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만필] 가을에 피는 꽃을 어찌 늦다 하겠는가

  • 오피니언
  • 교단만필

[교단만필] 가을에 피는 꽃을 어찌 늦다 하겠는가

  • 승인 2026-08-27 17:44
  • 신문게재 2026-08-28 18면
  • 박수영 기자박수영 기자
문성준 여권사진 2020(1)
문성준 대전맹학교 교장
한비야 작가의 글에서 마음에 오래 머무는 구절이 있다. 봄에 화사하게 피어나는 개나리와 진달래도 아름답지만, 차가운 가을바람 속에서 그윽한 향을 품어내는 국화 역시 그에 못지않게 고결하다는 이야기다. 꽃마다 봉오리를 터뜨리는 계절과 시간이 다를 뿐, 어느 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은 없다.

필자가 근무하는 맹학교는 유치부부터 초·중·고등부, 전공과까지 80여 명이 함께 배우는 생기 넘치는 배움터다. 대학 진학을 이루는 학생, 골볼과 육상에 도전하는 학생도 있고, 시각장애 학생들이 직접 주연과 제작, 화면해설까지 맡은 영화 《골볼》이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의 영예를 안기도 했다. 아이들은 저마다 경험할 수 있는 세상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그런 교정에서 내 시선이 더욱 오래 머무는 곳이 있다. 만물이 결실을 맺어가는 계절, 혹은 이미 겨울의 문턱에 들어선 듯한 나이에 새로운 배움의 문을 두드리는 이들이 모인 이료재활전공과다.

그들은 청춘의 봄날을 지나 사회에서 제 몫을 다하다 뜻하지 않은 실명을 만난 중도실명인들이다. 성인이 된 뒤 시력을 잃은 이들이 다시 교육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일반인에게 다소 생소할지 모른다. 하지만 교육의 문은 열려 있다. 성인 중도실명인의 직업재활을 위한 안마 수련기관이 있지만, 일부 광역시에만 있고 통학을 전제로 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맹학교에는 교육과정과 기숙사가 마련되어 있어, 집 밖으로 나서기 어려웠던 이들이 생활훈련과 직업재활을 함께 배우며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다.

교원 임용을 거쳐 다시 모교에서 교편을 잡은 지도 어느덧 33년이 흘렀다. 평교사에서 관리자가 되었지만, 교정을 스쳐 간 수많은 제자의 모습은 여전히 가슴속에 선명하다.

필자가 열일곱 살 중학생으로 맹학교 기숙사에 머물던 시절, 옆방에 군대 폭발물 사고로 실명한 형님 한 분이 지인의 손에 이끌려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어둠이 준 좌절과 고통을 이기지 못한 그는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몇 달 만에 학교를 떠났다. 그리고 정확히 25년이 지난 어느 날, 쉰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 그 형님이 다시 교문을 넘어 나를 찾아왔다.

"선생님, 제발 다시 공부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거칠어진 그의 손을 잡는 순간 울컥 차오르던 감정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17살의 까까머리 학생이었던 필자와 그가 25년의 세월을 돌아 다시 만났고, 한 사람은 교사가, 한 사람은 다시 배움을 시작하는 제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늦게 시작했지만, 과정을 성공적으로 이수했고, 지금은 당당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런 기적의 뒤에는 학생들의 굳어진 손가락을 잡고 밤낮으로 함께해 온 선생님들의 노력이 있다. 학교에서 안마와 지압을 배우고 자원봉사 현장에 나섰을 때, 봉사를 받은 비장애인이 "그동안 괴롭히던 통증이 씻은 듯 사라졌다"라며 감사하던 순간 환하게 웃던 학생들. 입학 1년 만에 한국어 강사 자격을 취득해 방과 후 수업으로 번 돈으로 기숙사에 건조기를 기증한 학생, 졸업 후 첫 월급을 후배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내놓은 제자도 있다.

교육은 단지 지식을 가르치는 일이 아니다. 절망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이 다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던 사람이 자기 손으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곁에서 함께하는 것이 진정한 교육이다.

필자가 부임하며 세운 '소중한 나를 알고 함께 성장하는 대전맹학교'라는 슬로건도 그런 믿음에서 출발했다. 아이마다 출발점이 다르고 피어나는 계절도 다르지만, 그 누구도 자신의 봄을 놓친 것은 아니다.

가을에 피는 국화는 봄의 개나리를 시샘하지 않는다. 복숭아꽃과 벚꽃을 부러워하지도 않고, 한여름 장미가 필 때 "나는 왜 이리 늦게 피나" 한탄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다 가을이 오면 오랫동안 준비해 온 향기를 세상에 퍼뜨린다.

