 편집국 송년회에서 삼겹살을 먹었다. 직원들은 고기와 술로 텅 빈 위장을 채우느라 바빴다. 나는 여자 후배들과 남자 후배 하나랑 둘러앉았다. 두툼한 삼겹살이 불판에서 지글지글 익어갔다. 상추에 고기 두어점을..
2021-11-17
대학 3학년을 마치고 또 휴학을 하고 고향 집에서 빈둥거리던 시절이었다. 징글맞은 학교와 도시를 벗어나니 한없이 한가로웠다. 요양 차 내려온 딸내미를 보는 부모는 복창 터질 일이지만 이렇다 저렇다 한 마디도 안했다. 먹고 놀고 먹고 놀고. 한량이 따로 없었다. 한낮의..
2021-10-27
이맘 때 우리 가족은 으레 서해 바닷가로 전어를 먹으러 간다. 드디어 만났다, 요놈! 왕소금을 뿌려 구운 전어를 손에 들고 대가리를 한 입에 넣고 베어 먹는다. 아, 이 맛. 씹을수록 고소하고 육즙이 흘러 입술이 금세 번들거린다. 전어는 버릴 게 없다. 뼈도 연해서 다..
2021-10-06
조선의 이단아이자 천재였던 허균도 식탐이 많았다. 그는 "나는 평생 먹을 것만 탐한 사람"이라고 호기롭게 말했다. 허균은 지방의 수령으로 부임할 때 윗사람에게 간곡히 부탁하곤 했다. 먹거리가 풍부한 곳으로 보내달라는 이유에서다. 한번은 황해도 배천이란 곳으로 발령나자..
2021-09-15
국수는 별미다. 국수는 많이 먹어도 금방 소화돼 위에 부담이 없다. 올 여름엔 일주일에 두 번 꼴로 국수를 해먹었다. 삶은 국수에 매콤한 양념장을 만들어 오이, 상추 등을 넣고 비벼먹는 국수야말로 먹는 행복의 묘미를 느끼게 한다. 오래전부터 꼭 먹어보고 싶은 국수가 있..
2021-08-25
퇴근 길에 복숭아 한 보따리를 샀다.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시골에서 온 듯한 중년의 부부가 팔고 있었다. 부부는 대전 근교에서 복숭아 농사를 짓는다고 했다. 저녁을 먹고 서둘러 설거지를 끝냈다. 거실 한 켠에 놓은 복숭아 향이 사방팔방 진동해 침샘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2021-07-28
일 자로 된 허름한 건물이었다. 처마 아래 낡은 의자에 노파가 몸을 잔뜩 구기고 앉아 졸고 있었다. 한 낮의 땡볕이 너른 마당에 내리 꽂혔다. 적막감이 감돌았다. 이제는 고전이 된 서부영화의 한 장면이 연상됐다. 당장 엔니오 모리코네의 '황야의 무법자' OST가 울려..
2021-07-07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감자들은 땅을 더럽혔고, 구덩이들은 고름으로 더러운 둔덕을 만들었다. … 지금도 그 슬픔의 냄새를 맡나니.' 19세기 중반 아일랜드 대기근은 참혹했다. 나라 전체 인구의 4분의 1이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당시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감자는 유일한 생..
2021-06-16
농촌은 모내기철이 가장 바쁘다. 보리 베고 모 심고 한해 농사의 수확과 시작이 맞물려 허리 한번 펼 새 없는 계절이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큰오빠는 군대에 있었다. 오빠는 그해 초여름에 포상휴가라는 걸 나왔다. 행군을 했는데 1등을 했다는 것이다. 손 하나라도 아쉬..
2021-05-26
퇴근시간이 다가온다. 갑자기 허기진다. 눈은 교열 대장을 들여다보고 있지만 머릿속은 음식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하다. 삼겹살 먹을까? 아삭아삭한 노지 포기상추 맛있던데. 상추에 금방 지은 밥과 육즙 터지는 고기 두점, 양파 서너 쪽 그리고 쌈장을 얹어 크게 한 입. 하아..
2021-05-06
하늘을 찌를 듯이 곧게 뻗은 삼나무가 늘어선 길을 천천히 걸었다. 싱그러운 바람이 코끝을 간질였다. 간밤 귀신 우는 소리를 내며 세상을 집어삼킬 것 같았던 폭풍은 온데간데 없었다. 딴 세상이었다. 천상에 발을 디딘 걸까. 밤새 거친 바람소리에 뒤척여 찌뿌둥한 몸이 날아..
2021-04-14
봄은 생명의 계절이다. 나무에 싹이 돋아 앞산 뒷산이 녹색으로 물들고 있다. 동면에서 깨어난 뱀도 따스한 햇살에 일광욕 하느라 사람이 지나가도 모른다. 새로 태어난 다람쥐 가족도 선보일 것이다. 봄엔 먹을거리가 풍부하다. 산과 들엔 나물 천지다. 사실, 고기보다 맛있는..
2021-03-24
꼬르륵. 뱃속에서 밥 달라고 아우성이다. 벌써 점심시간이다. 모처럼 우리 부서의 조촐한 회식이다. 코로나 땜에 배달음식을 시켜먹기로 했다. 메뉴는 분식. 나는 김치볶음밥을 주문했다.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매콤한 김치볶음밥. 생각만 해도 입안에 침이 고였다. 탁자 위에..
2021-03-03
도시락을 싸갖고 다니기 전, 일주일에 꼭 한번은 가는 식당이 있었다. 회사 근처에 있는데 짜장면이 맛있기로 소문난 집이었다. 사실 동네에 흔한 게 중국집 아니던가. 짜장면 맛도 거기서 거기고. 아마 중국요리에서 가장 간단한 요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성산반점의 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