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속으로]오상고절, 국화 옆에서

  • 오피니언
  • 세상속으로

[세상속으로]오상고절, 국화 옆에서

윤여환 충남대 예술대학 회화과 교수

  • 승인 2019-06-12 11:07
  • 신문게재 2019-06-11 22면
  • 이상문 기자이상문 기자
윤여환 충남대 교수
윤여환 충남대 예술대학 회화과 교수
국화가 꽃이 지고 긴 동토의 터널을 지나면 매화가 꽃을 피우면서 봄이 온다. 매화가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꽃이라면 국화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꽃이다.

북송 때 시인 소식(蘇軾)은 겨울풍경(冬景)이라는 시에서 국화는 시들어도 서리를 이겨내는 가지가 있다(菊殘猶有傲霜枝)"라고 했고, 조선시대 시조시인 이정보(李鼎輔)도 '해동가요'에서 뭇 꽃들이 다 지고 난 늦가을에 심한 서릿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고고하게 피어나는 국화의 모습을 보고 오상고절(傲霜孤節)이라 하였다.



가난한 선비였던 동진(東晉)의 전원시인 도연명(陶淵明)은 호구지책으로 천성에 맞지 않는 관직에 몸 담았다가 80여일만에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귀거래사'를 쓰면서 소나무와 국화를 벗하며 살았다. 그로 인해 국화는 군자의 맑은 아취와 높은 절개를 지닌 꽃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래서 소나무와 국화는 도연명의 분신이자 은일의 표상이 되었다. 은군자(隱君子), 은일화(隱逸花)라는 별명은 여기에서 연유한다. 또한 찬 서리를 견디면서 그 청초한 모습을 잃지 않는 국화의 생태는 길상 또는 상서의 상징으로도 받아 들여졌다.

겸재 정선(謙齋 鄭敾)은 도연명의 시 음주(飮酒) 제5수에 있는 동리채국(東籬彩菊)을 그림으로 재현하였다. 선비의 평상복을 입은 도연명이 소나무가 서 있는 사립문 앞에서 국화를 따다가 남산을 여유롭게 바라보고 있는 그림이다. 한 그루의 노송에서 풍기는 절조와 은일이 도연명의 생애와 잘 어울리고 있다.



서산대사가 남긴 '청허집(淸虛集)'에 보면 '소나무와 국화를 심다(栽松菊)'라는 시에서 소나무와 국화를 심어놓고 색즉시공(色卽是空)의 진리를 설파한다.

국화의 한자인 '菊'의 어원은 곡식을 수확하는 의미와 그해 마지막 꽃(鞠)이라는 뜻도 있다. 당나라 시인 원진의 '국화' 시구절에서 "이 꽃 다 지고 나면 다른 꽃이 더 없네(此花開盡更無花)" 라고 하여 국화를 일년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만추의 꽃이라 하였다.

장례식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꽃이 흰 국화다. 고인의 명복을 비는 경건한 자리에 수많은 꽃 가운데 유독 국화가 헌화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화는 신이 만든 꽃 중에 가장 마지막으로 만든 꽃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을 잘 마치고 신의 품으로 돌아가 편히 쉬라는 뜻도 지니고 있다. 서양에서의 국화는 저승에 가서 평화롭게 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말이라고도 한다.

유교문화가 지배하던 조선시대에는 장례식에 꽃이 아니라 향을 피우며 명복을 빌었다. 그러나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흰 국화와 검은색 상복이 장례식장에 등장했다. 서양에선 국화가 고결과 엄숙을 뜻하고 검정색은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국화는 예부터 불로장수를 상징하였다. 그래서 장수의 의미를 가진 국화의 다른 이름에 갱생(更生), 장수화(長壽花), 수객(壽客), 부연년(傅延年), 연령객(延齡客) 등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또한 국화에 기국연년(杞菊延年), 송국연년(松菊延年)이라는 축수의 문구를 부쳐 환갑이나 진갑 등의 잔칫상에 장수를 기원하는 헌화로 많이 사용하였다. 민화에서 괴석사이에 피어있는 국화를 그린 그림은 국화와 바위가 모두 장수를 뜻하기 때문에 고수(高壽)와 익수(益壽)를 뜻하기도 한다.