우리 맹학교의 아이들도 그렇다. 누군가는 봄에, 누군가는 여름에, 또 누군가는 가을에 피어난다. 출발이 조금 늦었다고 해서 늦은 삶은 아니다. 자신의 계절을 믿고 기다려주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된다. 나는 그들이 언젠가 자신만의 그윽한 향기를 세상에 퍼뜨릴 날을 믿는다./문성준 대전 맹학교 교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충남대 상용직 노사갈등 160여일 만에 마침표…학내 신뢰 회복 과제
  2. 대전 갑천 엑스포다리 불꽃쇼 취소… 인파 밀집·안전사고 우려
  3. 대전 미분양 아파트 늘었는데…내년 주택시장 괜찮을까
  4. 사람 몰리는 오월드, 적자는 눈덩이… 도시공사 새 사장, 해법 나올까
  5. 단양수중보 녹조, 수공·환경청은 알고 단양군·충북도는 몰랐다
  1. 허태정 슈퍼위크…정부지원 촉구 시도지사 연대강화
  2. 제3회 서포 김만중 문학기행 성료…한글 문학의 발자취를 따라서
  3. 대전시 민선 9기 공약 77개 확정… 8조 3244억 투입
  4. 국정감사 중반전 충청 현안 조기 가시화 초당적 협력 시급
  5. 대덕구의회 파행에 구청장 단식 농성…민생 뒷전 의원들 "의정비는 인상"

헤드라인 뉴스


[2026 국감] 병무청 국감, 예체능 병역특례 제도 등 쟁점

[2026 국감] 병무청 국감, 예체능 병역특례 제도 등 쟁점

12일 대전정부청사에서 진행된 국회 국방위원회의 병무청 국정감사에선 예술·체육 분야 병역특례 제도 개선을 촉구하는 여야 의원들의 질타가 이어졌다. 이번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일부 선수들의 부적절한 언행과 함께 대중문화 분야와의 공정성 문제 등이 지적됐는데 홍소영 병무청장은 "국민 의견을 고려해 합리적인 개선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병무청 국정감사는 예술·체육 분야 병역특례 제도가 쟁점으로, 여야 의원들이 한목소리로 제도 개선을 주문하고 나섰다. 앞서 국방부와 문화체육관광위원회를 상대로 열린 국감에서도 병역특례 제도에 대한..

이번엔 대동교… 트램 공사로 15일부터 왕복 2차로 축소
이번엔 대동교… 트램 공사로 15일부터 왕복 2차로 축소

대전 도시철도 2호선 트램 건설공사에 따라 오는 15일부터 동구 대동교 일대 차량 통행이 일부 제한된다. 60년 넘은 노후 교량을 철거하고 새 교량을 건설하는 공사로 2028년 6월까지 약 21개월간 기존 왕복 4차로가 2차로로 축소된다. 특히 19일부터 유성구 대덕대교, 11월에는 충남대학교 앞 온천교 개축공사까지 예정돼 있어 트램 공사에 따른 교통 불편이 대전 주요 도로 곳곳으로 확대될 전망이다. 12일 대전시에 따르면 도시철도 2호선 13공구에 포함된 대동교 개축공사로 10월 15일부터 대동오거리~베스티안병원네거리 구간의 차량..

대전역 쪽방촌 공공주택사업 손실 메꾸려 임대주택 분양 전환
대전역 쪽방촌 공공주택사업 손실 메꾸려 임대주택 분양 전환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대전역 쪽방촌 공공주택사업 장기간 지연으로 손실액이 증가하자 공공임대주택을 줄이고 분양주택을 늘렸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미뤄진 사업 기간, 주민에게 이주비와 주거비 등은 한 푼도 지원하지 않았고, 화재와 폭염 등에 따른 건강 피해조사는 물론 준공 때까지 거주할 이주대책도 제대로 마련하지 않았다는 문제도 나왔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더불어민주당 장종태 의원(대전 서구갑)이 국토교통부와 LH가 제출한 대전역 쪽방촌 공공주택사업을 분석해 12일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이 사업은 2022년 6월 착공해 2026년..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코로나19 무료 예방접종 오늘부터 시작 코로나19 무료 예방접종 오늘부터 시작

  • 대전 주말 축제 ‘북적북적’ 대전 주말 축제 ‘북적북적’

  • 모래판 위에서 펼쳐진 한판 승부 모래판 위에서 펼쳐진 한판 승부

  • 수확 앞둔 황금 들녘 수확 앞둔 황금 들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