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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우난순 기자 |
“그는 따뜻한 인간들의 마을들을 지나쳐버리며 고독에서 고독으로 걸어갔다. 다른 누구보다도 더 깊이 죄악 속으로, 야수의 발자국이 새겨진 미지의 길을 따라 점점 더 차갑고, 점점 더 결정적인 고독을 향해 나아갔다. 인륜(人倫)의 세계 안에 자신의 영혼을 쉬게 하는 대신 어떤 비극을 무릅쓰더라도 최후의 한순간에 전세계를 자신의 손에 거머쥐기를 열망했다.”
웅장하고 위엄에 찬, 결기로 똘똘 뭉친 난세의 영웅을 보라. 악마와의 결탁을 마다하지 않고 신념에 찬 자신의 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불세출의 영웅은 누구인가. 영웅의 길은 고독한 것! 어리석은, 선한 자들의 아우성과 간절한 손길을 뿌리치고 죄악의 구렁텅이에 한 발짝 다가서는 최후의 영웅의 손에 묻은 시뻘건 피는 누구를 위한 제물인가.
소포클레스나 아이스퀼로스의 ‘그리스 비극’에 나오는 영웅이 아니다. 서두가 길어졌다. 쌍따옴표 안의 인용 글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소재로 한 이인화(류철균)의 소설 『인간의 길』의 ‘작가의 말’에 나온다.
박정희에 열광하던 엘리트 청년 이인화, 지금은?
소설가 이인화에게 박정희는 누구인가. 이인화가 선택한 인간의 길은 무엇인가. 지금 이인화는 영어의 몸이 됐다. 박근혜와 최순실의 부역자 노릇을 하다 하루아침에 죄인이 되어 철창신세를 지게 됐으니 말이다. 어쩌면 오래전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박정희의 분신 박근혜의 말로가 퍼즐 맞추듯 완벽하게 짜여진 것처럼 이인화 또한 그러하지 않은가. 이인화에게, 줏대도 없고 주변도 없고 시류와 유행에 편승하는 지식인들이 옳다고 할 바에야 박정희는 백번 위대한 사람이었다. 소심한 인간들의 겁먹은 눈을 들여다보느니 차라리 불의와 타락에 몸을 적시며 이상을 향해 매진했던 박정희는 초인 그 자체였다.
콤플렉스 없는 인간이 어디 있을까. 콤플렉스는 발전과 창조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왜곡된 콤플렉스는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이인화는 자신의 유약한 심성을 나약한 지식인에 투사시켜 그들을 경멸해 마지 않았던 것이다. 지식인의 허위와 위선. 사실 그들처럼 가증스러운 부류는 없다. 순진한 청년 이인화와 박정희의 만남은 그래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마키아벨리즘의 박정희가 이인화의 숭배의 대상이 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미시마 유키오의 소영웅주의를 보는 듯한 이인화의 위험한 ‘판타지’는 결국 그에게 덫이 되어 비굴한 엘리트로 전락하고 말았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긴 여정의 길을 가야 한다. 어느 길을 선택하냐는 건 개인의 문제지만 사람들은 그 길을 타고난 운명이라고 단정짓기도 한다. '영원한 제국' 등 베스트셀러 소설가였고 대학교수로 잘 나가던 지식인 이인화가 수의를 입고 수갑 찬 모습이 운명이라면 이보다 가혹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당장 내일도 기약할 수 없는 막노동 인생에서 시인이자 노동활동가로 사는 송경동은 어떤 길을 걷고 있나.
거대자본의 폭력에 맞서는 시인 송경동이 많아져야 하는 이유
송경동. 한진중공업 김진숙씨의 고공시위를 지지 방문하는 ‘희망버스’ 기획,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5명의 목숨까지 잃은 용산 대참사, 세월호 참사, 쌍용차 해직 근로자 연대 시위, 유성기업 사태 등 거대자본의 오만과 폭력에 맞서는 사람. 그는 일년의 반을 거리에서 살다시피하고 공권력에 맞서 싸우다 감옥도 들락날락한다. 지금은 광화문캠핑촌장으로 박근혜 퇴진운동을 벌이며 광장에서 노숙하고 있다.
그의 시는 노동을 노래한다. 노동은 삶에 대한 통찰, 사람을 지혜롭게 만드는 조건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불우한 가정환경과 소년원 출신에, 밑바닥 노동자로서의 신산한 삶의 경험은 이제 그에게 주옥같은 시의 자산이 되었다. 그는 시인이 되고 싶어서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상처와 설움과 분노로 응축된 몸에서 시는 저절로 튀어나오고 쏟아져 나왔다. 그는 운명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재조직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자신의 운명을 바꾸려는 노력이 사회구조를 바꾸는 일로까지 나아가야 하는 일임을 알게 됐다. 그래서 착취와 지배와 폭력이 본성인 자본주의에 맞서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다. 그는 구조적으로 모순된 이 사회에서 희망의 싹을 틔우는 방법은 노동자와 사회적으로 소외된 하층민과 연대할 때 가능하다고 줄기차게 호소한다.
“어느 사회의 양식을 가늠해보는 한 기준은 그 사회의 소수파가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가다.” 아이러니하게도 극우 성향의 저널리스트 조갑제가 옛날옛적에 한 말이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작가의식에 대해 생각해본다. 부르주아 삶을 지향하면서 입으로만 노동의 가치를 나불대는 인텔리 작가들이 흉내낼 수 없는 시를 송경동은 쓰고 있다. 퇴근하고 집 옆 공원에서 운동하면서 서쪽 하늘에서 홀로 반짝이는 금성을 보게 된다. 게오르그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 첫 구절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밤하늘의 별을 보며 나 또한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는지 고민해 본다.
우난순 기자 rain4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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