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시평] 말의 폭력, 글의 향기

  • 오피니언
  • 중도시평

[중도시평] 말의 폭력, 글의 향기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 승인 2019-04-02 14:31
  • 신문게재 2019-04-03 22면
  • 고미선 기자고미선 기자
이승선교수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귀로 들었던 말이 뇌리에 미늘처럼 박힐 때가 있다. 눈으로 읽은 글이 천근의 무게로 가슴에 담기기도 한다. 요즘은 글을 말로 읽어주는 서비스와 말을 글로 바로 옮겨서 기록하는 장치가 활성화되었다. 글과 말은 한 사람의 전부를 보여주는, 한 사람의 우주가 드러나는 징표다. 공부하러 열여섯 살에 당신 품을 떠나던 날 어머니는 말 하나를 주셨다. "천이 천을 말하고 만이 만을 말하더라도 너는 너의 말을 하거라". 혼돈에 갇히고 어두운 미래에 절망할 때 당신이 건네주신 말을 회억했다. 당신의 말을 사다리삼아 빛의 세계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 때 어머니는 지금 막내 누이보다 더 어렸다. 어머니의 말은 어머니의 우주를 보여 주었다.

군역을 해결하고 진학한 대학원 첫 학기 때였다. 은사님은 나직하게 말씀하셨다. "글은 영혼의 외출이다". 내가 쓴 글에 게으름이 덕지덕지 묻어 있을 때, 빈약한 공부가 역력할 때, 맑고 고운 언어로 사람과 사람의 생각을 묘사해내지 못할 때, 묵직한 본질을 가벼운 언어들의 조합으로 어설피 재현할 때, 쓸모없이 과격한 언어로 불필요한 긴장감을 생산할 때, 은사님의 말씀은 회초리가 되었다. 그 때 은사님의 연세는 지금의 필자보다 많지 않으셨다. 글에 대한 은사님의 말씀은 외출 나온 그 분의 영혼이었다.



신문의 1면은 신문의 이념과 종사자들의 역량을 보여주는 곳이다. 신문 1면의 헤드라인은 언론으로서 신문의 양식과 투지, 영혼을 드러내주는 장치다. 한 자의 글도 결코 가벼울 수 없다. 수십 만, 수백 만 유료 독자를 거느린 신문사의 1면 헤드라인은 그 자체로 우리 사회의 역사가 된다. 훗날 이 땅에 살아 갈 후손과 지금 다른 땅들에 거주하는 이방인들이 한국 사회를 검색할 때 신문 헤드라인은 그들을 현재의 한국 사회로 이끄는 길잡이가 될 터이다. 그 무게가 어찌 가벼울 수 있는가.

발화자의 말이 놓인 맥락의 앞뒤를 따져본 뒤 사안의 핵심을 간결하게 헤드라인에 담아야 한다고 배웠다. 더러는 백 마디 말보다 침묵이 본질을 꿰뚫을 때 1면을 백지로 발행하기도 한다. 그런데 보라. 신문 1면은, 더욱이 헤드라인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이죽거리는 자들의 거칠고 혐오스러운 언어들로 넘쳐나고 있다. 선동하는 자들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언사들을 날 것 그대로 전달한다. 언론은 취재원의 발언을 겹따옴표로 처리하는 데 이골이 났다. 보수적인 언론과 진보적인 언론 간에 차이가 없어 보인다. 마치 좀 더 자극적이고, 점점 더 폭력적인 언사를 기대하는 듯한 언론을 향해 정치인들이 꽃놀이패를 즐기는 형국이다.



얼마 전 전두환 전 대통령이 법정에 소환되었을 때 기자들과 조우했다. 다음 날 진보 성향의 신문 몇 군데 헤드라인은 이랬다. "왜 이래!" 전두환, 또 '광주'를 쐈다, "이거 왜 이래" 광주 또 할퀸 전두환. '왜 이래'라는 발언을 겹따옴표로 제목처리해도 괜찮은가, 광주를 쐈다, 광주를 할퀴었다, 라는 표현은 또 어떤가. 지역판에다가 '광주 땅 밟고도 반성은 없었다'고 헤드라인을 뽑았던 한 신문사는 수도권에 배달되는 판형에서는 '사죄는 없었다' 여섯 자로 헤드라인을 고쳤다. 앞의 열 두자 제목을 보고 또 뒤집어보면서 여섯 글자로 줄였으리라. 거친 말을 쓰지 않아도 여섯 글자로 핵심을 충분히 전달하고 있지 않은가.

