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여행] 담양 죽녹원·관방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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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여행] 담양 죽녹원·관방제림

바람결에 흔들, 인생의 마디가 자란다

  • 승인 2016-06-30 13:46
  • 신문게재 2016-07-01 9면
  • 우난순 교열팀장우난순 교열팀장
▲ 죽녹원
▲ 죽녹원


무더위가 눅진하게 달라붙는 날
여름비가 촉촉한 죽녹원엔
나무도 풀도 아닌 채 하늘향해
지조있게 서있는 대나무 사이로
어린시절 추억이 숨어들고…
전국서 가장 아름다운 숲 관방제림엔
세상 모든 풍미가


눅진하고 끈적한 무더위가 살갗에 거미줄처럼 착 달라붙는다. 비가 얼마나 오려고 그러는지 두터운 잿빛 구름이 무겁게 가라앉아 음산한 기운을 풍긴다. 새벽 6시 5분 광주행 기차를 기다리며 빗방울이 떨어지는 하늘을 보면서 우산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오늘 비가 올 게 뭐냐며 투덜거리다 지난해 가뭄을 생각하곤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 비오는 날의 여행도 색다를 거야. 얼마나 운치 있을까. 비내리는 대숲에서의 고즈넉함을 생각하자 기차에 오르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래도 장대비는 좀 곤란한데….

다행히 광주역 바로 뒤에서 담양가는 시내버스가 있어서 헤매는 일은 없었다. 차창에 쉴새없이 물방울이 맺혀 흘러 내리는 걸 보며 문득 비를 맞고 싶은 충동이 인다. 봄비도 아니고, 가을비도 아니고, 겨울비는 더더욱 아닌 여름비가 내리면 몸이 근질근질해진다. 마치 잠자던 세포가 살아나는 느낌이 들어 인적 없는 바닷가 백사장이나 숲속에서 맨몸으로 비를 맞으면 어떨까 상상하며 황홀감에 젖게 된다. 때마침 버스에 설치된 라디오의 음악프로에서 샹송 '빠롤레 빠롤레 빠롤레'가 흘러나온다. 알랭 들롱과 달리 다의 흑설탕처럼 달달한 저음의 목소리가 촉촉히 내리는 여름비에 녹아들어 참을 수 없이 나른해진다. 새벽 일찍 일어난 탓에 덜컹거리는 버스에 몸을 맡기자 어느새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천근만근 눈꺼풀을 들었을 때 운전기사 머리 위에 달린 거울에서 기사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운전기사의 표정이 딱 이랬다. '저렇게 인사불성으로 졸다 내릴 데서 제대로 내릴랑가 모르겄네. 참말루 걱정스럽소잉.'

▲ 관방제림
▲ 관방제림
'나무도 아니고 풀도 아닌 것이' 쭉쭉 뻗은 대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 대나무 면적의 30%를 차지하는 담양 죽녹원은 그야말로 대나무 천지다. 8가지 주제의 길로 돼있는 죽녹원은 푸른 뼈다귀같은 대나무들이 위엄있게 버티고 있어 방문객을 압도한다. 이 곳엔 이이남미디어아트센터라는 미술관도 있다. 고전과 디지털의 만남을 테마로 한 작품을 전시하는데 대나무그림을 영상화한 작품이 특히 눈길을 끈다. 대나무는 세찬 바람에도 흔들리기만 할뿐 부러지지 않아 지조있는 사람을 일컬어 대쪽같다고 한다. 그나저나 '대쪽같은 정치인' 이회창씨는 요즘 뭐하시나. 지금은 갈 수 없는 내 고향집 뒤뜰에도 대나무가 무성했는데, 추억 하나가 떠오른다. 요맘때였다. 부모님은 들에 가시고 집에는 나와 언니만 있었는데 '찰강찰강' 엿장수 가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음모를 꾸민 우리는 재빠르게 헛간 바닥에 널어놓은 마늘 여남은 통으로 엿을 사서 집 뒤 대숲으로 내달렸다. 누가 볼세라 허겁지겁 엿을 먹어치우는 사이 독을 잔뜩 품은 모기들은 우리 피를 사정없이 빨아댔다. 봉인된 우리의 비밀은 덕분에 훗날 가족들에게 두고두고 재밌는 얘깃거리가 됐다.

▲ 메타세콰이어길
▲ 메타세콰이어길
1시를 훌쩍 넘겨 죽녹원 근처 정갈한 한식당이 있길래 들어갔다가 퇴짜 맞고 나왔다. 1인분은 안 판단다. 혼자 여행할 때 딱 하나 아쉬운 점이다. 혼밥이 시대의 트렌드가 되는 마당에 이렇게 문전박대 하다니! 맞은편 국밥집에 들어가 뭘 먹을까 궁리하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비오는 이런 날엔 우거지등뼈해장국이 좋지 않겄소”라며 배시시 웃었다. 죽녹원 앞엔 담양천이 흐른다. 그 담양천변의 제방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숲이 관방제림이다. 1.2㎞ 구간에 200년이 넘은 팽나무, 느티나무, 벚나무 등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풍치를 줘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관방제림은 급할 것 없이 천천히 걸으며 부드러운 바람을 만끽하고 은은한 꽃향기를 맘껏 즐기며 세상의 모든 풍미를 느낄 수 있다. 산책나온 동네 할머니들이 어디서 왔냐고, 혼자 여행하기 심심하지 않냐며 호기심어린 눈으로 이방인을 관찰한다. 그러면서 가볼 만한 데가 또 있다며 일러주셨다. “여그서 좀 더 가면 메타세콴지 뭔지 가로수길이 있어. 참 좋으니께 갔다 와봐.”

역사상 위대한 여행자들과 마찬가지로 이 보잘 것 없는 여행자도 내면에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불같은 영혼을 진정시키려 길을 떠난다. 나의 몸은 결코 쉬는 걸 용납하지 않는다. 그저 더 멀리 가고 싶은 간절한 욕구를 품고 살았다. 산 너머 저쪽 세상엔 여기엔 없는 새로운 것들이 있을 거라며 날마다 희망을 품었던 유년의 동경은 지금도 유효하다. 길을 나설 때마다 나는 지상의 마지막 유랑인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언제나 나보다 더 미친 천상의 방랑자가 있다는 걸 생생히 목도한다. 나의 긍지가 터무니없는 오만이란 걸 깨닫게 된다.

글·사진=우난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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