이렇게 인간은 누구나 무병장수, 불로장생을 원하지만 죽음 앞에서는 그 누구도 예외 일 수가 없다. 국화가 오늘을 사는 현대인에게 던지는 화두는 항상 감사하는 삶을 제시해주고 있다. 들녘 경사진 언덕에 국화 네가 없었던들 가을은 얼마나 적적했으랴고 읊었던 노천명도, 저 푸른 하늘과 태양을 볼 수 있고 대기를 마시며 내가 자유롭게 산보할 수 있는 한 나는 충분히 행복하고 신에게 감사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윤여환 충남대 예술대학 회화과 교수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날씨]대전·충남 1~5㎝ 적설 예상…계룡에 대설주의보
  2. 세종시 체육인의 밤, 2026년 작지만 강한 도약 나선다
  3. '자기계발 명상 캠프', 20대에 써내려갈 성공 스토리는
  4. '대통령 세종 집무실', 이 대통령 임기 내 쓸 수 있나
  5. 햇잎푸드, 100만불 정부 수출의 탑 수상... "대전을 넘어 전 세계로"
  1. 천안법원, 정지 신호에도 직진해 사망자 유발시킨 30대 중국인 벌금형
  2. 국제디지털자산위, 필리선 바타안서 'PPP 개발 프로젝트 밋업' 연다
  3. 천안문화재단, 2026년 '찾아가는 미술관' 참여기관 모집
  4. 대전시장 도전 許 출판기념회에 與 일부 경쟁자도 눈길
  5. 백석대, 천호지 청춘광장서 청년·시민 협력 축제 성료

헤드라인 뉴스


[대전, 일류 문화도시의 현주소] 국립시설 `0개`·문화지표 최하위…민선8기 3년의 성적표

[대전, 일류 문화도시의 현주소] 국립시설 '0개'·문화지표 최하위…민선8기 3년의 성적표

대전시는 오랜 기간 문화 인프라의 절대적 부족과 국립 시설 공백 속에서 '문화의 변방'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민선 8기 이장우 호(號)는 이 격차를 메우기 위해 대형 시설과 클러스터 조성 등 다양한 확충 사업을 펼쳤지만, 대부분은 장기 과제로 남아 있다. 이 때문에 민선 8기 종착점을 6개월 앞두고 문화분야 현안 사업의 점검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대전시가 내세운 '일류 문화도시' 목표를 실질적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단순한 인프라 확충보다는 향후 운영 구조와 사업화 방안을 어떻게 마련할는지도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중도일..

"대전 충남 통합논의" … 金총리-與 충청권 의원 전격회동
"대전 충남 통합논의" … 金총리-與 충청권 의원 전격회동

김민석 국무총리와 더불어민주당 충청권 의원들이 대전시와 충남도 행정통합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전격 회동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얼마 전 충청권을 찾아 대전 충남 통합에 대해 긍정적 메시지를 띄운 것과 관련한 후속 조치로 이 사안이 급물살을 탈 수 있을지 주목된다. 복수의 여권 관계자에 따르면 김 총리와 민주당 충청권 의원들이 15일 서울에서 오찬을 겸한 간담회를 갖는다. 김 총리와 일부 총리실 관계자, 대전 충남 민주당 의원 대부분이 참석할 것으로 전해졌다. 회동에서 김 총리와 충청권 의원들은 대전 충남 통합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대전역 철도입체화, 국가계획 문턱 넘을까
대전역 철도입체화, 국가계획 문턱 넘을까

대전 원도심 재편의 분수령이 될 '대전역 철도입체화 통합개발'이 이번엔 국가계획에 이름을 올릴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14일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정부는 올해 초 철도 지하화 선도지구 3곳을 선정한 데 이어, 추가 지하화 노선을 포함한 '철도 지하화 통합개발 종합계획' 수립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종합계획 반영 여부는 이르면 12월, 늦어도 내년 상반기 중 윤곽이 드러날 전망이다. 당초 국토부는 12월 결과 발표를 예고했으나, 지자체 간 유치 경쟁이 과열되면서 발표 시점이 다소 늦춰질 가능성도 점쳐진다. 실제로 전국 지자체들은 종합..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까치밥 먹는 직박구리 까치밥 먹는 직박구리

  • ‘겨울엔 실내가 최고’…대전 곤충생태관 인기 ‘겨울엔 실내가 최고’…대전 곤충생태관 인기

  • 병원도 크리스마스 분위기 병원도 크리스마스 분위기

  • 트램 2호선 공사현장 방문한 이장우 대전시장 트램 2호선 공사현장 방문한 이장우 대전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