헌법재판소 조대현 재판관은 말과 글로 표현하지 않은 것은 언론출판의 자유로 보호할 수 없다고 말했다. 설령 말과 글로 표현을 했더라도 민주사회의 토론과 여론의 형성을 목적으로 하지 않은 것이라면 헌법상 언론출판의 자유에 속하지 않는다고도 판시했다. 언론은 거칠고 선동적인 정치인들의 입을 위해 마이크를 빌려주는 대여점이 아니다. 노회한 정치인들의 폭력적인 말을 글로 베껴 옮겨주는 것은 언론이 할 일이 아니다. 말이 거친 시대에 자기 말을 하는 언론, 글 옷을 입고 외출 나온 언론의 영혼을 기대한다.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천안시, 읍면동 행복키움지원단 활동보고회 개최
  2. 천안법원, 편도 2차로 보행자 충격해 사망케 한 20대 남성 금고형
  3. ㈜거산케미칼, 천안지역 이웃돕기 성금 1000만원 후원
  4. 천안시의회 도심하천특별위원회, 활동경과보고서 최종 채택하며 활동 마무리
  5. ㈜지비스타일, 천안지역 취약계층 위해 내의 2000벌 기탁
  1. SGI서울보증 천안지점, 천안시에 사회복지시설 지원금 300만원 전달
  2. 천안의료원, 보건복지부 운영평가서 전반적 개선
  3. 한기대 온평원, '스텝 서비스 모니터링단' 해단식
  4. 재주식품, 천안지역 취약계층 위해 후원 물품 전달
  5. 백석대 서건우 교수·정다솔 학생, 충남 장애인 체육 표창 동시 수상

헤드라인 뉴스


대전충남통합 추진 동력 확보... 남은 과제도 산적

대전충남통합 추진 동력 확보... 남은 과제도 산적

대전·충남행정통합이 이재명 대통령의 긍정 발언으로 추진 동력을 확보한 가운데 공론화 등 과제 해결이 우선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5일 충남 천안시에 위치한 한국기술교육대학교에서 열린 타운홀미팅에서 대전·충남 행정통합에 사실상 힘을 실었다. 이 대통령은 "근본적으로는 수도권 일극 체제를 해소하는 지역균형발전이 필요하다"면서 충청권의 광역 협력 구조를 '5극 3특 체제' 구상과 연계하며 행정통합 필요성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대전·충남의 행정통합은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발언으로 현재 국회에 제출돼 소관위원회에 회부된..

충청 여야, 내년 지방선거 앞 `주도권` 선점 경쟁 치열
충청 여야, 내년 지방선거 앞 '주도권' 선점 경쟁 치열

내년 지방선거가 6개월 앞으로 다가오면서 격전지인 충청을 잡으려는 여야의 주도권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대전·충청지역의 미래 어젠다 발굴과 대시민 여론전 등 내년 지선을 겨냥한 여야 정치권의 행보가 빨라지는 가운데 역대 선거마다 승자를 결정지었던 '금강벨트'의 표심이 어디로 향할지 주목된다. 여야 정치권에게 내년 6월 3일 치르는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의미는 남다르다. 이재명 대통령 당선 이후 1년 만에 치르는 첫 전국 단위 선거로서, 향후 국정 운영의 방향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때문에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정권 안정..

2026년 R&D 예산 확정… 과기연구노조 "연구개발 생태계 복원 마중물 되길"
2026년 R&D 예산 확정… 과기연구노조 "연구개발 생태계 복원 마중물 되길"

윤석열 정부가 무자비하게 삭감했던 국가 연구개발(R&D) 예산이 2026년 드디어 정상화된다. 예산 삭감으로 큰 타격을 입었던 연구 현장은 회복된 예산이 연구개발 생태계 복원에 제대로 쓰일 수 있도록 철저한 후속 조치가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국회는 이달 2일 본회의 의결을 통해 2026년도 예산안을 최종 확정했다. 정부 총 R&D 예산은 2025년 29조 6000억 원보다 19.9%, 5조 9000억 원 늘어난 35조 5000억 원이다. 정부 총지출 대비 4.9%가량을 차지하는 액수다. 윤석열 정부의 R&D 삭감 파동으로 2024년..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충남의 마음을 듣다’ 참석한 이재명 대통령 ‘충남의 마음을 듣다’ 참석한 이재명 대통령

  • 2026학년도 수능 성적표 배부…지원 가능한 대학은? 2026학년도 수능 성적표 배부…지원 가능한 대학은?

  • ‘추울 땐 족욕이 딱’ ‘추울 땐 족욕이 딱’

  • 12·3 비상계엄 1년…‘내란세력들을 외환죄로 처벌하라’ 12·3 비상계엄 1년…‘내란세력들을 외환죄로 처벌하라’