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즘] ‘미만잡’의 조국

  • 오피니언
  • 프리즘

[프리즘] ‘미만잡’의 조국

  • 승인 2019-09-11 15:06
  • 김성현 기자김성현 기자
2019080601000488500017531
송지연 우송대 초빙교수.
"엄마가 최순실이 아니라 미안해"라는 자막이 붙은 방송 짤이 한동안 SNS에 자주 공유되었다. 여기서 '짤'이란 인터넷 공간을 돌아다니는 자투리 이미지 파일을 통칭하는 신조어인데 사실 신조어라기엔 유래된 지 10년이 넘었고 은어라기엔 너무 대중적인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대에 따라 누군가는 처음 들어보기도 할 것이므로 설명을 붙여본다. 본의 아니게 한국 인터넷 문화의 원형을 포태하는 역할을 했던 디시인사이드는 그 게시판의 성격이 '갤러리'인 만큼 각 갤러리의 주제에 맞는 사진을 올리지 않으면 운영자에게 글이 삭제될 수도 있었는데, 바로 그러한 삭제 및 잘림을 방지하는 '짤림방지'용 사진을 이용자들이 '짤방'이라 줄여 불렀고, 그게 '짤'로 축약된 것이다.

조국 후보자가 기어코 법무부 장관이 되고야 말았으니 이 글에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잘리지 않기 위한 짤이 하나 필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내 발언의 자유를 보장받으려면.

짤의 출처는 <김제동의 톡투유 : 걱정 말아요 그대>라는 JTBC 프로그램이다. 한 20대 여성이 마이크를 잡았고, 어머니가 자신에게 한 사과에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요는 자식 교육을 위해 아끼느라 좋은 옷 한 벌 못 사 입으시면서도 자식들에게 흙수저를 물려주어 미안하다고 사과하시게 하는 이 불평등한 사회 구조가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언니는 예체능을 전공했고 그녀는 삼수를 했으며 동생은 자사고에 다녔다는 배경까지를 다 듣고 나면 그녀의 흙수저 운운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게 나 혼자만은 아니리라. 동영상 링크에는 다음과 같은 베댓(베스트 댓글)이 달려 있었다. "저 분 아버지 요즘 자기가 조국이 아니라서 미안하다고 하신답니다".

진심으로 그렇게까지 못 해줘서 미안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많을지도 모른다. 드라마 <스카이 캐슬>이 왜 그토록 화제가 되고 인기를 끌었는지를 쉽게 알 수 있는 한국적 현실의 노골적 한 대목이다. "엄마가 최순실이 아니라 미안해, 아빠가 조국이 아니라 미안해"와 같은 말은 김제동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그러했듯 사회 기득권을 비판하는 자리에서 쓰이곤 해왔지만, 그 말의 의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면 거기엔 날 선 비판은커녕 자기 처지에 대한 한탄만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짤방을 인터넷 밈의 대표적 예로 보자면 제법 회자된 이 짤의 사용처나 공유맥락은 어떤 집단적 멘탈리티를 드러낸다. 그러니까 그건 실은 자신도 기득권 내지 상류층이 되고 싶다는 얘기다. 물론 기득권 내지 상류층이 되고 싶은 것은 별문제가 아닌데, 바로 그들을 정의롭게 비판하는 자리에서 저런 말이 쓰인다는 건 영 앞뒤가 맞지 않아 문제적으로 보인다. 심지어 그냥 되고 싶기만 한 것도 아니다. 그만한 능력이나 여건이 되면 자신들도 각종 위법과 편법을 저지르겠다는 얘기도 된다. 비판으로 위장된 욕망이다.

학벌 서열주의 없애자고 말하는 사람들이 실은 가장 학벌 서열주의에 집착한다. 욕망이 강할수록 정직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그걸 부정하고 싶은 힘도 세게 작동한다. 과도하게 욕망하지 않으면 그것은 자신을 억압하지도 않을 텐데 말이다.

양적, 물적 토대를 이만큼이나 이룬 나라에 사는 우리는 이제 이런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다. 그게 정말 꽃길인가. 능력이 부족한데 억지로 의사로 살면 행복할까. 의사에게 주어진 일상적 직무와 책임은 막중하다. 그 명함을 무슨 수를 써서든 가지기만 하면 고단한 내 인생 술술 풀릴까.

또한 부모가 모든 걸 다 컨트롤하는 게 자식을 잘 키우는 것이고 자식에게 잘 해주는 것일까. 좋은 환경을 물려주지 말란 얘기가 아니다. 애초에 부모는 자식에게 DNA도 물려주지 않았나. 알게 모르게 물려주고 물려받는 모든 것들을 다 없애버릴 수도 없는 일이다. 그것은 정치와 제도 이전에 본성과 감정, 생명과 번식 등 자연의 이치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자식이 원하고 본인에게 경제적 여유가 있다 하더라도 아닌 건 아니라고 냉정하게 말해줄 수 있는 부모가 더 많아졌으면 한다.

