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서 신화 읽기] 제4장-식장산, 효가 담긴 풍요와 절제의 산

  • 문화
  • 문화/출판

[대전에서 신화 읽기] 제4장-식장산, 효가 담긴 풍요와 절제의 산

한소민/배재대 강사, 지역문화스토리텔링연구소 소장

  • 승인 2026-03-03 16:08
  • 신문게재 2026-03-04 8면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대전 식장산은 과거 군량미를 비축하던 군사 요충지라는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굶주림의 고통 속에서 풍요를 갈망하던 민초들의 염원이 담긴 '요술 식기' 전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전설은 자식을 희생해서라도 노모를 봉양하려 했던 절박한 효심과 기근의 아픔을 투영하고 있으며, 보물을 얻은 뒤에도 욕심내지 않고 다시 산에 묻었다는 결말을 통해 대전의 정신인 절제의 미덕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식장산은 현대적 통신 시설을 품은 채 과거로부터 이어온 충·효·예의 가치를 되새기게 하며, 끝없는 욕망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진정한 절제와 성찰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대전 식장산1
대전 식장산 정상에 위치한 정자 전경 /출처=대전시
대전 동남쪽에 우뚝 솟은 식장산(食藏山). '먹을 것을 쌓아 둔 산'이라는 뜻을 지닌 대전에서 가장 높은 산이지요. 풍요로운 축복처럼 들리는 이 이름 뒤에는 전쟁과 처절한 굶주림의 기억이 깃들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식장산은 평범한 산이 아니었습니다. 웅진 천도 이후 6세기경의 이곳은 백제와 신라의 경계인 군사적 요충지였지요. 산줄기를 따라 15개의 성곽이 이어졌고, 병사들을 위한 군량미가 비축된 방어의 최전선이자 거대한 저장고였습니다. 산 어딘가에 쌓여 있었을 식량과 지휘관들이 사용하던 귀한 그릇들은 접경지 주민들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이것은 곧 '삼 년 먹을 보물이 숨겨진 산'이라는 화수분 이야기를 낳게 됩니다.

식장산 전설의 핵심은 자식을 묻어 부모를 봉양하려 한 '매아(埋兒)' 모티프입니다. 그 기원은 중국 후한 시대의 곽거 설화로 거슬러 올라가지요. 가난한 곽거가 노모의 음식을 축내는 아들을 묻으려 땅을 팠을 때, 하늘은 황금 솥을 내려 그의 효심에 응답했습니다. 이 서사는 한반도로 건너와 『삼국유사』 「효선」 편의 '손순매아'로 변용되며 전국 곳곳에 비슷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내지요. 신라의 손순 역시 굶주리는 노모를 위해 아이를 묻으려다 신비한 돌종을 얻게 됩니다. 이후 임금으로부터 집과 곡식을 하사받아 옛집에 홍효사를 세웠다는 사찰 연기설화로 끝을 맺지요. 식장산 전설은 이 계보를 따르면서도 대전만의 지역성을 가집니다.

옛날 식장산 기슭에 홀어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모시는 효자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지독한 흉년 속에서 효자 아들은 피눈물 나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자식은 다시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모실 수 없다는 절박함으로, 노모의 음식을 빼앗아 먹는 어린 아들을 산에 묻기로 한 것이지요. 아내와 같이 산으로 올라 땅을 파 내려가던 순간, 괭이 끝에서 그릇 하나가 나타납니다, 음식을 담으면 계속해서 솟아나는 요술 식기였죠. 그는 이 식기로 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했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미련없이 제자리에 묻었습니다. 이후 식기가 들어있는 산이라 해서 식기산, 식장산으로 불리게 되었지요.

식장산
대전 식장산 모습 /출처=대전 동구
이 전설은 손순매아에 담긴 불교적 의미 대신 식량이 끊임없이 쏟아진다는 풍요가 담겨 있습니다. 군량을 비축하던 식장산의 역사적 기억이 흉년과 굶주림에 허덕이던 백성들의 갈망과 겹쳐지며 풍요의 화수분 서사로 전환된 것이지요. 아이를 묻는다는 잔혹한 설정 이면에는 기근과 흉년으로 굶주리고 있을 때 가장 약한 존재를 희생시켜야 했던 참혹한 현실이 숨어 있습니다. 괭이 끝에서 나타난 요술 식기는 인륜을 저버릴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아픔이 그려낸 꿈이었겠지요. 현실의 고난이 깊을수록 환상의 보상은 더욱 찬란해지기 마련이니까요.

이야기는 결국 절제로 마무리됩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효자는 요술 식기를 다시 산에 묻습니다. 더 이상 욕심 부리지 않고 하늘이 준 복을 제자리로 돌려놓지요. 이는 예학의 전통을 지녀온 선비의 고장, 대전의 정신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산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역민과 맺는 관계와 의미는 시대마다 달라지지요. 전투의 긴장감 속에서 군량을 담고있던 산은, 흉년의 시대에는 하늘을 감동시킨 효자에게 풍요를 전했고, 절제의 미덕 덕분에 다시 요술식기를 품게 되었습니다.

