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만필] '굳이'라고 물었던 너에게

  • 오피니언
  • 교단만필

[교단만필] '굳이'라고 물었던 너에게

김영욱 대전고 교사

  • 승인 2024-06-13 17:32
  • 신문게재 2024-06-14 18면
  • 임효인 기자임효인 기자
clip20240613092047
김영욱 대전고 교사
왜 굳이 다음 학교가 대전고였냐고? 워라밸? 중요하지. 그런데 살다 보니 양팔 저울 왼쪽에 내 행복과 오른쪽에 내 힘듦을 견주며 평행을 맞추려 노력하는 게 더 어렵더라고. 폼나게 이야기하려는 것 아니냐고? 그래, 어쩌면 그 말이 맞겠네. 폼나게 이야기하려 해. 적어도 남에게 보여지는 폼이 아니라 스스로 갖출 품격이라면 폼. 그 말 좋겠다.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어. 코로나 이후 변해버린 고등학교의 밤 풍경을. 예전같으면 밤늦게까지 학교에 선생님과 학생들이 남아 있다가 10시면 우르르 교문을 나서는 밤 풍경, 이제는 보기 힘들다는 것 잘 알아. 그런데 말이야, 아직 대전고는 그렇더라고. 여전하다는 말이 적절하겠네. 아이들이 학교를 믿어 학교에 있어, 그 밤에도. 방과후 수업에도 대부분의 아이들이 남아 있고 밤 10시까지 학교가 환해. 불야성이라고 말하면 믿을까? 네가 직접 봐야 알 텐데. 문제집만 잡고 계속 푸는 게 공부는 아닌 거 나도 알지. 그래서 대전고라는 학교 공간도 아이들도 바뀌어 있더라고. 늦은 시각 아기자기한 공간 안에 아이들이 삼삼오오 있어. 논문이랑 공식을 화면에 띄우고 이야기하는데 사실 나는 내용은 모르니까 그 내용을 말하긴 어렵지. 다만 공부할 거리를 스스로 찾아 함께 한다는 즐거움이, 눈빛이 담겨 있는 건 아이들의 표정을 보니 알겠더라고.

밤늦게까지 힘들지 않냐고? 힘들지. 안 힘들다고 하면 거짓말일 거야. 그런데 사람과 사람의 틈 사이에서 오는 희열이 여긴 아직 있더라고. 너도 잘 알 거야. 휴일에 거실에 가족끼리 앉아 있으면 누군가는 휴대폰 속 세상에서 살고 있으면서 몸 한 편만 가족 곁에 뻗어놓고 있다는 거. 가장 가깝다는 가족들도 이제는 서로의 눈을 깊게 보며 이야기하고 살 부딪히며 서로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내밀하게 대화로 나누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 잘 알잖아? 그런데 여기 대전고에는 휴대폰이 없더라. 진짜야. 그렇더라고. 4무 운동이라고 부르더라. 휴대폰, 자는 학생, 담배, 학교폭력 이 네 가지가 없다더라. 아니, 아침에 휴대폰을 담임 선생님이 걷는 게 아니야. 그냥 없어. 가져오질 않는 거야. 그러니 아침 풍경이 다르더라고. 교문을 지날 때 아이들과 선생님이 인사로 시작해. 거기서 틈이 생겨. 웃으며 눈을 마주할 수 있는 그 틈이.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이 제일 신기해. 휴대폰이 없는 남자 아이들이 뭘 할까 생각해봤어? 그 틈은 대화와 사람이 메우더라고. 함께 공을 차고, 대화하고, 책 읽고, 산책하고, 그냥 돌아다니기도 하고. 작은 화면 하나가 사라지면 그 자리를 우리는 다른 사람으로 메우더라고.

진짜 안 자냐고? 졸린 애들이 왜 없겠어? 고등학생이잖아. 그런데 듣더라. 그게 제일 좋았어. 사실 교사로서 가장 힘든 순간은 내 수업을 아이들이 벽처럼 밀어낼 때잖아. 대전고는 벽이 아니더라고. 듣고 질문하고 말하고 웃더라고. 오랜만이었어. 교실을 나서면서 내가 가르치는 중이라고, 참 보람차다고 느끼는 경험, 꽤 오랜만이었어. 아이들이 참아주는 것 아니냐고? 그래,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내 수업이 일타 '인강' 강사처럼 화려하고 재밌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배움이란 건 어쩌면 스며드는 일일 것 같아. 아이들이 내게 스며들고 나도 아이들에게 스며드는 걸 테니까.