솔직히 최순실 때보다 실망스러운 건 서울대 법대 교수라는 한국 최고 엘리트의 가정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의학전문대학원에만 들어가면 만고땡이라는 정도의 가치관에 매몰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한국은 입시문화가 원체 그렇기는 하다. ‘서연고서성한중경외시의 서연고’면 된다는 그것 하나. 내실이 어떠하든 내용이 무엇이든 간판만 걸고 꼭대기에만 올라가면 끝이다. 어떤 자리인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일인지 어떤 인생인지 구체적으로 살뜰히 살펴보는 정신의 가치랄 게 아무것도 없다. 조국 딸의 입시 과정 역시 "의사-미만잡"으로 귀결된다.

고리타분한 선비의 나라라고? 오히려 진정한 선비적 가치추구가 없는 나라에 가깝다. 내용 없는 간판과 명패와 계급과 서열만을 추구한다. 공허한 상승 욕구만이 내달린다. 그것이 나의 조국이고 그것이 현재 한국 기득권 엘리트의 수준이다.

김태희-미만잡이나 전지현-미만잡으로 살면 자기만 피곤하다. 그 기준은 나에게도 돌아온다. 평등한 외모는 없지만 우리에겐 모두 다른 매력이 있다. 엄마가 최순실이 아니고 아빠가 조국이 아닌 건 미안할 일이 아니라 다행인 일이다./송지연 우송대 초빙교수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중수청 5급' 검사엔 낮고, 경찰엔 기회?… 직급 셈법에 대전·충청 수사현장 촉각
  2. [르포] "지하 파고, 흙더미 쌓인 트램 공사장"… 폭우 앞둔 대전 도심
  3. 대전 서구 다시 젊어진다… 도마·변동 정비사업 순항, 둔산·갈마도 시동
  4. 대전시 재정난 후폭풍…자치구 현안사업 줄줄이 빨간불
  5. 허태정 대전시장 "무너진 시정 회복 시급…민생 최우선"
  1. 반도체, 장관인사 이어 차관도 충청 홀대…19개부처 달랑 2명
  2. [사설] 지방중수청 ‘개문발차’ 상황 우려된다
  3. [사설] '홈플러스 사태', 벼랑 끝에 선 근로자
  4. 올 여름엔 나도 ‘몸짱’
  5. [중도초대석] 성보기 초대 대전회생법원장 “회생은 경제적 치유 과정… 골든타임 놓치지 않겠다"

헤드라인 뉴스


연간 150건 넘는 교권침해… `교권신장담당관`이 안전망 될까

연간 150건 넘는 교권침해… '교권신장담당관'이 안전망 될까

대전교육청이 교권 보호를 위한 새로운 전담조직인 '교권신장담당관' 신설을 추진하는 가운데, 새 조직이 교육현장의 실질적인 안전망으로 자리 잡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연간 150건이 넘는 교육활동 침해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예방부터 초기 대응, 법률 지원, 심리 회복까지 아우르는 체계적인 교권 보호 시스템 구축이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6일 대전교육청에 따르면 2024년 교육활동 침해 심의는 총 175건으로, 이 가운데 162건이 교육활동 침해로 인정됐다. 9건은 침해가 아닌 것으로 결정됐고, 3건은 분쟁조정, 1건은 유보..

박수현 충남지사, 구본영 정무부지사 자질 논란 정면돌파…"성과로 보답"
박수현 충남지사, 구본영 정무부지사 자질 논란 정면돌파…"성과로 보답"

박수현 충남지사가 최근 지역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제기된 구본영 정부부지사의 자질 논란에 대해 "성과로 함께 보답하겠다"고 밝히며 변함없는 신뢰를 드러냈다. 이날 박 지사는 도청 기자실에서 간담회를 열고 최근 내정한 구 정무부지사의 인선과 관련한 논란에 대해 공감의 뜻을 표했다. 다만, 번복 가능성에 대해선 단호히 선을 그었다. 그는 "과거 정무부지사의 법적인 문제로 인해 도덕적 자질에 대한 의구심이 생기는 것에 대해 충분히 공감한다"라면서도 "그렇다고 인선을 번복할 단계는 아니다. 미래에 함께 일궈낼 성과로 최근 지적된 사항들에 응..

한화오션 캐나다 잠수함 사업 고배… 주가도 장 초반부터 20%대 급락
한화오션 캐나다 잠수함 사업 고배… 주가도 장 초반부터 20%대 급락

한화오션이 60조 원 규모의 캐나다 차세대잠수함도입사업(CPSP) 수주전에서 고배를 마셨다.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는 6일(현지시간) 노바스코샤주 핼리팩스 해군기지에서 CPSP 사업 우선협상 대상자로 독일 티센크루프마린시스템스(TKMS)를 최종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카니 총리는 다만 "TKMS와의 협상이 결렬될 경우 캐나다는 예비 공급업체인 한화오션을 우선 공급업체로 지정하고 협상을 진행할 권리를 보유한다"고 밝혔다. 이번 사업은 잠수함 12척을 건조하고 30년간 유지·보수·운영하는 비용을 포함해 최대 60조 원에 달하는 대형 방산..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방학과 휴가철 앞두고 분주한 여권창구 방학과 휴가철 앞두고 분주한 여권창구

  • 올 여름엔 나도 ‘몸짱’ 올 여름엔 나도 ‘몸짱’

  • 장맛비 내리는 대전 장맛비 내리는 대전

  • 가족사랑 금요장터서 농산물 구입 가족사랑 금요장터서 농산물 구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