국경을 지키려 식량을 비축했던 충, 노모를 봉양한 효, 욕망을 절제한 예가 한 자리에 녹아있는 식장산 정상에는 지금 거대한 방송 송신탑들이 서 있습니다. 송신탑을 머리에 이고 온갖 영상과 소리를 쉼 없이 전송하는 산은 지금 우리에게 묻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이 현란한 환상 속에서 우리는 진정 무엇을 갈망하고,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흔들리며 욕망하는 이 마음을 도대체 어떻게 절제해 나가야 하는지를 말입니다.

한소민/배재대 강사, 지역문화스토리텔링연구소 소장

한소민-최종
한소민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대전 구봉터널 또 연쇄 추돌사고… 8명 경상·도로 전면 통제
  2. 대전웰다잉연구소-아마준돌봄장례협동조합, 협력 체계 구축 업무협약
  3. [날씨] 16일 오후 장맛비 시작… 충청권 최대 60㎜
  4. 호텔 ICC, 8월 16일 '웨딩 쇼케이스' 개최…결혼 준비 한자리에서
  5. [세상읽기]뫼비우스의 띠에 갇힌 한국축구
  1. 국군사관학교 대전 유치…허태정 시정 동력확보 모멘텀
  2. 원자력 추진 선박 시대…한국원자력연 SMR 국제 기본인증 획득
  3. "민선 9기 대전시 수동적 자세 아닌 국가 아젠다 선도 전략 제시 필요"
  4. 세종 '교육문화원' 25일 활짝… 복합 교육문화 플랫폼 도약
  5. 세종 글로벌 진로탐험대 가시밭길… 시의회도 "예산 있나"

헤드라인 뉴스


`대통령 세종 집무실` 설계 지연… 2029년 문 열 수 있나

'대통령 세종 집무실' 설계 지연… 2029년 문 열 수 있나

'대통령 세종 집무실' 설계가 두 달 남짓 지연되면서, 2029년 8월 정상 개관 여부에 관심을 모으고 있다. 수도 서울의 상징인 청와대가 완공된 1991년 이후 38년 만에 행정수도 세종에 문을 연다는 의미는 남다르기 때문이다. 국가균형성장과 수도권 과밀 해소란 시대적 과제를 실현하는 한편, 지방분권의 새 장을 마련한다는 뜻에서도 정상 건립은 중요하다. 강주엽 행복청장은 지난 16일 대통령 업무보고를 통해 "현재 설계 과정이 두 달 남짓 지연됐다. 대통령 세종 집무실 건립이 지연되지 않는다고 단정해 말씀드릴 순 없다"라며 "속도가..

장종태 "당원 중심 원팀 개혁"… 민주당 대전시당위원장 출사표
장종태 "당원 중심 원팀 개혁"… 민주당 대전시당위원장 출사표

더불어민주당 장종태 국회의원(대전 서구갑)이 "당원 중심 원팀 개혁과 대전시당의 전면적인 쇄신을 추진하겠다"며 민주당 대전시당위원장 출마를 공식화했다. 장 의원은 16일 대전시의회 1층 로비에서 출마 기자회견을 열어 "당원이 주인인 강한 시당, 시민이 자랑스러워하는 유능한 민주당을 반드시 만들겠다"며 "당원 동지, 대전 시민들과 함께 새로운 대전의 시대를 열겠다"고 밝혔다. 장 의원은 당원 중심 정책 광장 조성과 상시 소통 협력체계 구축, 지방의원 맞춤형 지원시스템 가동, 정부 예산 확보를 위한 원팀 공동대응단 운영, 충청권 광역교..

`대통령 세종 집무실` 설계 지연… 2029년 문 열 수 있나
'대통령 세종 집무실' 설계 지연… 2029년 문 열 수 있나

'대통령 세종 집무실' 설계가 두 달 남짓 지연되면서, 2029년 8월 정상 개관 여부에 관심을 모으고 있다. 수도 서울의 상징인 청와대가 완공된 1991년 이후 38년 만에 행정수도 세종에 문을 연다는 의미는 남다르기 때문이다. 국가균형성장과 수도권 과밀 해소란 시대적 과제를 실현하는 한편, 지방분권의 새 장을 마련한다는 뜻에서도 정상 건립은 중요하다. 강주엽 행복청장은 지난 16일 대통령 업무보고를 통해 "현재 설계 과정이 두 달 남짓 지연됐다. 대통령 세종 집무실 건립이 지연되지 않는다고 단정해 말씀드릴 순 없다"라며 "속도가..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실종된 태극기 실종된 태극기

  • ‘제헌절에 대해 공부해요’ ‘제헌절에 대해 공부해요’

  • 나에게 맞는 대학은? 나에게 맞는 대학은?

  • 초복 앞두고 북적이는 삼계탕집 초복 앞두고 북적이는 삼계탕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