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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12월 31일 대전 동구 골령골 학암 이관술 선생 고유제에서 손녀 손옥희 씨가 할아버지의 재심 무죄 선고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임병안 기자) |
이날 고유제에서 외손녀 손옥희 씨는 "과거의 역사가 남긴 상처를 치유하겠다는 역사를 근간으로 하는 단체와 개개인의 노력 덕분에 사건 발생 79년 만에 '이관술은 무죄'라는 판결이 나왔다"라며 "없는 죄를 만들어 최대의 모욕과 박해를 해도 죽지 않고 살아나게 하는 힘이 작용하고 있다고 느끼고, 독립유공자 서훈을 국가보훈부에 다시 신청하겠다"라고 밝혔다.
이관술은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지내다 1930년 경성학생독립운동에 나선 학생들을 보호하며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일제강점기 '경성트로이카'와 '경성콤그룹'을 이끌며 해방 직전까지 국내 항일 투쟁의 최전선에 선 항일 운동가였다. 해방 직후 여론조사에서 여운형, 김구, 이승만, 박헌영과 어깨를 견주며 '나라를 이끌 지도자' 5위에 오를 만큼 대중적 신뢰를 얻고 주목 받았다. 하지만 1946년 미군정기, 실체 없는 조선정판사 위조 지폐 사건의 주모자로 낙인찍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서울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그는 1947년 4월 대전형무소로 이감됐다. 그리고 6·25 전쟁이 발발하고 1950년 7월 3일 대전 골령골에서 송언필(1902-1950)과 함께 공권력에 의해 불법적으로 처형됐다. 이관술은 항일운동으로 일경의 체포를 피해 대전의 한 고물상에서 폐품을 모아 생활하는 넝마주의와 함께 지낼 때 광복을 맞았고, 그가 재판받을 때부터 대전형무소에 수감될 때조차 그에 대한 많은 기사가 발행됐다. 당시 대전형무소 교도관이었고 이준영 씨가 이관술의 처형 순간을 "조선 민족 만세" 부르는 장면으로 기억했고, 지금껏 증언록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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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성욱 한국외국어대학교 특임강의교수. |
이관술의 유해는 아직 골령골에 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그의 막내딸로 유일한 생존자인 이경환(91) 할머니의 유전자를 지난해 등록했다.
전숙자 대전 산내사건 희생자 유족회장은 "이곳에서 희생된 이관술 선생이 사실은 무죄이었음이 밝혀졌고, 마찬가지로 골령골의 진실을 인정하지 않는 여러 말이 바람결에 날아가도록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달라"고 당부했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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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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