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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
인조 15년 음력 1월 30일, 서기 1637년 2월 24일이었다. 실록은 왕이 삼전도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上行三拜九叩頭禮)"고 기록했다. 인조는 추운 날 찬바람 씽씽 거리는 밭 한가운데 앉혀졌다. 그 곁에서 청 태종과 왕자와 장수들은 활을 쏘며 술 마시고 놀았다. 신하가 개 두 마리를 끌고 오자 홍타이지는 선혈이 낭자한 고기를 칼로 썰어 개들에게 던져주었다.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인조에게 도성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노를 저어 강을 건너게 해 줄 조선의 군사들은 거의 죽었고 빈 배는 두 척 뿐이었다. 배에 먼저 올라타려는 백관들이 왕의 옷가지를 끌어당겼다. 훗날 인조는 참된 신하와 충성을 위장하는 거짓 신하를 구별할 수 있다고 일갈했다.
그 날 삼전도에서 왕세자와 빈궁, 두 대군과 부인은 인질로 잡혀 강조차 건너지 못했다. 몸이 약했던 왕세자는 다음 날 눈길의 무악재를 넘어 청나라로 끌려갔다. 잘 아는 대로 소현세자다. 인질로 잡혀 있는 동안 심양과 북경에서 소현세자는 청의 위세를 보았다. 청에 와 있던 서양 선교사들을 만나 문물의 발전에도 눈을 떴다. 강빈도 소임을 보탰다. 조선의 왕 인조는 인질을 살던 청나라 땅의 왕세자 내외를 감시했다. 1645년 2월 오랜 인질 생활을 마감하고 소현세자가 귀국했다. 두 달 만인 4월 26일 세자는 죽었다. 왕이 세자를 죽였다는 풍문이 퍼졌다. 며느리 강빈도 인조를 독살하려했다는 혐의를 받아 친정으로 쫓겨 갔다. 강빈은 왕의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 무렵 신하들은 왕이 며느리를 죽이려고 하자 이에 반대하는 논의를 했다. 왕은 더 이상 거론하지 말라고 선을 그었다. 신하들은 아들의 아내인 강빈을 죽일 필요까지는 없다고 아뢰었다. 인조는 의심이 많았다. 며느리 강빈이 심양에서 만들어 온 황금덩어리에 흉심을 품지 않을 신하가 몇이냐 되겠냐는 의심이었다. 실록에 의하면 1646년 인조 24년 2월 9일, 왕은 신하들에게 자신을 모욕하지 말라고 화를 냈다. 신하들은 신하들이 왕을 모욕했다고 왕이 오해하는 것은 몹시 온당치 못하다며 맞섰다. '버럭 인조'는 소리를 질렀다. "개새끼 같은 것을 임금의 자식이라고 칭하니, 그것이 모욕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 날 사관은 왕이 욕을 했다고 정직하게 기록했다. 임금의 입에서 걸어 나온 거친 욕설을 은폐하지 않고 적나라하게 사실적으로 적었다. 사관은 기록하는 사람이었다.
최근 피와 눈물과 생명을 바쳐 다져 온 민주주의의 역사를 짓밟는 망언이 버젓하다. 독일 등 선진 유럽에서 그와 같은 망언 선동은 감히 무거운 형벌로 징치해야 할 범죄다. 언론의 역할이 막중해졌다. 따옴표 저널리즘의 행태로 망언을 받아써서 확대 재생산하는 언론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자기 입맛대로 취사선택해 받아 적는 것은 기록이 아니라 왜곡이다. 역사 속 사관들은 보고 들은 대로 기록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언론은 단순한 기록자가 아니다. 언론은 '파헤쳐 질문하고 공정하게 기록'하는 존재다. 기록은 기억보다 강하다지만 언론이 제대로 파헤쳐 질문하는지, 본연의 공정한 기록자인지 시민들은 하루하루의 언론을 기억한다. 그 때 시민의 기억은 비틀어진 기록보다 강하다. 망언 정국을 다루는 언론에 대한 시민들의 개별 기억은 모여서 함께 도도한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더욱이 지금은 빛이 바래거나 억지로 지워지지 않는 디지털 언론 기록의 시대 아닌가.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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