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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천 교수 |
아펜젤러는 고종으로부터의 교명 하사가 외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에 대한 당시 조선인들의 거부감과 두려움을 완화해 줄 것으로 기대하며 크게 기뻐하였으며, 더욱이 '배재'가 '배양영재(培養英材)'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흡족해 한 아펜젤러는 마태복음 20장 26절에 나오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라는 구절을 인용하고 당대 한학자 조한규가 한역하여 '欲爲大者 當爲人役(욕위대자 당위인역)'이라는 당훈이 만들어져 교명과 당훈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
『배재학당사』의 기록에 의하면 스크랜튼(M. F. Scranton)이 의사가 되고자 영어를 배우기 원하는 이겸라, 고영필을 아펜젤러에게 소개한 것이 최초의 배재학당 학생 모집이었다고 한다. 1885년 8월 3일 아펜젤러는 이 두 학생을 당신의 집으로 불러 영어로 수업을 시작하였으며, 이어서 다른 관립학교에 있었던 이성나 외에 다른 2명의 학생이 영어를 배우기 위해 더 들어왔으니 이로써 역사적인 배재학당의 첫 수업이 시작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아펜젤러는 본격적으로 학교 설립에 착수하기로 마음먹고 학교 건물과 부지 확보에 애를 썼다. 그리하여 서울 정동 34-5번지 일대 김봉석의 집과 참의 안기영과 승지 채동술이 살던 집과 부지를 매입하여 1886년 6월 8일 드디어 정식으로 학교를 개교하였다. 초기에는 영어를 베우고 싶지만 선교사가 세운 기독교 학교라는 사실에 망설이던 학생들이 있었지만, 고종이 배재학당이란 사액 현판을 하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배재학당을 졸업한 학생들이 궁궐 통역관으로 채용되고 그 외에도 다른 정부 관직에 임명되면서 배재학당은 정부 기관에 진출할 수 있는 출세의 통로가 되었으며, 이는 입학률 중가로 이어지게 되어 해마다 지원자가 늘어났다.
당시 배재학당은 무상교육이었고 기혼자들에게도 배움의 기회를 준 열린 교육을 실시하여 근대화의 길을 열었으며, 한문, 역사, 교리문답을 제외한 전체 과목을 영어로 강의하는 등 세계화 교육을 지향하였다는 점에서 교육사적으로 근대교육의 특징적 요소라고 할 만하다. 이와 관련하여 당대 최고의 역사학자인 이능화는 『朝鮮基督敎及外交史(조선기독교급외교사)』에서 열악한 조선의 교육적 환경에서 미국 교회에서 학교를 세우고 신교육을 실시하였으니 영어, 수학, 세계 지리 및 역사 등을 가르친 조선 최초의 사립학교로 배재학당을 언급하기까지 하였다.
구체적인 교육 내용으로 배재학당은 서구의 과학과 문학 교육 과정을 반영하여 한문, 영어, 천문, 지리, 생리, 수학, 수공, 성경, 체조, 창가 등의 교과목을 개설하고, 미국의 선교사 헐버트(H. B. Hulbert)가 집필한 최초의 한글 교과서로서의 의의를 지닌 세계의 지리, 역사, 풍속 등을 담은 『士民必知(사민필지)』를 교과서로 삼아 가르쳤다. 또한, 연설회, 학생 토론회 활동이나 야구, 축구 등 다양한 체육 활동과 운동회를 체계적으로 개최하여 명실상부한 근대교육 기관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또한, 배재학당 졸업식에는 정부 관료들까지 참석하는 등 근대교육 기관의 표상으로서 장안에 커다란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올해 창학 140주년을 맞이하는 배재학당은 설립 때부터 신교육을 실시하고 세계화를 지향한 교육을 펼쳤으며 교육에 남녀 구별을 두지 않았으며 사람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평등교육을 실시한 명실상부한 근대교육의 요람으로서의 교육사적 의의를 지닌다.
/백낙천 배재대 국어국문·한국어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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