아! 그러고 보니 생각난다. 우리 학년 모 담임 선생님이 "부장님도 대며들고 계시군요"라고 말했어. '대며들다'가 뭐냐면 '대전고에 스며든다'는 거야. 내가 보기에는 스며들어서 점점 물드는 것 같아. 동화(同化)랑은 달라. 논어에 나오는 '화이부동(和而不同)' 알잖아. 완벽히 똑같지는 않고 자신만의 색깔은 있지만 서로 다르지 않은, 함께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끈끈한 공동체 말야. 여긴 그게 아직 있더라고. 입학식에서 울려 퍼지는 재학생들의 관현악 합주의 웅장함이 심장을 요동치게 하기도 하고, 팔순 넘으신 어르신들이 대전고 선배라고 오셔서 힘내라는 말을 나지막이 전할 때 찌르하게 나도 여기서 함께 숨쉬는 사람이라고 느껴. 적어도 이것저것 재는 것보다 지금, 여기에서 보람을 느낀다면 가치 있는 삶이 아닐까? 너도 한 번 와보면 알 거야. 아직도 여전히 그런 학교가 있다는 거. 그게 대전고라는 거 말야. 김영욱 대전고 교사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타임월드 매각 검토에 둔산 상권 촉각…백화점 유지 변수
  2. 당진푸르지오3차 입주민, 투기꾼 탓에 추가 분담금 위기 맞자 '어깨띠' 매고 거리로
  3. 대전 한전 전력연구원 ESS 화재…배터리팩 28개 전소
  4. 행정수도 온통대전 충청 밥상머리 민심 관통 전망
  5. 최재근 일자리진흥원장과 전용석 대전신보재단 이사장 각각 임명
  1. 대전시 지역 첫 방산 소부장 특화단지... 'AX 클러스터' 시정동력 탄력
  2. 허태정 "트램 흔들림 없이 추진" 정상 추진의지 밝혀
  3. 중부권 최대 민속놀이 대축제…제36회 충남도지사배 민속대제전 성료
  4. 석 달 파행 끝낼까…대덕구의회 21일 의장단 선출
  5. 충남 천안·아산 7개 산업단지, 반도체 후공정 특화단지 지정

헤드라인 뉴스


충남 3선 국회의원 지낸 강훈식 청와대 비서실장 사의

충남 3선 국회의원 지낸 강훈식 청와대 비서실장 사의

충남 아산시을 지역구에서 3선 국회의원을 지냈던 강훈식 청와대 비서실장이 21일 사의를 밝혔다. 성기홍 청와대 홍보소통수석은 이날 오후 춘추관 브리핑에서 "강훈식 청와대 비서실장은 오늘 오전 이재명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명했다"고 말했다.대통령을 보좌하는 비서실장으로서 2025년 이재명 정부 초대 비서실장에 임명된 지 1년 4개월 여만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대통령의 지난주 기자회견에서 국정을 바라보는 국민 시선에 대해 자신의 부족함 탓이라고 수차례 말한 상황에서 대통령을 보좌하는 비서실장이 종합적으로 책임을 지는 차원에서 사의를 표..

저축성예금 50조원 목전 둔 대전... 은행권 예금 금리 경쟁에 더 오를까
저축성예금 50조원 목전 둔 대전... 은행권 예금 금리 경쟁에 더 오를까

주요 시중은행이 앞다퉈 정기예금 금리를 올리며 금융소비자 모시기에 나서면서 50조 원을 목전에 둔 대전 예금은행 저축성예금 수신 잔액도 크게 오를 전망이다. 최근 시장금리가 오르면서 은행들이 수신 경쟁을 본격화하고 있는데, 정기예금 금리를 3% 중반까지 올리고 있다. 21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은행은 이날부터 대표적인 정기예금 상품 금리를 0.1%포인트 올렸다. 지난 14일 같은 상품 금리를 최고 0.6%포인트 올린 이후 일주일 만에 추가 인상이다. 이에 따라 1년 이상 2년 미만 만기 예금 금리는 연 3.4%에서 3.5%로 올..

충청권 AI활용 발전비전 전력공급 원활한 확보 시급… 화력발전 의존 장래에 불리
충청권 AI활용 발전비전 전력공급 원활한 확보 시급… 화력발전 의존 장래에 불리

충청권 지자체가 인공지능(AI)을 활용한 방산·바이오·반도체 산업을 미래 성장동력으로 육성하려 AI 데이터센터에 투자하고 있지만, 필요한 전력 확보가 주요 현안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충청권은 석탄화력발전 의존도가 높은 데다 송전망과 무탄소 전원 여력이 충분하지 않아 향후 데이터센터가 본격 가동되면 전력 공급에 병목이 발생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21일 한국전력 대전충남본부와 에너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대전·세종·충남·충북이 AI를 활용한 성장전략에 집중하면서 AI 데이터센터 투자가 확대되고 있으나 전력공급이 중요한 현안으로 떠오르고..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지방의회법 제정을 촉구한다’ ‘지방의회법 제정을 촉구한다’

  • 미리 보는 2026 지상군페스티벌…유·무인 복합전투체계 실전 시현 미리 보는 2026 지상군페스티벌…유·무인 복합전투체계 실전 시현

  • ‘풍요로운 추석 명절 보내세요’ ‘풍요로운 추석 명절 보내세요’

  • 차례상 차리기 배우는 어린이들 차례상 차리기 배우는 어린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