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칼럼] R&D 예산, 미래를 위한 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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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칼럼] R&D 예산, 미래를 위한 종자

이용규 한국기계연구원 기계기술정책센터장

  • 승인 2023-10-19 16:55
  • 신문게재 2023-10-20 18면
  • 임효인 기자임효인 기자
이용규 한국기계연구원
이용규 한국기계연구원 기계기술정책센터장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의 레닌그라드 (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독일군에 871일간 포위돼 아사자, 동사자가 속출하고 폭격과 질병으로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죽어갔다. 이 와중에도 소련 최대의 농업 작물 종자를 보존하던 파블롭스크 실험국은 독일의 포격뿐만 아니라 굶주린 해충, 들짐승, 시민까지도 경계하며 소련 농업의 미래를 지켜냈다. 이 과정에서 여러 과학자가 톤 단위의 식량이 될 수도 있는 종자를 옆에 두고도 절대 손대지 않고 배고픔의 고통과 싸우다가 아사하고 말았다. 이렇게 목숨을 바쳐 지킨 종자는 후에 소련 식량의 복구에 기여하고, 1970년대에는 에티오피아의 대기근을 구해내기도 한다.

우리 사회 전체를 볼 때, 연구개발은 사회 발전을 위한 종자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나라가 아무리 힘들어도 먹어 치우면 안 되는 사회의 종자, 미래를 싹틔우기 위한 투자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세계에서 유례없는 빠른 성장과 번영을 이루어 낸 데에는 과학기술에 대한 끊임없는 투자가 큰 역할을 해왔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33년 만에 R&D 예산을 전년 대비 무려 6의 1이나 삭감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많은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전체 국가 예산은 18.2조 원, 전년 대비 2.8% 증가한 데 비해, R&D 예산은 31.1조 원에서 2024년 25.9조 원으로 크게 줄어들어 R&D 분야만 유독 허리띠를 졸라매는 모양새이다. 얼마 전 누리호 발사 성공으로 많은 관심을 받았던 항우연도 예외 없이 과기출연연의 연구예산은 20% 이상, KAIST 등 과학기술원은 10% 이상 삭감되었다. 예산삭감과 함께 추진되는 혁신방안에는 상대평가 도입과 하위 20% 구조조정을 포함하고 있어 연구현장의 어려움이 가중될 것으로 보인다.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은 연구 현장의 혼란과 현재 수행하고 있는 R&D 과제의 차질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매우 큰 변화인 만큼 충분한 준비와 논의 과정은 필수적이지만 이번 예산삭감은 '과학기술기본법' 제12조에 따른 정부 예산(안) 확정 전날, 급박하게 이뤄진 측면이 있다. 예산삭감의 합리적 근거 제시를 요구하며 과학기술계는 반발의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과제를 수행 중인 연구자는 예산삭감에 따라 연구 진행에 차질이 발생할 것을 걱정하고 있고, 일부 사업은 90%가 삭감되면서 과제 진행 여부를 고민하기도 하고 있다.



예산삭감은 당장의 연구개발 활동에 대한 차질로 그치지 않는다. 미래 국가 R&D 역량에 영향을 미친다. 최근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우수 인재의 의대 편중 현상은 더욱 심각해질 것이고 이공계 기피 현상은 더욱 심해질 수 있다. 가장 가까운 미래 R&D 세대라 할 수 있는 박사후연구원, 학생연구원 등 연수직 연구원이 가장 직접적인 피해를 볼 것으로 우려하고 있으며, 정부의 평가제도 개편 등에 따라 신진연구자가 불이익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장기적으로는 고급 연구개발 인력 기반이 무너지고 연구 현장이 황폐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지금은 일방적인 R&D 예산삭감보다는 연구 현장과 허심탄회한 논의를 거쳐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할 때이다. R&D 예산 규모가 커진 만큼 이제는 연구의 질을 높이고 선도형으로 전환하기 위한 구조 개편이 필요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삭감 예산안 작성이 제대로 된 고민의 과정을 거쳤는지, R&D의 역할에 대한 인정과 존중이 있었는지, 연구 현장과 충분한 소통이 있었는지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문제이다. R&D의 역할에 대한 인정과 연구 현장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바람직한 정책 방향을 찾는 데 모두의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다. 이용규 한국기계연구원 기계기술정책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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