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필톡]그 슈퍼는 어디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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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난순의 필톡]그 슈퍼는 어디 갔을까

  • 승인 2018-12-12 11:02
  • 신문게재 2018-12-13 22면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슈퍼
이 동네로 이사온 건 13년 전이었다. 예전에는 제법 번성했으나 지금은 쇠락해 가는 시장이 과거의 흔적을 간신히 유지하는 곳이었다. 그 시장을 울타리 삼아 안쪽으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나도 이 동네 주민이 됐다. 회사도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있고 무엇보다 재래시장이 있어 단박에 맘에 들었다. 오래된 시장은 얘깃거리도 풍부했다. 한때 주먹 깨나 쓰는 동네 건달들이 시장바닥을 주름잡았다느니, 건달과 술집 작부의 로맨스로 세상이 떠들썩했다느니, 이제는 그들이 이빨 빠진 노인네가 되어 구들장 지고 목숨을 부지한다느니, 전설처럼 내려오는 풍문은 한때 이곳이 대전의 핫플레이스였다는 걸 증명했다. 그만큼 여기 토박이들은 대대로 이 곳을 터전 삼아 살아왔다. 하나같이 오랜 세월 이 곳에서 부대끼며 살아온 사람들이다.

출퇴근할 때 지나는 시장 거리엔 슈퍼마켓과 철물점, 전파사, 과일가게, 세탁소, 미용실 등이 있다. 말이 도시지 시골 읍내 같은 이곳은 정 깊은 인심이 살아있는 곳이다. 한껏 멋을 낸답시고 치마를 입고 출근하는 날, 스타킹이 없을 때가 있다. 촌각을 다투는 출근시간. 헐레벌떡 슈퍼로 달려가 스타킹을 사 신곤 했다. 슈퍼는 중년의 부부가 운영했다. 오전엔 남편이 일찍 문을 열고 부인은 오후에 나왔다. 늦게까지 문을 여는 탓인지 점심, 저녁은 슈퍼에서 해결하는 모양이었다. 슈퍼 앞 길가 철제 탁자엔 간단한 조리기구와 몇 개의 반찬그릇이 있었다. 퇴근하다 보면 부부는 종종 이웃들과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소주잔을 부딪치기도 했다. 슈퍼 부부와 안면을 트다보니 그들에게 신세지는 일이 많았다. 덜렁거리는 성격이라 지갑을 집에 놓고 와 외상을 지는 날이 허다했다. 어느날은 슈퍼 맞은편 전파사에 고장난 찜질팩을 맡기려다 문을 안 열어서 저녁까지 보관해 줄 것을 부탁한 적도 있다. 그럴 때마다 슈퍼 주인은 선선히 맡아줬다.



그런데 어느날 슈퍼가 사라졌다. 공사를 하길래 내부수리 중인 줄 알았는데 편의점이 떡 하니 들어선 것이다. 주인도 바뀌었다. 몇 년 새 동네에 편의점이 몇 개나 생겼다. 낡은 건물들 사이의 삐까번쩍한 편의점은 언제봐도 눈부시다. 깨끗하고 고급스런 편의점은 늘 환하게 밝혀져 있다. 투명한 유리 사이로 보이는 진열대의 물건들은 어찌나 질서정연한 지. 먼지가 뽀얗게 쌓였던 슈퍼와는 비교도 안되는 수준이다. 24시간 '우리동네 냉장고' 역할에 충실한 편의점. 편의점은 자본주의의 첨병처럼 보인다. 신자본주의가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세계체제에 편입됐다는 확실한 물적 증거로 내세울만한 것이 편의점만한 게 어딨을까. 재래식 구멍가게에 비해 우월하고 세련되고, 거기다 영업시간도 길어 어느때나 들를 수 있는 곳이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장 보드리야르의 통찰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는 법. 양극화 시대를 논할 때 편의점은 빼놓을 수 없는 소재가 된다. 편의점 대부분이 재벌들의 소유라는 점에서 '편리'만을 따지기엔 껄끄러운 진실을 마주해야 한다. 골목상권 죽이기에 앞장서는 거대자본의 그물망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대한민국은 가히 편의점 공화국이 됐다. 경제적 약자들이 대거 편의점으로 몰린 결과다. 재벌들에겐 경제 불안이 오히려 돈을 불리는 호기인 셈이다. 불경기의 역설이다. 또 편의점주 밑에선 88만원 세대라 불리는 알바 노동자들이 밤을 하얗게 밝히며 생존에 몸부림친다. 정글과 다를 바 없는 먹이사슬의 구도가 적용되는 세계다. 이렇게 자본의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영혼을 갉아먹는다. 아, 전파사 아저씨의 아코디언 연주는 언제까지 들을 수 있을까. 늙수그레한 세탁소 아저씨는 만날 때마다 "퇴근하슈?"라며 환하게 웃어 주는데…. 부디 이 거리의 옛 사람들이 남아 있기를 바란다. <미디어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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